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킷리스트

2019.7.26

by 효창 응봉 최중원


1

고등학교 수업 때 버킷 리스트를 작성해 오는 숙제가 있었다. 부모님과 저녁을 먹고 방에 들어가서 자신의 책상에 앉고, 노트를 펼치고 펜을 잡은 다음에야 처음으로 그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에게는 버킷 리스트에 채워 넣을 만한 것이 없었다. 원하는 것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는 이미 원하는 것은 다 가지고 있었다. 새로운 무엇인가를 원하면, 곧 그는 그것을 가질 수 있었다. 가지는 데 돈이 필요하다면 부모님이 기꺼이 지출해 주었다. 가지는 데 능력이 필요하다면 그 자신이 노력하여 얻었다. 이루고 싶었던 것들은, 지금 이 나이에 이룰 수 있는 것이라면 다 이루었다. 학생회장, 모의고사 전국 순위권, 농구부 주장으로 지역 대회 우승컵도 들었다. 능력을 올리기 위해서는 대부분의 경우 많은 돈이 필요했지만 그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중에, 요컨대 어른이 되어야지만 이룰 수 있는 것들은, 자신이 원한다면 때가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이룰 수 있을 것임이 그에게는 너무나 자명했다.


이 모든 것들이 그에게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것들이었고, 그렇기에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원해" 본 적이 없었다. 이루고 싶은 일들을 목록으로 작성해 보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 수 있는지 또한 알지 못했다. 노력을 해도 얻지 못하는 것이 있을 수 있으며, 그럼에도 그것을 원하고 마음 한 구석에 순위표를 그려서 간직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있구나, 하고 그는 처음으로 진지하게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차이를 인지했다. 지금까지의 그 많은 순간들, 자신과 다른 동급생들의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지적 능력의 차이들이 교실에서 크고 작은 파열음과 함께 드러나던 순간들에도 그런 다름에 전혀 관심이 없던 그였다. 물론 한 장의 종이 분량의 과제야 그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버켓 리스트를 그는 적당히, 그러나 설득력이 있게 적어냈다. 선생님은 그 리스트를 뽑아서, 과제에 제일 진지하게 임한 사람이 그라며 수업시간에 모두의 앞에서 읽어주었다. 물론 그 리스트에 무엇을 적어 냈었는지 그는 이제 시간이 많이 흘러서 기억하지 못한다.


2

그는 서울의 명문대에 쉽게 입학하고는 2학년 때 미국의 아이비리그 대학교로 편입하여, 그곳에서 정규 과정보다 2년 일찍 석사 학위까지 마쳤다. 박사 코스를 밟지 않은 것은, 자신의 밑에서 공부하라는 교수의 제의보다, 바로 수석 연구원이 되어서 같이 일하자는 어느 대기업의 연구소장의 제의가 더 좋았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전공인 분자공학 연구를 계속하여 몇 개의 신소재를 성공적으로 개발했다. 회사에서는 그의 발명 덕분에 큰 수익을 거둘 수 있었고, 그는 초고속 승진을 계속하여 3년 뒤에는 32세의 나이에 사측으로부터 연구소장 직을 제의받았다. 자신을 영입했던 소장은 다른 어딘가로 쫓기듯 옮겨가야 할 터였다. 하지만 그는 연구소장직을 수락하지 않았다. 틈틈이 써두었던 논문으로 자신이 석사 학위를 받았던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바로 그는 연구소를 그만두고 서울의 어느 사립 대학교에서 주임 교수로 임용되었다.


34세에 정교수 임용은 대학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어서, 그는 매스컴에도 몇 번 등장하게 되었다. 중요한 학술지에 최우수 논문으로 몇 번이나 뽑혔을 때에도, 국제 신소재 학회의 최연소 정회원이 되었을 때에도 조용하던 매스컴이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이제는 어느 정도의 명성이 필요한 시점이 되었고, 자신이 세간의 화제가 될 것임을 예상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그는 똑똑하기도 했지만, 인간적인 매력도 가진 사람이었다. 넉넉한 가정에서 어려움 없이 자라고 실패를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사람 특유의 여유가 있었다. 위트와 유머가 있었고, 사람들에게 공감할 줄도,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대신 남을 경청하는 태도도 가지고 있었다. 그의 학문적 명성을 듣고 찾아온 학생들이 곧 인간적인 면모에 반해 그의 열성적인 팬이 될 정도였다.


그가 가르치게 된 학생들은, 특히 박사 과정의 학생들은 그와 나이 차이가 크게 나지 않았다. 자신보다 3살이 어린 지연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바로 자신이 지연의, 그리고 지연이 자신의 짝이 될 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연은 다른 대학에서 석사를 마치고 이제 막 이 대학 박사 과정을 시작한 터였다. 지연의 말과 글에서 그는 지연이 자신 못지않게 명석한 지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교수와 대학원생 사이에서의 공적인 대화들 사이사이에서 살짝 언급되는 것들을 통해서 그는 지연의 성향, 취향, 혹은 경제 사회적 위치 같은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다. 확신이 생기자 그는 먼저 2년째 만나오던 연인을 정리했다.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지연이 박사논문을 완성하기까지의 2년 동안 그는 연구와 학교의 행정일을 번갈아 하면서 지연의 논문을 지도했다. 지연과는 약간의 호감을 살 정도로만의 거리를 유지하였다.


지연의 졸업논문은 그 해의 우수 졸업논문 상을 탔다. 해외의 학술지에도 실렸다. 나노분자 코팅 기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산업계에서 활용 가능성이 높은 논문이었다. 지연의 졸업논문이 최종 승인된 날 저녁에 그는 지연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재즈와 클래식 사이의 노래를 틀고, 손수 만든 요리를 차리고, 까르비네 쇼비뇽을 꺼내 나누어 마셨다. 지연은 붉어진 얼굴로 그에게 자신의 마음을 말했다. 그는 지연의 마음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었다. 자신의 침대에서 이불을 덮고 자고 있는 지연의 어깨를 만지며 그는 다음으로 자신이 이룰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3

지연이 박사 과정을 마치고 나서 반년쯤 뒤에 결혼식이 열렸다. 규모는 작았지만 호화로웠다. 지연의 부모님은 그를 매우 아꼈다. 그의 부모님이 지연을 아끼는 것보다 훨씬 더. 그래도 그의 부모님들은 그들의 불만족을 티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지연도 아마 이 차이를 느꼈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지연 역시 티를 내지 않았다. 그래서 결혼식은 화기애애하고 즐겁게 진행될 수 있었다. 교수와 학생 사이의 로맨스라는, 어찌 보면 지탄의 여지가 있었던 결혼이었지만 사람들은 학계의 경사라면서 기꺼이 축하해주었다. 그는 곧 학과장이 되었다. 그는 행정적인 일에도 대단한 수완을 발휘해서, 정부와 기업으로부터 더 많은 지원금을 타내고, 그 돈을 우선순위에 따라 배분하고, 특히 몇몇 분야들에 선제적으로 투자하여 과의 경쟁력을 크게 올리는 데 성공했다. 티브이 출연은 이제 흔한 일이 되었고, 정치권 인사들이 접촉을 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아직은 정치에 발을 들여놓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연과의 관계 역시 아무 문제없이 지속되었다. 그들은 서로를 존중하고 아꼈다. 같이 책을 읽고, 같이 과학 분야의 최신 논쟁거리에 대해서 의견을 교환하고, 클래식 음반을 사 모으고 여행을 다녔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결혼하고 나서 2년 뒤에, 지연은 포닥 과정을 마치고 교수 임용 공고가 난 서울의 몇몇 대학에 지원했다.


그는 당연히 붙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지연은 거절의 편지를 연거푸 받아야 했다. 그가 알아보니, 지연보다 연구 실적은 부족하지만 백이 든든한 다른 사람들이 이미 교수 자리에 내정되어 있다고 했다. 지연이 임용 제의를 받은 곳은 지방의 어느 국립대였다. 거점 대학교이고 나라와 지방자치단체에서 투자를 많이 하고 있어서 앞으로 점점 더 좋아질 것임은 확실했다. 하지만 그래도 서울의 대학교들과의 편차는 컸다. 지연은 무척이나 상심했다. 이른바 롱-디 결혼생활은 그 역시도 상상해 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태만함을 반성했다. 자신이 쉽게 유수의 사립대학교에서 정교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자신의 연구 성과와 명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부모님과 자신의 학벌, 자신이 쌓아온 인간관계들 때문이기도 했다. 이 모든 것들은 그에게는 너무 당연한 것들이었고, 언제나 적당히 시들지 않게 관리해주어야 했지만 그런 행동들 역시 몸에 밴 지 오래였다. 하지만 지연은 자신과는 달랐다. 두뇌는 자신만큼 명석하고, 연구성과도 어쩌면 자신을 곧 추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연에게는 그게 다였다.


그는 지연 몰래 몇 통의 전화를 돌렸다. 며칠 뒤에 지연 기뻐하며 자신이 처음에 떨어졌던 서울의 어느 사립대에 조교수로 임용되었다는 것을 그에게 알렸다. 그는 미리 사서 숙성해놓은 양고기를 굽고, 피노 누와르 와인 한 병을 함께 나누어 마시며 기쁨을 나누었다. 침대에서 지연은 그의 팔을 베고 누워있었다. 그는 다른 손으로 지연의 곱슬한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들은 기분 좋게 취해있었다.


문득 지연이 그에게 물었다. “ 현수 씨, 버켓 리스트 적어본 적 있어요?”

그는 언젠가 학생 때 숙제로 적어본 적이 있다고, 그러나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답했다.

“ 그다음에는 써 본 적이 없구?” 그는 그렇다고 답했다.

“ 역시 현수 씨는 지금까지 인생이 너무 쉬웠던 거구나” 지연은 억울하다는 투로 말했다.

그는 왜 갑자기 버킷 리스트 이야기를 하냐고 지연에게 물어봤다.

“ 나 현수 씨를 알게 되면서 현수 씨가 언제나 가능한 것 중 제일 좋은 결과를 얻는 모습을 보니까 나도 현수 씨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나 봐. 그 학교에 떨어진 다음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거든. 심지어 다음으로 임용되고 싶은 학교가 어딘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지 않았어. 그런데 그 학교에서 떨어지고 나니까, 갑자기 정신이 확 들더라고. 그래서 지금 임용을 진행하는 대학들의 리스트를 만들고, 그래 봤자 분자 물리학과 교수를 지금 뽑는 대학은 전국에서 5개뿐이지만, 이런저런 기준들과, 임용에 성공했을 때의 장점과, 내가 임용에 성공할 확률을 계산해서 내가 어느 대학에 집중해야 하는지 순위를 매겨봤거든. 그런데 그러다 보니 문득 버킷 리스트가 생각이 나더라고. 나는 원래 매년 초에 버킷 리스트를 고쳐 썼었어. 10년도 더 되었을 거야. 바라는 것은 많았고, 나의 능력과 시간은 적었지. 그래서 리스트를 만드는 것은 올 한 해의, 또는 내 인생 전체의 방향을 세우는 것이었어. 이 리스트에는 말도 안 되게 황당한 것부터 상대적으로 노력하면 이루어질 가능성이 다분한 것까지, 다양한 것을 적었지. 아마 매번 20가지씩은 족히 되었을 거야. 좀 열심히 산 해에는 하나 정도를 이루고, 하지만 대부분의 해에는 하나도 이루지 못했지. 항목들 중 반 이상은 10년 내내 계속해서 등장했었고, 계속해서 이루어지지 못할 예정이었지. 물론 연초에 작년에 적어두었던 버킷리스트를 다시 꺼내봤을 때, 그중 어느 하나도 이룬 것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면 내가 버러지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럴 때는 정말 고양이 대신 슈뢰딩거의 상자에라도 들어가고 싶다니깐. 그런데 그게 또, 가능성이 크지 않더라도 꼭 이루고 싶은 것들이 있고, 그것들이 변하지 않고 리스트에 적혀있는 것을 보면, 묘하게 힘이 나기도 하는 거야. 우리가 양자계의 말도 안 되게 복잡하고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을 보면서 절망하지만 또 도전해서 밝혀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거랑 비슷한 것 같기도 해. 그런데 현수 씨랑 같이 살게 되고 나서는 더 이상 고쳐 쓰지 않았더라고. 현수 씨는 그런 거랑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잖아. 언제나 답을 알고, 다음에 해야 할 거를 알고, 어떤 것을 할 수 있고 어떤 것은 할 수 없는지를 잘 알지. 그리고 사실 모든 거를 다 잘해서 가끔은 대체 할 수 없는 게 하나 있기라도 한 건지 궁금해지기도 해. 그런 현수 씨랑 살다 보니 나도 좀 비슷해진 것 같더라고. 현수 씨는 내 영향은 하나도 받지 않은 것처럼 보여서 좀 짜증도 나고 그랬지. 그래서 기분전환도 할 겸 몇 년 만에 새로 버킷리스트를 업데이트해봤어. 아냐, 그런 궁금한 표정 하지 마. 나는 내가 이룬 항목들만 현수 씨에게 오픈할 거야.”


이룬 항목이라도 좋으니 말해달라고 그가 요청했다.

“… 왠지 부끄러우니까 그것도 말 안 하는 게 낫겠어” 하고 잠시 고민하던 지연은 답했다.

그리고 잠시 뒤 덧붙였다. “정 궁금하다면, 현수 씨도 버킷 리스트를 작성해서 와요. 그러면 서로 교환해서 읽어보는 거야.”


4

고등학교 이후 거의 30년 만에 그는 버킷 리스트를 작성하기 위해 방에 들어와 책상 앞에 앉았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에게는 리스트에 채워 넣을 만한 것이 생각나지 않았다. 30년 전처럼 그는 그럴듯하게 버킷 리스트를 꾸며서 채워 넣을 수도 있었다. 고등학교의 선생님보다야 지연이 더 똑똑하고 눈치도 빠르겠지만, 마음만 먹으면 그는 지연 역시 속일 자신이 있었다. 또 사실 그는 지연의 버킷 리스트에 적힌 내용들도 대부분 예상할 수 있었다. 의외의 것들이야 몇 개 있긴 하겠지만 굳이 알지 않아도 그만이었다. 따라서 그가 가진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그럴듯한 버킷 리스트를 만들어, 지연을 속이고, 지연의 버킷 리스트를 읽는다. 보통의 경우 그는 첫 번째 선택지를 택했을 것이었지만, 이번에는 조금의 죄책감을 느낄 것 같았다. 두 번째는 꾸며낸 것이 티가 나는 버킷 리스트를 만들어 지연이 그것을 눈치채게 한다. 지연은 조금 상처를 받겠지만, 버킷 리스트가 가짜임을 눈치챘다는 것을 티를 내지는 않을 것이다. 그 대신 다른 핑계를 대며 자신의 리스트를 보여주기를 거부할 것이다. 하지만 지연의 버킷 리스트의 내용을 그는 대부분 유추해 낼 수 있다. 하지만 펜을 쥔 손이 선뜻 움직이지 않았다.


오래도록 고민한 끝에, 그는 첫 번째 선택지도, 두 번째 선택지도 택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버킷 리스트에, 원하지만 이룰 수 있을지 확신이 없는 단 하나의 것을 적었다.

“지연의 버킷 리스트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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