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부르크에서의 이번 겨울은 기대했던 것만큼 축축하고 어둡지 않았다. 일주일에 서 너번 가량은 구름을 뚫고 해가 얼굴을 내밀었다. 비가 아닌 눈이 내리는 날도 자주 있었다. 붉은 벽돌 건물과 앙상한 나무, 얼어붙은 운하가 전부 하얀 눈에 뒤덮이는 멋진 광경도 보았다. 아니 잠깐만, 독일에서 날씨가 제일 안 좋은 도시가 함부르크라고 하지 않았었나? 이미 베를린에서 세 번의 어둡고 축축한 겨울을 겪은 우리는 이보다 더 날씨가 안 좋을 수가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품은 채로 비타민 D며 레몬차 등을 잔뜩 모아놓은 뒤였다.
물론 비가 내리는 날도 흔했다. 길가에 보이는 모든 나무가 초록색 이끼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면 확실히 비가 많이 오는 곳임이 분명했다. 거센 바람과 함께 비가 내리는 밤이면 빗방울이 창문 유리를 두드리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바람이 건물의 어딘가를 자꾸 흔드는지 삐걱거리기도 했다. 자고 일어나면 바람에 건물이 통째로 서울로 날아가 있어서, 이 곳에 사는 다른 사람들이 당황해하고 있을 때 우리는 태연히 걸어 나가서 순댓국도 먹고 콩나물 국밥도 먹고 광어회도 먹고 들어오자고, 우리는 실없는 농담을 하다 잠이 들곤 했다.
함부르크는 북해에 가까이 붙어있기 때문에 바다의 영향을 많이 받는 해양성 기후를 띤다. 사계절의 온도차가 낮고, 날씨는 변덕이 심하며 일 년 내내 비가 많이 온다. 실제로 함부르크는 독일의 도시들 중 연간 강수량을 기준으로 봤을 때 네 번째 순위에 올라 있다. 재밌는 점은, 연간 강수량으로 비교하면 함부르크가 한국의 그 모든 지역보다도 비가 적게 내리는 곳이라는 것이다. 장마철에 잠깐 많은 양의 비가 쏟아져 내리고 그 외에는 맑은 날이 지속되는 한국과는 달리, 함부르크의 비는 적은 양이 짧은 시간 동안, 그러나 하루에도 여러 번씩 잘게 나뉘어서 자주 온다. 연간 강수량으로는 뒤쳐지지만 비 오는 날의 숫자를 세어 따지자면 단연코 앞선다. 흐린 날씨의 대명사로 통하는 런던보다도 더 비 오는 날이 많다.
베를린에서 함부르크로 옮겨오고 난 첫겨울에, 나는 시내의 칼슈타트 스포츠에서 검은색의 고무로 된 레인부츠를 샀다. 중국에서 새로운 종류의 바이러스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막 화제에 올랐을 때였다. 일주일에 삼일은 학교를 다녀와야 했고, 주말에는 아직 민선이 있는 베를린으로 플릭스 버스나 ICE를 타고 다녀오곤 했다. 나는 카페에서 작업을 하고, 맥도날드에서 빅맥 세트를 자주 먹었다. 밖에서 비를 맞고 들어오면 언제나 양말이 젖어 있었다.
학교는 모두 온라인 수업으로 대체되고, 식당도 카페도 쇼핑몰도 모두 문을 닫은 지금은 밖에 나갈 일이 장 볼 때밖에 없다. 장을 보기로 했던 날에 비가 오면 우리는 냉장고와 주방의 찬장 안에 남아있는 식료품들의 양을 체크하고 장보기를 다음날로 미룬다. 레인부츠를 신을 날은 통 오지 않는다. 신발에 쌓인 먼지를 볼 때마다 나는, 신발 관리용 스프레이를 부츠와 함께 산 것을 후회했다. „여긴 비가 많이 오잖아요. 고무가 다른 재질에 비해서 내구성이 좋긴 하지만, 신발이 젖은 다음에는 마른 수건으로 닦아주고 이 스프레이를 뿌려주시면 더 오래 신으실 수 있어요.“ 하고 칼슈타트 스포츠의 직원이 나에게 말했었다. 이 신발을 나는 지금까지 겨우 세 번 신어봤다. 스프레이는 한 번도 뿌려보지 않았다. 이 스프레이를 쓸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는 그 직원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이 일하던 백화점이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줄어든 매출을 견디지 못하고 폐업할 것이라는 것 역시도.
이 도시의 사람들은 베를린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비가 오든 말든 신경을 쓰지 않는다. 조깅을 하고, 자전거를 타고 마트를 가거나 출퇴근을 한다. 태연히 카약을 탄다. 다들 방수가 되는 재질의 재킷을 챙겨 입고 말이다. 빗방울이 꽤 굵어지면 사람들은 재킷의 모자를 뒤집어쓴다. 더 세게 내리면 노란 레인 코트를 입는다. 장화를 신고, 상하의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방수 재질 우주복을 입은 아이들은 신나서 바닥에 고인 물 웅덩이를 밟고 다닌다. 비가 올 때 우산을 쓰고 다니는 사람들을 나는 겨우 서 너번 보았다. 비를 맞으면 대머리가 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던 나에게는 아직도 낯선 광경이다.
한국에서 지낼 때를 생각하면, 비 오는 것은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장마철에 한국에서 내리는 비는 정말이지 너무 강렬했다. 아무리 큰 우산을 쓰더라도 가방이며 신발은 쉬이 젖어들었다. 퇴근하는 사람들이 빽빽이 들어찬 마을버스에서는 불쾌한 습기가 꽉 차 있었다. 내가 든 우산은 누구의 바지를 적시고, 누군가의 우산은 내 바지를 적셨다. 비가 내린 다음날의 맑은 하늘은 좋았지만 다음날이면 다시 잿빛이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곳에서 나는 비 내리는 것을 보는 것을 즐긴다. 라디에이터를 틀어놓고 뽀송한 채로 집안에 머물면서, 넓은 창 밖을 통해 부슬비로 젖어드는 함부르크의 바깥 풍경을 보고 있자면 마음이 평온해진다. 부엌의 찬장과 냉장고는 빵빵하게 채워져 있다. 코로나로 인해 계속되는 집콕 생활에 지루해진 민선이 새로운 취미를 발견하게 된 덕에 꿀 케이크, 바스크 치즈케이크, 레몬 케이크나 스콘, 머핀 중 하나가 언제나 준비되어 있다. 15분을 걸어가서 사온 원두로 내린 커피와 함께 꿀 케이크를 먹었다. 흔들리는 버드나무 꼭대기에는 비둘기 한마리가 득도한 선인이라도 되는 것 마냥 평온하게 앉아있다. 비를 맞으면서.
한국에 가면 함부르크의 차가운 비도 해가 뜨지 않는 겨울도 그리워질 것이다. 지하철 역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우산을 접은 뒤 단추를 채워 끈으로 묶느라 젖은 손을 바지춤에 쓱쓱 닦다가도 독일에 있었을 때에는 우산 쓸 일이 없었는데, 이런 생각을 할 것 같다. 느린 인터넷과 맛없는 독일식 과일 케이크도 혹시 그리워질지도 모른다. 한국에서의 바쁘고 빡빡했던 삶이, 피곤했지만 가끔 커다란 성취감을 찾을 수 있었던 때들이 놀랍게도 지금 이 순간에 가끔 그리운 것처럼. 코로나 때문에 집에서 창 밖만 바라보는 정적인 생활을 한 덕분에 나는 함부르크의 비 내리는 풍경을 이젠 언제든 마음속으로 재생할 수 있게 되었다. 비 오는 서울 어딘가의 전집에서 막걸리와 파전을 먹으면서도 우리는 붉은 벽돌 건물과 이파리 없이 가지만으로도 무성한 나무 위로 내리는 비를, 밤이면 침실 유리창을 후드득 두드리는 비를 꽤 높은 해상도로 그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코로나가 준 선물이라고 아주 긍정적으로 생각해보기로 하자. 떡국 만들어야 하니 오늘은 이만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