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잼 탈출을 위한 마법의 한 단어 ‘용기’

by 갸비

인생 노잼은 서른 중반의 문제만은 아니다. 개인차가 있기에 누군가는 십 대에도 인생 노잼이 올 수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마흔, 쉰, 예순, 일흔에도 제각기 다른 형태로 불현듯 인생 노잼 시기를 맞이할 수 있다.


노잼은 무기력의 다른 말이다. 우리 삶과 정신을 갉아먹는 무기력에 대한 연구는 정신분석학자이자 사회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이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에서 일찍이 다뤘다. 이번 해결책은 저명한 심리학자 프롬의 설명을 빌려 노잼(무기력)을 타파할 방법에 대해 모색해보겠다.


프롬은 우리가 ‘진짜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에 노잼 인생을 산다고 한다. 그가 말하는 진짜 삶은 ‘자발적’이며 ‘창조적’이고 ‘질문’하고 ‘생산’하는 삶이다. 그러나 현대인은 타인, 즉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을 수행하느라 ‘대답’하고 ‘소비’하는 삶을 산다. 진짜 삶을 살지 못하는 현대인은 ‘장애와 고통’을 겪는다. 프롬의 글을 엮어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를 펴낸 라이너 풍크는 서문에서 진짜 삶을 살지 못한 결과가 ‘지루하고 무미건조하며 우울하고 공허하고 아무 의욕도 없는 삶’이라고 설명한다. 노잼이 무기력의 다른 말이라고 설명한 이유다.


프롬이 뛰어난 심리학자인 이유는 원인 진단 못지않게 명확한 해결책도 내놨기 때문이다. 노잼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네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라이너 풍크는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진정으로 보기 시작하고, 다시 감탄할 수 있으며, 자기 자신을 경험하고, 갈등의 능력을 갖추는 것이 해법이다. 어디서부터 시작하건 중요한 것은 자력을 통해 자신과 현실을 인식하고 그에 응답하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어렴풋이는 알겠는데 정확히는 모르겠다고? 나 역시 그랬다. 이제부터 프롬이 말하는 노잼 타파 법을 쉽게 설명해보겠다.


노잼을 벗어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감탄의 능력’이다. 쉽게 말하면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자는 말이다. 어른이 되면 우리는 감탄의 능력을 잃는다. ‘이미 다 해본 일’이라며 매사 시큰둥하기 일쑤다. 이것도 모자라 감탄하는 이를 보고 ‘그것도 몰랐어?’라며 핀잔하기까지 한다.


문제는 감탄의 능력을 잃으면 더 이상 창조적 결과를 낼 수 없다는 점이다. 프롬에 따르면 감탄의 능력은 창조적 결과와 맞닿아있다. 여기서 창조란 단어는 전에 없던 새로움이 아닌 ‘나라는 존재에 뿌리를 둔’ 것이란 의미다. 즉, 내 생각과 감정에서 캐낸 무언가를 생산해내는 행위가 바로 창조다.


다음은 프롬이 감탄의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설명하기 위해 든 예시다.


프랑스 수학자 쥘 앙리 푸앵카레는 이렇게 말했다. “과학의 천재성은 놀라는 능력이다.” 수많은 과학의 발견이 바로 이런 식으로 이루어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목격하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으며 감탄하며 걸음을 멈추지도 않았던 현상을 놀라는 능력이 있는 학자가 관찰한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 그에게는 문제가 되기에 그의 생각이 작업을 시작하게 되고, 그것이 발견의 시작이다. 그를 창조적 학자로 만든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아니다. 해결 능력은 극히 일부일 뿐, 보통의 학자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인 것을 보고 감탄하는 그의 능력이 그를 창조적이게 했다. -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7장.


창조적 결과를 낳는 원천은 문제 해결 능력이 아닌, 감탄의 능력이라고 프롬은 주장한다. 이는 인간은 ‘대답’하는 존재가 아닌 ‘질문’하는 존재라는 그의 지론과 맥을 같이한다. 하긴 따져보면 세상을 바꾸는 사람은 질문하는 사람이지 대답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신분제 사회에서 민주주의 사회를 연 계기는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나’라는 질문에서 시작했고, 피처폰 시대에서 스마트폰 시대를 연 것도 ‘휴대폰으로 인터넷을 하면 안 되나’라는 질문이었다. 질문은 우리가 현실을 당연하다고 인식할 때 나오지 않는다. 새롭게 바라보고 감탄해야 나온다.


두 번째 조건은 집중력이다. 프롬은 과거나 미래에 사는 것이 아닌 ‘지금 이 순간에 하는 일’에 온전히 매진하라고 조언한다. 프롬은 책 7장에서 “실제 경험으로서의 과거나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여기만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인식과 응답은 여기 지금에서만 존재한다. 지금 이 순간 하고 보고 느끼는 것에 전념한다면 말이다”라고 강조한다. 내가 나로서 자발적으로 사고하고 느끼고 행동하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에 집중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감탄의 능력 역시 내 인식이 과거나 미래에 있을 때는 발휘되기 힘들다. 쉽게 말하자면 프롬은 과거에 대한 후회를 털고, 미래에 대한 걱정에 사로잡히지 말고 온전히 현재에 집중하자고 조언한다.

세 번째 조건은 자아 경험의 능력이다. 이건 생각과 감정 모두에 해당한다. 타인, 사회가 내게 강요하는 나의 역할과 감정이 아닌 개별 존재로서 나를 경험하라는 설명이다. 프롬의 설명을 그대로 옮기자면 다음과 같다.


모든 사람에게는 반드시 자기 자신의 감정, 즉 정체감이 필요하다. 이 ‘자아’ 감정이 없다면 우리는 미치고 말 것이다. 하지만 정체감은 우리가 사는 문화에 따라 다르다. 개인이 아직 개체가 아닌 원시 사회의 ‘자기’ 감정은 ‘나는 우리’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정체감은 내가 나를 집단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진화의 과정이 진척되고 스스로를 개체로 인식하는 정도에 따라 정체감이 집단과 분리된다. 독자적 개체인 그는 이제 스스로를 ‘나’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자기와 자아를 진정으로 느끼는 사람은 스스로를 자기 세계의 중심으로, 자기 행동의 진짜 장본인으로 경험한다. 그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독창성이다. 내가 말하는 독창성은 새로운 발견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기원을 두는 경험이다. -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7장.


마지막 조건은 양극성에서 나오는 갈등과 긴장을 회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능력이다. 우리는 가급적 갈등과 긴장을 피하려 한다. 프롬에 따르면 갈등과 긴장을 피하면 우리는 스트레스 상황에서 벗어나고 에너지 소비를 낮출 수는 있지만 진짜 나를 대면할 기회는 잃게 된다. 프롬은 갈등의 순기능에 주목한다.


갈등은 해로운 것이기에 피해야 한다는 생각은 일반적으로 널리 퍼진 오류다. 사실은 그 반대다. 갈등은 감탄의 원천이며, 자신의 힘과 흔히 ‘성격’이라 부르는 것을 개발하는 원천이다. 갈등을 피하면 인간은 마찰 없이 돌아가는 기계가 된다. 일체의 격정이 금방 가라앉고 모든 소망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며 모든 감정이 차분해지는 기계다. -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7장.


돌이켜보면 우리는 갈등 속에서 한층 더 성숙해진다. 내 입장만 옳다고 주장하는 유아기적 사고를 지나 상대방의 의견도 마치 내 입장으로 받아들이면서 이해의 폭을 넓히게 된다. 양보를 하고, 더 나은 대안을 찾기 위해 내 욕심을 일부 포기하기도 한다. 갈등은 개인적 차원에서 자신과 타인을 깊이 있게 숙고하는 시간을 갖는 계기가 된다. 사회적 차원에서 갈등은 변화를 이끌어내는 원동력이다. 한 가지 사고방식이 지배하는 사회는 역동성이 떨어진다. 문화적 다양성도 말살된다. 중국, 북한 등 공산주의 국가들이 대표적이다.


진짜 삶을 살기 위한 네 가지 조건, 즉 노잼을 벗어나기 위한 네 가지 조건을 지키기 위해서는 단 하나의 감정이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용기다. 과거를 끊어내고 새롭게 태어날 용기가 필요하다. 익숙한 것과 이별하며 우리는 불편함, 외로움, 고독, 우울을 겪을지도 모른다. 많은 이들은 이 과정에서 회의하고 다시 익숙한 과거의 삶으로 돌아간다. 프롬은 그러면 안 된다고 단호히 말한다. 기왕 용기를 낸 만큼 확신을 가지고 진짜 삶을 향해 끝까지 발걸음을 내디뎌야 한다고 격려한다. 끝은 프롬의 말로 갈음한다.


태어날 준비 - 모든 안전과 착각을 포기할 준비 - 는 용기와 믿음을 필요로 한다. 안전을 포기할 용기, 타인과 달라지겠다는 용기, 고립을 참고 견디겠다는 용기다. 성경에 나온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말하는 용기, 즉 자신의 나라와 가족을 떠나 미지의 땅으로 갈 용기다. 자신의 사고뿐 아니라 자신의 감정과 관련해서도 진리 말고는 그 무엇도 추구하지 않겠다는 이런 용기는 믿음을 바탕으로 해야만 가능하다.


여기서 믿음은 오늘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믿음, 즉 과학적으로 혹은 이성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이념에 대한 믿음이 아니다. 구약에서 믿음을 칭하는 단어 ‘에무나 emuna’가 확신을 뜻하는 것과 같은 믿음이다. 사고와 감정에서 믿고 신뢰할 수 있는 것이 믿음이다. -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7장.

keyword
팔로워 27
이전 09화노잼 탈출? 목표부터 재조준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