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8.2
1
정기선의 2등석 구역은 어둡고 조용했다. 은하계 X의 행성 X103에서 X55로 향하는 한달에 한 번 있는 배였다. 창문 하나 없이 격벽으로 구획된 객실에는 모두 40여석 가량의 좌석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중 절반이 차 있었고, 대부분은 자고 있었다. 앞쪽에 설치된 작은 모니터에서는 도착하기까지 남은 시간이 표시되어 있었다. 6시간 35분. 이제 겨우 2/3 가까이 왔다. 정은 한숨을 내쉬었다. 잠을 자는 것도 이제는 질렸다. 들고 왔던 책은 세 권. 벌써 그 중 두 권을 다 읽어버렸다. 나머지 한 권은 행성 X103의 우주공항 대기실에서 주운 책인데, 표지에는 “우주시대에서 만족하며 사는 법“이라고 적혀있었다. 영 읽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는 제목이었다. 그는 따분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온갖 리듬으로 코를 골며 자는 사람들은 대부분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같았다. 기념품이며 선물이며 그 외 자질구레한 짐들이 많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그들 모두가 초록기가 도는 갈색 가죽으로 된 외투를 두르고 있었다. X55 행성의 특산물인 바다하마의 가죽이리라. 특이한 기후와 지질 때문에 X55 행성의 바다는 대부분이 따듯하고 얕다. 바다는 유기물질이 풍부했고, 작은 물고기가 넘쳐난다. 헤엄을 그리 잘 치지는 못하지만 거대한 몸집을 움직이기 위해 많은 물고기를 먹어야 하는 바다하마에게는 그야말로 천국이었으리라. 인간이 이 행성에 정착하기 전까지는. 바다하마의 가죽은 색도 예뻤지만, 무엇보다 촉감이 다른 동물의 가죽과는 달리 부드럽고, 표면에 미세한 털이 빽빽하게 나 있었다. 이 변방에 위치한 행성에서만 나는 가죽이 전 은하계를 주름잡는 패션 브랜드들의 디자이너의 눈에 드는 데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패션시장에 한번 소개되고 나자, 유행이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x55로는 사람과 자본이 몰려들었고, 전자기로 유도발사되는 작살총을 든 사냥꾼들과 가죽 가공공장의 일꾼들을 상대로 하는 서비스업등이 발달하면서 행성의 경제는 최대의 호황기를 맞았다.
그러나 앞 좌석의 주머니에 꽂혀 있는 관광 안내 책자에는 그 호황기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나와있지 않았다. 씁쓸한 마음으로 정은 온갖 칭찬만이 가득 적혀있는 그 책자를 다시 주머니에 꽂아넣었다. 행성의 경제는 그야말로 폭삭 망한지 한참이다. 유행은 오래가지 않았고, 바다하마의 가죽 가격은 폭락을 거듭했다. 밀물처럼 몰려왔던 사람들은 다시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바다하마의 개체수는 이제 원래의 1/10까지 줄어있었지만, 다행히도 이제는 아무도 바다하마 사냥을 나서지 않았다. 최근 정부는 천적이었던 바다하마의 개채수가 급감하자 무서울 속도로 불어나버린 멸치과의 물고기를 활용하여 제 2의 붐을 일으키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지만 모두가 그 성공 가능성을 회의적으로 바라봤다. 정은 X55에서 나고 자라지 않았다. 바다하마 가죽에게도, 이 작은 물고기에게도 관심이 없었다. 한달 전까지만 해도 X55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누구를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고 X55로 향하는 중이었다. 방금 언급한 내용은 그가 출장을 나서기 전에 조사를 하면서 알게 된 것이었다. 그는 범 우주 사립탐정이다.
2
인류가 한 행성에 모여 살 때는 모두가 실시간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었다고도 하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전 행성계에 뿔뿔히 흩어져 살고 있는 지금은 그렇지 않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간은 엄청난 속도로 행성간을, 은하간을 항해할 수 있는 배들을 건조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우주의 스케일은 너무 컸다. 일반적으로 가까이 떨어져 있는 두 은하 A에서 B까지 이동하려면 열흘은 꼬박 걸리는 것이 기본이었다. 문제는 우주선뿐만 아니라 통신이나 신호, 전보도 모두 열흘씩 걸린다는 것이었다. 인류는 드디어 전 우주를 자신의 거주지로 삼을 수 있게 되었지만, 그 대신 서로 고립되게 된 것이다.
이런 변화와 더불어 나타난 직업 가운데 하나가 범우주사립탐정이었다. 기존의 경찰 시스템으로는 전 우주를 다 관할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자면 모두가 직접 자신의 손으로 탐정놀이를 하고 정의를 행사하려 할 것이였다. 고민 끝에 그들은 지구시절부터 존재하던 사립탐정이란 직업을 계승 발전하기로 했다. 자격이 있다고 인정되는 사람들에게 수사권과 사법권의 일부를 나누어주는 것이다. 면허는 크게 4 종류로 나뉘었는데, 특정 행성 안에서만 활동이 인정되는 행성사립탐정, 일명 행탐, 특정 행성계에서만 인정되는 계탐, 같은 식으로 은하계사립탐정, 일명 은탐, 마지막으로 제한 없이 전 은하계에서의 활동이 인정되는 범우주사립탐정, 일명 범탐이 있었다.
과거 태양계의 우주 치안을 책임지는 기구에서 근무했던 경력을 인정받아 정은, 취득하기 매우 어렵고, 채 열명이 되지 않는 범탐 중 한 명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범탐이 되었다고 해도 언제나 일은 어려웠고 보수는 충분치 않았다. 물론 자신이 맏는 일들은 다른 자격의 탐정들과 비교해보면 보수가 높은 편이긴 했다. 그러나 이 행성, 저행성, 심지어 이 은하계 저 은하계를 넘나들며 일을 하는 범탐의 특성상 보수의 대부분은 티켓값으로 사라지기 마련이었다. 무엇보다 정은 몇년 전 일로 인해 지구의 어느 은행에 큰 빚을 지고 있었다. 수입이 나도 대부분은 이자를 갚는데 쓰인다. 무엇인가 대박이라도 한건 해결하지 않는 이상 통장잔고가 늘어날 일은 요원했다. 이번 일이 바로 그 대박 일이라면 좋았으련만. 하고 정은 생각해봤다. 사라진 사람을 찾는 일. 3000만 우주 크로나. X55 행성까지 오는데만 교통비로 1100만 크로나가 들었다. 돌아가는데 또 그만큼이 들 터였다. 그외에 드는 이런저런 비용까지 고려한다면 성공 보수로 3000만 크로나를 더 받아야 좀이라도 남길 수 있게 될 것이다.
정이 폼 속에서 수첩을 꺼내서 자신이 찾아야 하는 사람의 정보를 다시 읽어보려는데 갑자기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우주선이 크게 흔들렸다. 자고 있던 승객들이 모두 깰 정도로 큰 충격이었다. 자다 깨서 부은 눈을 비비며 사람들이 웅성웅성 하고 있자니 갑자기 사람들의 몸이 하나둘씩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바닥에 놓여있던 스티로폼, 종이박스며 가방이나 옷가지들도 떠오른다. 중력발생장치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정은 떠오르기 전에 안전벨트를 재빠르게 매서 좌석에 앉아있을 수 있었다. 원래 우주 비행시 착석할 때는 안전벨트를 매야 하는게 규칙이다. 보아하니 자신을 포함해서 그 누구도 지키지 않은 것 같지만. 갑작스럽게 무중력 상태에 놓이게 된 사람들이 허우적대는 사이에 객실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는 우주복을 입고, 손에는 이런 저런 총을 든 네 명의 사람들이 저벅 저벅 걸어 들어왔다. 정은 바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들은 해적인 것이다. 아마도 신발에 강력 전자력 발생기가 장착되어 있는 듯 무중력 상태의 선 내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바닥에 서 있었다. 그렇다면 중력발생기도 이들이 끈 것일 테다.
"안녕 여러분" 아마도 리더인 듯한, 제일 앞에 선 사람이 우주복의 헬멧을 벗어들고 인사했다. 해적 답지 않게 사근사근한 말투였다. 길게 빛나는 금색 머리카락이 어울리는, 선이 고운 남자였다.
“말을 잘 들으면 아무도 다치는 일이 없을거에요. 여기에 사복 경찰이 있다면 조용히 앞으로 나옵니다.” 그는 손에 든 권총을 까딱 했다.
정기선이 해적의 습격을 받는 것은 왕왕 있는 일이어서, 종종 사복 경찰들이 2인 1조로 잠복근무를 하곤 했다. 하지만 이런 외지고 사람도 별로 없는 작은 노선이 털릴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역시, 이런 후진 곳의 정기선에 사복경찰이 있을 리가 없자고 했잖아.” 허둥거리며 둥둥 공중을 떠다니는 사람들을 훑어본 뒤 그 옆에 선 사람이 말했다. 짧게 쳐올린 스포츠 머리에 덩치가 큰, 그러나 덩치에 비해 날렵해 보이는 인상의 사람이었다. 그는 샷건을 들고 있었다.
“조심해서 나쁠 것이 없지. 혹시 모르잖아” 하고 반대편 옆에 서 있던 사람이 말했다. 갈색 단발머리의 여자였다. “나는 쟤가 수상한데?” 그녀는 팔을 뻗어 들고 있던 기관단총으로 정을 가르켰다. “중력발생 장치를 껐는데도 태연히 혼자 좌석에 잘 앉아있잖아."
정은 물론 사복경찰이 아니었지만 괜히 뜨끔했다.
“아니, 나는…”
하지만 리더가 정을 힐끔 보고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정기선을 타면서 안전 벨트를 매다니, 그렇게 고지식한 경찰은 없어. 저 친구는 그냥… 음. 겁이 많은거야”
단발의 여자가 유심히 살펴보더니 비꼬듯이 말했다. “ 사내 자식이 꼬추는 어따 팔아 먹었어? 아, 첫 우주 비행이라서 쫄았니?”
정은 순간 속으로 울컥했지만, 참을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자신의 품 안에는 권총이 한 자루 있다. 범우주탐정의 특권이다. 사격 실력 또한 좋았다. 하지만 이렇게 좁은 곳에서 네 명을 상대로 총싸움을 할 수는 없다. 우선 둥둥 떠다니는 사람들이 맞을 수도 있었고, 무엇보다 여기는 우주선 안이었다. 잘못해서 외벽까지 구멍이라도 난다면 모두가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정은 죽더라도 땅을 밟고 죽고 싶었다.
리더는 단발 여자를 1등석 칸으로 보냈다. 1등석 칸에는 두 어명의 손님과 함께 승무원이 한 명 있을 터였으나 당연히 아무도 무장을 하지 않고 있을 터였다. 약간의 소란이 들리는 듯 했으나 이내 잠잠해졌다. 그녀의 임무는 아마 1등석 너머에 있는 조종석을 장악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리더는 스포츠 머리 남자와, 아직 헬멧을 벗지 않은 말이 없는 사람과 함께 셋이서 무중력에 익숙하지 못해 몸을 가누지 못하던 사람들을 하나씩 끌고 내려와 좌석에 앉히고 안전벨트를 채워서 고정시켰다. 한 두번 해본 일이 아닌 것 처럼 손에 익어 보였다.
“아니 젊은 양반, 이 배에 털 게 뭐가 있다고 이러시오” 하고 노년의 신사가 말했다. 정 역시 그 것이 궁금했다. 노신사는 막 금발의 리더에게 끌려 내려와 좌석에 앉혀진 상태였다. 무척 뚱뚱한 사람이었고, 하얀 셔츠는 단추와 단추 사이가 팽팽하게 당겨져서 금방이라도 뜯어질 것만 같았다. 좌석 벨트의 길이가 짧아서 리더는 낑낑거리면서 벨트와 씨름해야 했다.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신사의 터질듯한 배 위에 벨트를 채운 뒤에 그가 말했다. “하지만...이 뱃 속에는 털 게 좀 있어 보이는데요?” 정은 금발의 청년의 표정에서 이상한 미소를 읽었다. 금발의 청년은 곧 바로 오른쪽 다리춤에서 컴벳나이프를 꺼내서 망설임 없이 신사의 배를 찔렀다. 해적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그 광경에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정은 반사적으로 허리춤에 껴놓았던 권총을 꺼냈다. 노신사 역시 깜짝 놀랐다. 하지만 아픈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그의 배에서 피 대신 하얀 가루들이 흘러 공중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리더는 자신의 품을 뒤적이더니 아주 작은 테이스팅 스푼을 꺼냈다. 허공에 떠도는 가루를 스푼으로 조금 담더니 자신의 입에 넣었다. 그리고는 입맛을 두 어번 다시더니 만족했다는 투로 “빙고” 하고 말했다.
정은 그 가루가 마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 노신사의 뚱뚱한 배는 그러니까 위장이었던 것이다. 그는 X103행성에서 X55 행성으로 마약을 옮기던 운반책이었다. 겉보기에는 너무 감쪽같았서서 마약 수사 경험이 있었음에도 정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문득 정은 자신이 총을 꺼내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다행히 총을 들어 겨누지는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그의 총을 보지 못했다. 정은 해적들의 눈치를 살피며 총을 잡은 손을 천천히 외투속으로 감췄다.
리더는 노신사의 셔츠를 벗긱고 테이프로 감겨져 있었던 투명한 비닐 팩에 소분된 하얀 가루들을 하나하나씩 떼어냈다. 모두 합쳐 15kg은 충분히 넘을 것 같아 보이는 많은 양이었다. 순도가 좋을 경우 시장가로는 적어도 6000억 크로나는 될 것이다. 정이 노아를 찾고 돌아가게 됬을 경우 받을 수 있는 돈의 1000배는 되는 값어치였다. 정은 불공평한 세상에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노신사 역시 정 만큼은 아니었지만 화가 난 듯 했다. “ 이놈! 네가 지금 누구의 물건을 건드는 건지 알고는 있어?” 그의 목소리는 마치 막 해고 통고를 받은 테너같았다. 하지만 리더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그럼요. “ 하고 대답했다. “이거 태양계의 마약왕 꺼잖아요.” 태양계의 마약왕이라면 그게 누구인지 정은 잘 알 수 있었다. 목성의 위성 가니메데에 마약의 제국을 세운 수. 수와 그의 조직은 전 우주에 걸친 마약 생산망과 공급망을 개척한 것으로도 유명했지만 무엇보다도 만족을 모르는 세 확장과 폭력적인 테러행위들로 악명이 높았다. 그 조직은 거의 십년째 다른 상대 조직들과의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 어떤 조직의 우두머리도 수만큼 욕심이 많고 철저하며 잔인하지 않았다. 수가 가니메데의 경찰 수장을 연이어 세 번이나 살해했기 때문에 그 자리를 지원하려는 사람이 없어서 그 곳의 경찰은 우두머리 없이 마약과의 싸움을 외롭게 이어나가야 헀다. 그러고 보니 들리는 루머에는, 그의 고향은 가니메데가 아니라, 이곳 X 은하계의 어딘가라고 했었다.
“다 알면서 건드려? 수가 너희를 다 잡아 죽일거야!” 하고 노신사가 외쳤지만 리더는 여전히 태연했다. “고맙지만 걱정 마세요. 수는 저를 죽이지 않아요"
노신사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정 역시 이 상황의 모든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가니메데에서 활동하던 수가, 왜 갑자기 이 많은 양의 “돈”을 이런 구석에 있는 X55에 보내는 것일까? 갑자기 바다하마 가죽의 무역에 뛰어들기라도 한 것일까? 이제 예전의 1/10 밖에 남지 않은 불쌍한 바다하마는 이 돈이면 충분히 멸종되어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노신사의 말 대로, 수의 물건을 건드리는 베짱좋은 이 해적은 대체 어떤 사람들인가.
정은 이리저리 생각을 해봤지만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다시 생각해 보아도 1:4는 무리이다. 여기 승객들 중에 같이 싸워줄 만한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이들은 무기도 없을 터였다. 따라서 가장 좋은 것은 이 해적들이 조용히 이 마약을 챙겨서 다시 떠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에게서는 궁금함이 차올랐다. 노신사가 말한 대로, 이 만큼의 양의 약을 뺏어갔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수는 분명히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임이 분명했다. 한낱 해적이 떠안기엔 너무 큰 리스크다. 우주는 넓고 넓어 오랫동안 숨어지낼 수는 있겠지만, 결국 수가 이들을 찾아낼 것임이 분명해 보였다. 물론 6000억 크로나는 어마어마한 돈이라서, 그 위험을 감수할 만한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이 해적의 리더라는 남자, 그리고 이 상황, 무엇인가 이상했다. 정은 무엇인가 맞지 않는 구석을 본능적으로 정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종류의 직감 덕에 정은 여러 번의 의뢰를 해결했고, 또한 여러 번 자신의 목숨을 구했다. 그의 직감이 지금 또 자신에게 뭔가를 전달하고자 하고 있었다.
정이 지금의 이 불편한 감각에 대해서 고민해보고 있는 사이 갑자기 또 한번 큰 충격이 우주선을 뒤흔들었다. 처음보다 더 큰 충격이었다. 자기장 신발을 신고 무중력 상태에서 바닥에 서 있었던 해적들의 몸이 크게 이리저리 휘청였다. 지상이었으면 넘어져서 구를만한 만큼의 충격이었고, 그렇다면 충격이 조금이라도 상쇄될 수 있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발이 바닥에 고정되어 있었던 터라 몸이 휘청거리며 충격을 모두 받아내는 수 밖에 없었다. 걸을 때 처럼 수동으로 한 발씩 전자기장을 해제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충격이 잦아들고, 해적들은 모두 저마다 욕지거리가 섞인 신음을 내며 주저앉았다.
정을 비롯한 승객들은 안전벨트 덕분에 충격에서 무사했다. 앞으로 항상 우주선에 탑승할 때 안전벨트를 매는 것이 좋겠다고 정은 생각하면서 정은 자신의 눈 앞에 떠서 천천히 멀어지는 권총을 바라봤다. 지구시대에서부터 계속 권총을 만들고 있는 베레타 사의 그립이 좋고 반동이 약한 권총. 자신의 것과 같은 모델이다. 이게 왜 여기에 떠 있지? 순간 정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자신의 오른손에, 쥐고 있던 권총이 없었다. 멀어지고 있는 권총은 바로 정의 것이였다. 그리고 그 권총은 지금 정확히 해적의 리더의 방향으로 천천히 날아가고 있었다. 충격으로 놓친 모양이었다. 그는 앉은 채로 손을 뻗어봤으나 손잡이의 끝만 겨우 건드릴 수 있었고, 그 동작은 권총의 속도를 조금 더 증가시켰다.
권총은 어느 틈에 주저 앉아서 신음소리를 내던 해적 리더의 등에 톡 하고 닿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자신에게 다가온 권총을 바라보고는, 그 권총이 날아온 방향으로 시선을 향했다. 물론 그 방향엔 정이 앉아있었다. 어색하게 팔을 뻗은 채로, 당황한 표정으로. 눈이 마주치자 정은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너 뭐야?” 찡그리며 리더가 정의 권총을 바로 잡았다. 바로 그 순간 갑자기 복도로 향하는 문이 열린다. 리더와 정이 동시에 그 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검은 작전복을 입고 마스크를 쓴, 특수작전용 소형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사람 두 명이 들어온다. 리더는 놀라운 속도로 정의 권총에 달린 안전장치를 풀고 그들을 겨냥해서 두 발을 발사했다. 깔끔한 실력이었다. 갑작스런 두 침입자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깜짝 놀란 승객들이 몸을 숙이며 비명을 질렀다. 정은 그 정신 없는 상황 속에서도 제발 우주선 외벽만은 멀쩡하길 바랬다. 주저앉은 해적들이 당황하며 저마다 자신의 무기를 추스리기도 전에, 바로 일등석 쪽의 문이 열리면서 단발머리의 여자 해적이 나타난다. 여자 해적은 혼자가 아니었다. 검은 작전복을 입고 마스크를 쓴 다른 사람 한 명이 그녀의 뒤에 서서 그녀의 머리에 총을 겨눈 채로 함께 천천히 문 안쪽으로 들어온다.
“뭐야 너희!?” 하고 당황한 스포츠 머리의 남자가 외쳤다.
“총 버려” 단발 여자를 인질로 잡은 검은 작전복의 사람이 나직하지만 묵직하게 말했다.
“안 그러면 이 여자는 죽는다.”
복도쪽 문에서도 새로 두 명의 작전복 사람들이 총을 겨누고 들어왔다. 인질로 잡힌 단발 여자를 제외하면 서로가 동수였다. 정은 제발 작전복을 입은 사람들이라도 선내작전용 저속 탄환을 장착했기를 바랐다.
리더는 정의 권총을 단발의 여자를 인질로 잡은 사람을 향해 겨눈 상태로 바로 서서 잠깐 생각하더니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카심 쪽인가? 어떻게 알았지?”
“그건 알 것 없고, 다시 말한다. 총 버려"
작전복을 입은 사람이 다시 말했다. 카심에 대해서도 정은 읽어본 적이 있다. 이 X은하에서 마약을 공급하는 지역 조직이라고 했다. 아마도 수가 이끄는 마약 왕국의 하부조직이리라. 잘은 모르지만 이 사람들은 수의 마약 운반을 지키기 위해 투입된 것 같았다.
리더는 한숨을 쉬더니 시선을 돌리지 않고 정에게 말했다. “이봐, 거기 좌석 앞에 앉아있는, 아까 나를 도와준 친구. 아버님이 나를 도우라고 붙여주신 건가?”
갑작스러운 질문에 정은 당황했다. 아무래도 리더는 자신이 급작스러운 습격에 대비하라고 권총을 던져준 것이라고 이해한 듯 했다. 그런데 아버님은 또 누구야? 그 말을 들은 검은 작전복의 사람들의 시선이 한 순간 모두 좌석쪽으로 향했다. 정의 자세는 여전히 팔을 해적들 쪽으로 뻗은 채로, 엉거주춤한 상태 그대로였다.
“네 놈! 한 패냐?” 단발머리를 인질로 잡은 작전복의 사람이 외치며 총구를 정을 향해 돌리는 순간 리더가 권총을 발사해 정확히 그 사람의 머리를 맞췄다. 다른 두 명의 해적들도, 작전복을 입은 다른 사람들도 서로의 총을 서로에게 발사했지만, 해적들이 조금 더 빨랐다. 검은 작전복을 입은 사람들은 모두 쓰러졌고, 해적들은 그 누구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와, 깜짝이야. 죽는 줄 알았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단발 머리 여자의 표정은 방금 자신의 얼굴 바로 옆으로 총알이 날아갔던 사람 치고는 너무 변화가 없었다. 리더는 총을 든 손으로 이마에 난 땀을 닦더니 정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정도 얼떨결에 손을 내밀어 악수를 했다. “아버지도 참. 이번에는 정말 아무도 안 붙이겠다고 하셨더니, 이렇게 티 안나는 친구는 어디서 구해서 붙이신 거야? 어디 출신이에요?”
“달이요.” 정은 일단 대답할 수 있는 것을 물어봐준 것에 감사하며 대답했다.
“가니메데를 위해서 일하는 달나라 사람이라.” 리더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가니메데와 달은 원래 사이가 안 좋기로 유명하다. 지구와 목성은 원래부터 태양계의 경제, 정치, 문화 중심지로서의 자리를 놓고 신경전이 치열했는데, 그 신경전은 각각 지구의 위성과 목성의 위성인 달과 가니메데 사이에서 더욱 더 날카로워졌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 해적들은 멀리 가니메데에서 여기까지 왔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정은 수에 반대하는 조직이 가니메데에 있다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수는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조직들에게는 가차없었고, 가니메데는 수의 조직의 본거지이다. 순간, 정은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의 눈 앞에 있는 이 금발의 청년은 수의 아들인 것이다. 수는 어떤 이유때문인지 자신의 마약을 이렇게 멀리까지 운반할 필요가 있었고, 공식적으로는 그 마약을 이 X 은하계의 어딘가에서 강탈당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비공식적으로 수는 그 마약이 아까웠고, 따라서 강탈 사건을 꾸며낸 다음 그 마약을 다시 자신의 소유로 하고자 했다. 이 임무에 지원한 사람이 다름아닌, 이 청년,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 수의 아들. 그러면 정은 이 청년의 생각 속에서는 자신의 아들이 못내 못미더웠던 수가 몰래 붙여준 도우미인 셈이었다.
짧은 대화를 통해서 상황을 파악하게 된 것은 정 뿐만이 아니었다. 아무런 언질도 받지 못하고 X55까지 마약을 운반하는 임무만 맡았던 노신사 역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수의 아들의 얼굴을 모르는 것으로 봐선, 말단의 조직원일 것이었다. “ 도련님을 몰라뵈었습니다!” 하고 그는 벨트를 풀고 좌석에서 나와 넙죽 엎드렸다. 선내는 아직 무중력 상태였기 때문에 엎드린 상태로 노 신사는 공중으로 떠올랐다.
“이 녀석들, 카심의 애들이 맞네.” 하고 스포츠 머리가 말했다. 그는 죽은 검은 작전복 사람의 몸을 뒤져서 무엇인가 표식을 찾아낸 모양이었다. “ 우리가 이 배를 습격할 거라는 것을 어떻게 안 거지?”
“아니, 그것보다” 하고 리더가 말을 받았다. “애초에 이번 운반건 자체도 카심 녀석들 모르게 진행한 거잖아.” 그는 절을 한 상태로 공중에 떠 있는 노신사에게 몸을 돌렸다.
“그쵸, 할아버지? 일단 아무에게도 말 하지 말고 X55에 도착한 다음에 연락을 기다리라고 들었을 텐데요.” 노신사가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 네, 네, 맞습니다, 도련님. 아무에게도 말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정은 노신사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금발의 청년 또한 마찬가지였다. 천천히 그의 표정이 구겨졌다. 자신의 팀원이 인질로 잡히고, 총알이 오가는 다급한 순간에도 반듯하게 다듬어진 듯한 미소와 여유를 잃지 않던 그였다.
“할아범, 앞으로 당신은 죽을 때까지 당신의 선택을 후회하게 될거야.” 작고 낮은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카심과 그 부하들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되겠지.” 하지만 그는 곧 바로 표정을 바르게 폈다. 크게 심호흡을 한번 하고 나서 그는 다시 예전까지의 말투로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우리는 물건과 할아범을 챙겨서 이만 간다. “
다행히도 그들의 볼 일은 모두 끝난 모양이었다. 정은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모를 오해가 있는 것 같지만, 이대로 이 친구들이 이 우주선에서 가주기만 한다면 더한 오해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금발의 청년이 다가와 정에게 다시 말을 건냈다.
“ 같이 가지, 친구” 그리곤 살짝 몸을 기울여 정의 귀에 속삭였다. “ 이 배는 폭파될거야. 보는 눈이 너무 많았잖아?”
정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의 말이 맞았다. 승객들은 모든 것들을 다 봐 버렸다. 한 명이라도 살아 나간다면 수가 꾸몄던 모든 것들이 탄로나게 된다. 이 배에 탄 20명이 넘는 승객들은 우주에서 재로 사라질 것이었다. 정은 이제 경찰이 아니었고, 따라서 자신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다면 이들이 뭐를 하든 별로 개입할 생각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이 승객들 모두를 죽게 놔둘 수는 없었다. 자신이 없었지만 허풍이라도 쳐야 할 순간이었다.
“그 건 내가 처리하도록 하지. 당신의 아버님이 따로 나에게 맡긴 일이 있어서 난 조금 더 여기에 머물 생각이야.” 정은 최대한 덤덤한 투로 말했다. 스스로 거짓말에는 썩 재능이 있다고 생각해왔던 그였지만 상황이 상황인 지라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래?” 금발 청년의 눈썹 한 쪽이 올라갔다. 잠시 생각하던 금발의 청년이 흔쾌한 투로 대답했다.
“그럼 그러라구. 이미 다 설치되어 있으니까, 이 거를 받도록 해”
정은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연기하며 그에게서 기폭장치를 받았다.
부하들은 능숙하게 검은 작전복을 입은 시체들을 한 곳에 모으고, 가져온 큰 더플백에 마약 봉지들을 담았다. 끝까지 헬멧을 벗지 않은 한 사람이 노신사를 붙잡고 있었다. 노신사는 넋이 나가 보였다. 복도로 향하는 문이 열리고, 그들은 복도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바로 금발의 청년이 다시 들어와서 무슨 이유에선지 손을 까닥여서 정을 불렀다.
정은 안전벨트를 풀고 무중력의 선실을 유영해서 그를 향해 다가갔다. 부하들은 이미 먼저 복도의 저 편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금발의 청년이 불쑥 정에게 무언가를 건냈다. 족히 2Kg은 되어 보이는 하얀 약이 담겨있는 팩이었다. “ 아버지한테는, 내가 빈틈을 보였다는 말은 하지 말아줘. 알잖아. 아버지는 만족을 모르는 사람이고, 내 위 아래로 형 누나 동생들이 여섯이야. 나는 내 가치를 스스로 증명해야 해. 실수는 용납될 수 없어.” 정은 잠시 고민했으나, 이 팩을 받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다. 정은 그러겠다고 답했다. 청년은 정의 어깨를 한번 툭 치고는 몸을 돌려 복도의 저 편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다가 잠시 발걸음을 멈추더니, 손바닥만한 크기로 난 작은 창을 발견하고는 들여다보았다. 꽤 오랫동안, 그는 말이 없었다.
“이름이 뭐야?”
“… 정”
너무 긴장한 상태에서 받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정은 반사적으로 자신의 본명을 말해버렸다.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이봐, 정. 달 출신이라고 했지”
“응”
“고향 행성이 있다는 것은 어떤 기분이지? 나는 우주에서 태어났어. 그러니까 고향은 우주인 셈이지. 하지만 우주는 정을 붙일만한 곳이 아니잖아? 그러니까 나는 고향이 없는 셈이야”
“…”
금발의 청년은 얼굴을 계속 작은 창에 들이민 채로 말을 이었다.
“ 저 작고 볼품없는 게 아버지의 고향이라니. 가니메데도 별 볼일 없지만 X55는 더하네. 그래서 내 아버지가 만족을 모르시나봐. 저 곳에서 자라면서 어렸을 때부터 한 번도 만족이라는 것을 느껴 본 적이 없었던 거지.” 그는 고개를 돌려 정을 바라봤다.
“그런데도 이젠 나이가 들었는지, 좀 감정적으로 바뀌셨더라고. 평생 거들떠도 안보던 고향 행성에 이제와서 투자를 하겠다고 이런 번거로운 일을 벌이시다니 말이야.”
그러니까 이 어마어마한 값어치의 마약은 수가 자신의 고향에 보내는 뒤늦은 선물인 셈이었다. 전 우주에 걸친 전자 결제 시스템이 구축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그는 어떤 식으로든 돈을 현물로 보내야 했고, 또 그 돈이 마약왕의 것이라는 것이 들통나면 안되었기 때문에 이런 일을 꾸며서 자금을 세탁한 것이다. 굳이 마약으로 운반한 것 또한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이만큼의 값어치를 현금으로 보내고자 했다면 이 배는 지폐더미로 말 그대로 가득 찼을 것이었다. 그에 비해 마약은 부피가 작고, 숨기기도 용이하며, 우주 어디서든 나름대로 쉽게 현금으로 바꿀 수 있다. 뜬금없이 카심의 일당들이 마약을 노리고 반기를 드는 바람에 일이 조금 꼬일 뻔 했지만, 어쨌든 수의 계획은 성공한 것이다. 아니, 어쩌면 애초에 마약을 강탈한 것이 카심이라고 주장할 계획이었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거” 금발 청년은 생각났다는 듯 품에서 권총을 꺼내서 정에게 던졌다. 베레타 권총이 천천히 무중력 공간을 지나 정에게 다가왔다. 정은 권총을 잡았다.
“타이밍이 조금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어쨌든 도와줘서 고마웠어”
정은 작게 고개만 끄덕였다.
“그럼 우리는 나중에 가니메데에서 보기로 해” 금발의 청년은 인사를 하고는 헬멧을 쓴 다음 복도 저 편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언제 챙겼는지 모르겠는 바다하마 가죽 몇 개를 기념품처럼 돌돌 말아 들고 있었다.
그의 뒷 모습을 바라보며 정은 온몸의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어쨌든 잘 넘겼다. 저들이 우주선을 타고 멀리 가버리면 그 다음에 긴급주파수로 X55 행성에 구조요청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총격전이 있었지만 다행히 정기선의 외벽은 멀쩡한 듯 아무 이상도 없었고, 카심의 조직원들 외에는 아무도 죽거나 다치지 않았다. 정은 아까 금발의 청년이 들여다보았던 작은 창 쪽으로 다가가서 고개를 들이밀었다. 정말 창백한 푸름으로 빛나는, 볼품없는 별이 엄지손톱만한 크기로 보였다. 우여곡절이 조금 있었지만 X55에 다 온 것이다. 수가 이 행성 출신이었다니. 어디서 말하고 다니진 말아야 겠다고 정은 생각했다. 우주선 한 대가 정기선을 주위를 한 바퀴 돈 뒤에 빠른 속도로 멀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3
행성 X55의 경찰이 신고를 받고 우주선에 도착하기까지는 또 서 너시간이 걸렸다. 패닉에 빠져있던 승객들은 정이 아무리 자신이 해적들과 같은 패거리가 아니라는 것을 설명해도 믿지 않았다. 그들이 단체로 경찰들에게 자신이 본 것들을 말하는 바람에, 정은 수갑을 찬 상태로 경찰 우주선에 태워진 후 X55로 이송되어 조사를 받아야 했다.
다행히 경찰서에서는 그가 가지고 있었던 범우주 탐정 자격증이 혐의를 벗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두어 시간만에 풀려날 수 있었다. 경찰서 앞의 벤치에 앉아서 정은, 품 안을 뒤져서 전자담배를 꺼냈다. 정은 정기선을 탄 다음부터 지금까지 거의 24시간 이상을 피지 못했다. 말아피는 담배에서 갈아탄지도 벌써 몇 년이 지났다. 처음에는 밍밍했지만 이제는 적응이 된 지 오래다. 그는 버튼을 눌러 전자담배를 작동시킨 다음, 예열이 되기까지 기다렸다. 행성 X55에서는 어디에서나 바다의 냄새가 났다. 앉은 자리에서도 넓은 바다가 보였다. 바닷 속에서 꾸물거리며 움직이는 서너마리의 바다하마도 보였다. 그들은 느렸고, 모자란 것도 없고, 더 바랄 것도 없어 보였다. 그는 탐정 일은 내일부터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조금 쉬며 여유를 즐길 작정이었다. 방금 전에 그는 일생 일대의 위기를 겪고, 일생 일대의 거짓말과 연기를 끝낸 참이었다.
그는 가방에서 “우주 시대에서 만족하며 사는 법”을 꺼내서 서문을 펼쳤다.
“수천만년의 생물학적 진화의 기간과 수천년의 사회적 진화의 기간을 거치며 우리 사람은 지구에서 좁고 밀도가 높은 사회를 이루며 살도록 조형되었다. 그러나 대우주시대의 도래와 함께 사람들은 급격한 변화에 직면하게 되었다. 통계에 따르면 전체 인구 중 각종 심리적인 질안이나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지구시대의 평균보다 무려 5배나 높은 수치를 기록하게 되었다. 더 많은 가능성이 펼쳐진 우주 시대에서 사람들이 더 많이 괴로워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저자인 나 박사 클라우디아는 이를, “만족”이라는 개념을 들어 설명하고자 한다.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 하자면…”
역시 쓰잘데기 하나 없는 책이었다. 정은 책을 덮고 전자담배를 들어 한 모금을 들이마셨다. 하지만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이놈의 전자담배는 또 고장이 난 모양이었다. AS를 위해서는 목성까지 직접 가야 했다. 더 많은 가능성이 펼쳐진 대우주시대 좋아하시네. 이전에 비해 가능성이 많다는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가능성은 양방향이었다. 더 좋아질 수도 있고, 더 나빠질 수도 있다. 사람들은 서로 고립되어 살아가고, 편지 한 통을 받는데 한 달은 족히 걸리는 세상이다. 유일하게 가능성을 긍정적인 성취로 바꾼 예는 어쩌면 수와 그의 조직일 지도 몰랐다. 거의 예외 없이 전 우주에서, 사람들은 수의 조직이 공급하는 마약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수는, 아들의 말에 의하면 아직 만족하지 않는다고 했다. 물론 당연하다. 우주는 너무 넓고, 사람들이 아직 손을 뻗지 않은 곳은 무한했다. 정확한 통계가 없어서 다들 추정만 할 따름이지만, 전 우주의 인구는 이미 2000억을 넘어섰다고들 말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주를 채우지 못한다. 세계도 넓어지고, 우리의 인식은 그 넓어진 세계를 따라가지 못한다. 정은 살아본 적도 없는 지구시대가 문득 그리워졌다.
감상적인 생각은 그만 하기로 한다. 정에게는 찾아야 할 사람이 있고, 갚아야 할 빚이 있었다. 인류의 만족에 대해 논하기 전에 그는 자신의 만족을 향해 달려야 했다. 경찰이 도착하기 전에 구명 캡슐에 실어서 먼저 이 행성으로 착륙시킨 2kg의 마약부터 처리해야 할 것이었다. 여기서 멀지 않은, 그러나 사람이 없는 곳에 착륙하도록 셋팅해놓았다. 물론 기록은 지웠다. 경찰이 정기선을 샅샅이 조사해도 구명정 하나가 없다는 것 외에는 다른 정보를 얻지 못할 것이었다. 환전만 한다면 모두 십만 크로나는 넉넉히 받을 양이었다. 해가 지고 있었고,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서늘했다. 정은 난리통에 정기선에서 챙긴 바다하마 가죽으로 된 외투를 챙겨 입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