“너도 이 소설을 꼭 읽어봤으면 좋겠어.”
처음으로 사귄 여자친구는 2살 연상이었다. 한참 연애하던 시절에 ‘상실의 시대’를 나에게 읽어보라고 권했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한참 뒤에나 그 책을 읽어 보았다. 왜 읽어보라고 했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너무 늦게 읽었다는 것은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갓 대학에 입학했을 무렵은 '상실의 시대’가 우리나라에 두 번째 히트를 기록하던 즈음이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잊을만하면 한 번씩 상실의 시대가 히트를 쳤었다. 90년대에 한 번, 2000년대에 한 번, 그리고 2010년대에도 한 번. 그래서 01학번인 내 경우 대부분의 입학 동기들은 하루키의 팬이었고 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물론 유행이 사그라들면서 대부분의 입학 동기들은 더 이상 하루키를 읽지 않는데, 내 경우는 꾸준히(간간히) 하루키의 글을 즐기는 편이다.
하지만 엄밀히 얘기하면 그가 쓴 소설의 팬은 아니다. 물론 집에는 한글로 번역된 대부분의 하루키 소설이 있다. 하지만 한 번 와아 하고 감탄하며 완독한 후에는 내용도 거의 기억나지 않았고, 되풀이해서 읽은 작품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나는 하루키가 쓴 에세이의 광팬인데, 소설과는 다르게 읽고 읽고 또 읽어도 질리지 않는다. 그리고 의외로 유사하게 하루키 에세이를 더 좋아하는 사람들도 꽤 있는 듯하다.
하루키 에세이에는 최근 들어 우리나라에서 유행하고 있는 ‘소확행’의 정수가 드러난다. 문장은 군더더기 없이 심플하고, 청량음료 같은 경쾌함이 묻어난다. 그러면서도 약간은 얼빠진 아저씨 같고, 능청스러우면서도 인간미 있는 작가의 성품이 드러난다. 자연스럽게 책 속의 이야기도 오랫동안 머릿속을 맴돌게 된다.
그런 문장력에 감탄하다 보니, 내가 글을 쓸 때도 하루키처럼 쓰려고 노력하게 된다. 나야 뭐 글쓰기를 통해 돈을 벌어야 할 필요도 없고, 내 글이 누군가에게 비평당할 일도 거의 없기 때문에 저 아저씨의 스타일을 마음껏 베껴도 된다. 하지만 글을 계속해서 쓰다 보면 결국 완전히 비슷하게 할 수는 없다는 것도 깨닫는다. 일단 그 정도 글쓰기 실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역시 개인의 경험을 풀다 보면 본인이 갖고 있는 성향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드러나게 된다. 말하자면 창작의 초보라면 누군가의 스타일을 베끼는 것이 반드시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스타일을 발견하는 여정에서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 주기도 한다. 당연하지만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으며, 하늘 아래 완전히 똑같은 것도 없다.
어쨌든 너무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다 보니 하루키 같은 작가들은 칭찬만큼 비평도 많이 받는다. 아직도 여러 비평가들은 하루키 소설의 ‘깊이’가 얕다고 하거나, 메시지가 부족하다고 하거나, 천편일률적인 스타일이라고 말한다. 개인적으로는 창작 영역에서 비평가의 효용성을 전혀 믿지 않는다. 독창적 세계에 대해 이런저런 비평을 하며 연명하는 사람들 중, 실상은 대부분이 독창적 세계를 구축해본 경험이 없다. 굉장히 건방지게 들릴 수도 있지만, 내가 보기엔 비평은 재능이 부족한 사람들의 영역이다. 아마도 스스로가 뭔가를 창작하는 데 두려움이 있을 것이다.
한편, 비평가가 아니라 작가가 되는 사람들이 모두 재능이 뛰어난 사람들은 아니다. 오히려 없는 재능 속에서도 비평에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창작활동에 전념하는 성실성을 갖출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비평과 인기와 인정을 떠나 자기 할 일에 집중한다는 것은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진정한 재능은 취향과 용기, 그리고 성실함이 만나는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