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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호 그리고 보람 Apr 07. 2020

[윤] 코로나가 쏘아올린 작은 공 - 크루즈 취소

산산이 부서진 로망이여!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Tinder에서 만나 결혼을 한 커플로, 말레이시아에서 거주 중입니다.
함께 글을 쓰면서 번갈아 가며 올리고 있습니다. 제목의 [윤]은 윤호의 글, [보]는 보람의 글입니다.

여행을 별로 즐기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누구나 여행에 대한 버킷 리스트는 한두 개쯤은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여행을 즐기는 성격이라 여러 버킷 리스트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크루즈선 타기(길게)'였다. 크루즈라니, 뭔가 굉장히 럭셔리하고 비싸서 성공한 노년층(?)들이 인생을 즐기기 위해 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가?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드니에서 워킹홀리데이를 할 때 우연히 팸플릿을 보고 막상 크루즈가 생각보다 비싸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여정에 따라 다르지만 창이 없는 내측 선실은 심지어 하루 10만 원 이내의 가격으로 예약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세상에, 식사와 숙박이 자동으로 해결되고 선내의 시설을 마음껏 이용하면서 저 정도 가격이면 완전 이득 아닌가...?


가끔씩 달링하버에 바람 쐬러 갔을 때 시드니에 기항한 크루즈선을 볼 때가 있었다. 너무나도 타보고 싶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크루즈의 꿈을 2015년부터 모락모락 키우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크루즈 여행을 떠나기가 은근히 쉽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1) 혼자 크루즈 여행을 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최근의 혼밥, 혼술 등의 '혼xx' 키워드가 유행하기 한참 전부터 나는 이미 혼자서 무언가를 하는데는 도가 튼 사람이다. 당연히 혼자서 여행도 잘 다녔었고, 덕분에 외향적인 성격이 아닐지라도 여행지에 가서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사귈 수도 있는지도 나름 터득하게 되었다. 하지만 크루즈 여행은 조금 다르다는 후기를 많이 보았다. 기본적으로 연인이나 가족단위로 크루즈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혼자 승선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고 했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크루즈를 혼자 타는 경우는 드물 것 같았다. 게다가 내 생각엔 크루즈의 꽃은 배 안에서 유유자적하며 크루즈 내에 있는 시설들을 이용하는 것인데, 아무리 내가 혼자서 여행을 잘 다녀도 여기만큼은 누군가와 함께 가고 싶었다. 


이렇게나 다양한 크루즈의 액티비티를 혼자서 즐기기에는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2) 기항지가 되는 도시까지 이동 & 귀국

당연하게도 크루즈를 타기 위해서는 크루즈가 기항하는 항구도시까지 가야 한다. 요즘에야 크루즈가 인기가 많아져서 인천이나 부산, 제주도에 취항하는 크루즈도 생겼다고 하지만, 모름지기 크루즈의 매력은 여행 기간 동안 짧게나마 다양한 도시를 들르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자면 유럽이나 북미, 동남아시아 쪽으로 가는 것이 더 좋은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경우 기항지까지 가는 비행기 표+@의 비용이 들기 때문에 가볍게(?) 생각했던 크루즈 여행의 비용이 꽤 부담스러운 가격으로 변하게 되었다. 덕분에 이래저래 한국에서는 크루즈 여행 가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시간은 흘러 2019년. 어쩌다 보니 나는 결혼 후, 싱가포르까지는 비행기로 1시간 정도 걸리는 말레이시아에서 살게 되었다. 응? 잠깐만. 취향 잘 맞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여행 메이트가 생겼는데, 크루즈 여행의 주요 기항지인 싱가포르과도 가까워졌네? 게다가 내가 재직 중인 회사는 특별한 이슈가 있지 않는 한 휴가를 쓰는 데에는 전혀 제한이 없었다(심지어 1년치 휴가를 한 번에 쓰는 동료도 있었다!). '이거 완전 크루즈 여행을 가기에 적합한 조건 아닌가?' 싶어서 인터넷을 뒤져보니, 2월 15일~24일까지 9박 동안 싱가포르를 출발하여 태국과 베트남을 거쳐 홍콩에 도착하는 크루즈가 단돈(?) $700인 상품을 보았다. 사실 보람이는 병원 방문 때문에 상반기에 한국에 들어갈 일이 있어서 크루즈 여행 후 나는 말레이시아로 돌아오고, 보람이는 한국으로 가면 되니 여정도 딱이다 싶었다. 그래서 보람이에게 슬쩍 물어봤다. 


"보람아, 크루즈 여행 갈래?"


역시나, 보람이의 대답은 시원시원했다

그래서 우리는 창문이 있는 방을 팁까지 미리 지불하는 조건으로 약 260만 원 정도에 예약을 했다. 이때가 2019년 12월 중순 즈음이었고, 우리는 몰랐다. 앞으로 어떤 일들이 우리에게 닥칠지.


2019년 12월 말 ~ 2020년 1월 중순

집에 도둑이 든다. 노트북과 태블릿, 지갑을 도둑맞고(말레이시아에서 도둑맞은 이야기) 이사를 결정했기 때문에 한동안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우리에게는 크루즈가 있으니까. 이사 문제로 골머리를 썩어도 괜찮았다. 우리는 크루즈를 갔다 와서 새 집으로 이사를 가서 새 출발을 할 수 있으니까. 이 기간 동안 크루즈에 대해서 찾을 수 있는 정보는 다 찾아보고, 유튜브도 많이 보고, 각 기항지별로 할 수 있는 것들도 조금씩 찾아보았다. 싱가포르까지 가는 비행기, 홍콩에서 각각 서울과 쿠알라룸푸르로 돌아오는 비행기 예약도 했고, 심지어 승선 시간과 절차를 줄일 수 있다길래 크루즈 웹 체크인까지 완료했다.


https://blog.naver.com/brthlove/221785595596

그런데 난생처음 들어본 중국에 무슨 대도시에서 바이러스가 돈다는 얘기를 들었다. 박쥐가 어쩌고저쩌고. 무슨 상관이랴, 나는 말레이시아에 있는데.



2020년 1월 30일

상관이 왜 없니. 크루즈 회사에서는 안전상의 이유를 들어 도착지를 홍콩이 아닌 싱가포르로 일방적으로 변경한다는 메일을 보내왔다. 호텔 및 항공권으로 인해 지불한 비용에 대한 차액은 환불해 주겠다고 했지만,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 참고로 나는 살면서 항공권 변경이나 취소를 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보람이는 덕분에 힘들게 잡았던 한국에서의 병원 예약 일자를 옮겼다.


이렇게 된 이상 차라리 2월 말에 같이 이사한 후에 보람이가 한국으로 가는 것이 낫겠다 싶어 다시 비행기 표를 끊었다. 싱가포르에서 쿠알라룸푸르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추가로 끊었다.


2020년 2월 12일

중간중간 크루즈사에서 '입국 여부와 관계없이 중국 or 홍콩 여권 소지자는 승선이 불가능하다'던가, '관련 문의에 대해 처리 중이지만 문의사항이 너무 많아 답변 받기까지 조금만 기다려달라'라는 등의 공지사항을 이메일로 보내왔다. 나의 비행기 표 환불에 대해 이메일은 몇 차례 보냈으나 답장이 없어 그냥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2월 12일(크루즈 여행을 떠나기 3일 전) 출근 전, 핸드폰을 보니 <Important information for your upcoming Quantum of the Seas sailing>이라는 제목으로 이메일이 와 있었다. 무언가 느낌이 이상해서 이메일을 열어보니, 크루즈 출항을 전면 취소한다는 메일이 와 있었다.


아니 크루즈양반, 이게 무슨 소리요!

내가 잠이 덜 깼다 싶어 메일을 여러 차례 다시 읽어봤는데, 안타깝게도 "we’ve made the difficult decision to cancel"이라는 문구만 선명하게 보일 뿐이었다. 곤히 자고 있는 보람이를 깨우고 상황을 설명하니 보람이 역시 아연실색한 표정이었다. 우리 모두 이번 휴가만 바라보며 힘든 일들을 견뎌내고 있었는데, 너무나 당혹스러웠다. 출근시간이 코앞이었지만 바로 임시 가족회의를 개최하였다.


"휴가는 어떡하지? 오늘 회사 가서 취소한다고 말씀드려야 되는 거 아냐?"

"취소란 없어. 어디라도 갈거야. 이러고 어떻게 또 일을 해? 무조건 어디라도 갈 거야"

"방콕이라도 가야되나...?"

"방콕...?"


이전 글에도 여러 번 말했다시피 우리는 지독한 방콕 매니아(내가 방콕을 사랑하는 이유 / Bangkok city, I can't stop)인데, 사실 사귄 이후부터는 같이 방콕에 가본 적은 없었기에 살짝 혹했다. 하지만 곧 방콕의 지독한 교통체증이 떠올랐고, 나와 보람이의 여행 스타일상 어디를 꼭 구경하고 방문해봐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여행을 떠난다면 아무리 낯익은 곳이어도 결국 대도시를 탐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갑작스럽게 피로감이 몰려왔다. 그러다가 문득 한곳이 떠올랐다.


"보람, 치앙마이는 어때?"

"치앙마이? 나는 좋은데... 너는 이미 몇 번 가봤잖아. 괜찮아?"


사실 치앙마이는 도시 자체가 크지 않고 이미 두 번 방문해서 웬만한 지리는 다 알고 있고, 아기자기하면서도 힙한 곳이 많아 보람이가 좋아할 만한 곳들이 많아서 괜찮겠다 싶었다. 무엇보다 더 이상은 여행에 대한 고민과 걱정을 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컸다. 그래서 우리는 크루즈 여행 대신, 갑작스럽게 치앙마이로 1주일간 여행을 가게 되었다.




p.s.

2020년 2월 26일

치앙마이 여행 중에 크루즈 비용이 환불된 것을 확인했으나, 계산해보니 $394가 덜 환불되었다. 이 애매한 숫자는 뭐지... 싶었지만 그나마 환불이 되고 있다는 것에 위안을 삼았다.


2020년 4월 6일

남은 금액이 드디어 환불이 다 되었다. 최근 달러 환율이 쭉쭉 올라 환차익도 얻을 수 있었다... ^.ㅠ

가보지도 못한 크루즈 여정이 past cruise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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