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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hai park Dec 26. 2019

<미안해요, 리키>

폐부를 관통하는 삶의 고단함

살다 보면 그럴 때가 있다. 나는 죽어라 노력하고 있는데도 상황이 나아지기는커녕 더 나빠지기만 할 때. 산다는 게 그렇다. 세상이 계속 배신을 하여도 선택의 여지가 없기에 지친 육신을 어쩔 수 없이 일터에 내던질 때. 삶이라는 이름의 이 고단함은 자본주의 시스템 하에서 더욱 날카롭게 파고든다.


<미안해요, 리키>는 영국의 거장 켄 로치 감독이 <나, 다니엘 블레이크> 이후 3년 만에 발표한 신작이다. 신작에서 그는 여전히 노동자의 삶에 시선을 비추고 있다.


2010년대 이후로 온라인 중개 플랫폼을 통해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주로 배달, 대리운전, 퀵 서비스 같은 직종의 노동자들이다. 이러한 노동자들을 '긱 노동자'로 부르며, 이러한 경제형태를 총칭하여 '긱 이코노미'라고 부른다. 줄곧 노동자들의 삶에 관심을 가졌던 노장 영화감독의 눈에 이 새로운 형태의 노동 플랫폼이 들어왔다. 긱 노동자들은 정해진 보수도, 정해진 근로기간도 없다. 일하고 싶을 때 일하고 일한 만큼 번다. 얼핏 자유로워 보이지만, 정해진 시스템에 속하지 않는 이들은 개인사업자라는 이름하에 근무의 모든 변수들을 다 홀로 책임진다.




<미안해요, 리키>에 리키도 마찬가지다. 일한 만큼 벌 수 있다는 희망에 한 택배 회사와 개인사업자로 택배 기사 계약을 맺는다. 열심히만 하면 빚도 다 갚고, 더 좋은 집으로 이사도 갈 줄 알았다. 그렇게 온 가족이 다 행복해질 줄 알았다.



하지만 삶이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행복이란 결승점으로 가기 위한 경주는 곳곳에 있는 허들을 넘어야 하는 장애물 경주였다. 그 장애물은 얘기 치도 못하게 불쑥불쑥 튀어나와 발목을 잡았다.


리키는 하루 동안 꼬박 12시간 이상을 일해야 했으며, 운전 중 배송 중에 원치 않는 상황, 원치 않는 고객과 맞닥뜨려야 했다. 많은 물량을 소화하느라 화장실 갈 틈도 없던 그는 페트병에 급한 볼일을 처리해야만 했다. 그의 아내 애비도 마찬가지. 간병인으로 일하는 그녀도 장시간 노동에 묶여 있었고, 환자들을 만나기 위해 이동하는 교통비도 전부 본인 부담이었다. 두 부부는 가정을 지키고자 우리 가족을 더 나은 환경으로 이끌고자 죽도록 노력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노력이 가정의 균열을 불러오고 있었다. 부모가 현장에서 땀을 흘리는 그 시간에 아이들은 방치되고 있었다.


10대인 아들은 학교를 빠지기 일쑤였고, 사고 치기 바빴다. 학교에서 요청한 선생님과의 면담 시간에도 리키는 택배물량을 소화하느라 가지 못했다. 후에 리키의 아들이 절도 혐의로 경찰서에 끌려가게 되었을 때 그는 어쩔 수 없이 배송을 포기하고 경찰서로 가게 된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택배 회사로부터 벌금과 벌점을 받는다. 불량배에게 폭행을 당해 병원에서 치료 중일 때도 택배물량을 채우지 못한 죄로 벌금과 벌점을 받는다. 일한 만큼 많이 벌지만, 일을 그만큼 못하면 본인이 스스로 메꿔야 하는 것은 그가 개인사업자로 계약을 했기 때문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리키는 아프고 무거운 몸을 이끌고 다시 운전대를 잡는다. 리키 같은 노동자가 노동을 벗어나는 일은 더욱 많은 노동을 하는 것뿐이다. 이 뫼비우스 띠 같은 현실이 보는 내내 가슴을 짓누른다. 리키의 아내 애비가 꾸었던 꿈처럼 진흙에 빠져서 발버둥 치지만 그럴수록 더 깊이 빠지는 삶의 아이러니. 이들에게는 오로지 이 가정이, 그들의 자녀가 희망이자 버팀목이다.



<미안해요, 리키>는 쉽게 동정을 구하려 하지는 않는다. 그저 이들의 삶을 무던하게 따라갈 뿐이다. 리키와 그의 가족들이 겪는 이야기를 단순히 보여주는 것만으로 이 영화는 깊이 있는 울림을 주고 있다. 울림과 동시에 시대를 꿰뚫는 직언도 서슴지 않고 있는 영화가 <미안해요, 리키> 다.


켄 로치 감독은 어쩔 수 었는 이 삶의 고단함을 단순히 개인의 서사로만 한정 짓지 않는다. 새로운 경제 플랫폼이 개인과 가정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리키의 삶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어떻게 노동자를 착취하고 그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매우 날카로운 어조로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매우 비통한 드라마인 동시에 현시대를 비판하는 사회고발성 영화인 것이다. 80세가 넘는 노장 감독이 새롭게 대두되고 있는 경제형태에 관심을 가지고 그 후 오게 될 결과까지 읽었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그러한 날카로운 지각이 <미안해요, 리키>라는 슬픈 드라마를 나오게 했다.


일하고 싶을 때 일하고, 일한 만큼 버는 긱 노동은 언뜻 노동시장의 블루오션처럼 보인다. 자유롭게 일하고 열심히만 하면 금방이라도 성공할 것처럼 보인다. 때로는 개인사업자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회사와 계약한 이상 그 회사에 명령과 규율을 따라야 하는 엄연한 노동자다. 하지만 열심히 일해 회사에 이익을 창출하여도 회사로부터 어떠한 보장도 받지 못한다. 이것이 새로운 형태의 노동착취라고 켄 로치 감독은 얘기하고 있다.



<미안해요, 리키>의 원제는 <Sorry, we missed you>이다. 영어권 택배회사나 배송업체에서 쓰는 관용적 표현이다. 고객이 부재중으로 물품이 전달되지 못했을 때 배송기사는 'Sorry, we missed you'라고 적힌 카드를 문 앞에 걸어 놓는다. 직역하자면 '미안해요, 우리가 놓쳤어요' 다. 영화 제목은 한국어로 번역하면서 주인공 이름이 들어간 <미안해요, 리키>로 바뀌었다.


영화를 보면서 여러 얼굴들이 스쳐 지나갔다. 나를 포함하여 내 친구, 가족. 미디어를 통해 만났던 정규직 고용이 아닌 여러 노동자들. 그리고 내가 우리가 놓쳤던 그들의 목소리와 그들의 삶에 대해서 생각했다. 우리나라에도 아니 당장 내 주변만 해도 수많은 리키와 리키의 가족들이 있을 것이다.


<미안해요, 리키>는 앞으로 그들을 놓치지 말아야겠다는 또 하나의 숙제를 내게 남겨주었다.



ps: 미안해요, 켄 로치. 그동안 내가 놓친 건 당신의 영화들이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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