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는 악랄하게도 4,5일에 걸쳐서 기말고사를 치렀다. 조금이라도 더 공부하고 시험을 치라는
위궤양처럼 섬세한 배려였다(개놈들). 대신 기말고사 첫째 날은 4교시만으로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갈 수 있었다. 자전거 페달을 전속력으로 밟으며 춤추는 바람을 얼굴에 맞으며 공상에 잠기곤 했다. '와... 시험 끝나면 뭐하고 놀지?' 우리 선조들은 그런 망상들을 '김칫국부터 마신다'라고 세련된 메타포를 통해 표현하셨다. 시험 끝나고 몇 점이 나올지는 모르지만 시험이 끝나고 뭐하고 놀 지는 미리 생각해 두었다. 당구장에 갈까, 피시방에 갈까, VCD로 영화를 볼까(그때는 VCD로 영화를 보았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회사 모니터 앞에서 또 다른 공상에 잠기기도 한다. '와... 죽고 나면 어떻게 되는 걸까?'
일단 내 상상 속에서 살아있는 자들의 지구와 죽은 자들의 지구는 차원이라는 얇은 막을 사이에 두고 동시에 존재하고 있아. 똑같은 그림이 프린트된 필름 두 장을 정확히 겹쳐놓은 것처럼. 그래서 형태와 시간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나의 의식은 여기저기 구경을 다닌다. 살아생전 보지 못한 지구의 구석구석을 샅샅이 훑어볼 것이다.
바람의 속도로 이동하며 이름 모를 식물의 잎사귀를 만져본다. 구름 사이를 떠돌아다니며 살아있는 자들의 고뇌와 행복과 증오와 사랑을 담담하게 구경할 수도 있을 것이다. 유네스코 세계 자연유산의 리스트를 따라가 보아도 좋을 것이다.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의 리스트를 따라가 보아도 좋을 것이다.
지구 상에 뭐가 있었고, 내가 뭘 놓쳤는지 남김없이 복습하고 싶다. 앙헬 폭포의 높이를 재어보고, 그랜드캐년의 거대함을 실감하고, 산호초 풀어진 바다의 선명한 푸른색과 야자수 잎사귀가 바람에 흔들리는 여유로움을, 불타는 노을이 대지를 검게 도려내는 모습을... 다시금 찬찬히 훑어보고 싶다.
꼭 극적인 것이 아니라도 놓치지 않고 곱씹어 볼 수 있다. 비 오는 날 아스팔트 위에 떨어진 새빨간 낙엽의 선명함을, 아파트 화단 속 땅강아지의 울음을(요샌 땅강아지를 통 볼 수 없다), 인도 밀림 속 벵갈 호랑이가 코를 후비는 모습을 보고 싶다. 호랑이가 코를 후빈다면 의외로 극적일 수도.
어쩌면 보고 싶지 않은 것도 모두 보게 될 것이다. 연쇄살인마라던지, 인사청문회라던지, 오염물질 불법방류라던지, 휴 헤프너의 재혼 첫날밤 그런 것들 말이다. 하지만 남김없이 모든 것들을 훑어보고 나면 지구는 더러운 것보다 아름다운 것이 훨씬 많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그 모든 것들을 다 맛보고 든든한 배를 두드리며 깨달음의 미소를 짓고 나면 보톡스나 리프팅 실 같은 걸로 환생해서 중년 여성의 자신감 회복에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나름 의미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어떠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