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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이은의 리뷰닷 Feb 04. 2017

시간이 멈춘 중세의 마을

아들과 함께한 이태리 20일 #21 시에나 



과거의 시간은 짙은 체취처럼 길과 건물 위에 드리운다



우리가 시에나에 도착한 것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이었다. 시에나는 언덕 위 작은 옛 도시이다. 언덕을 올라가면 일단 성문을 통과해야 하고 거기서부터는 시간이 멈춘 공간이다. 나는 익숙지 않은 수동 기어 탓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언덕을 올랐다. ( 우리는 숙소까지 차를 타고 갔지만, 시에나 성벽 밖에 차를 세우고 걸어서 올라가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지역은 주차나 주행이 엄격하게 제한되는 지역이라서 차를 가지고 갔을 때 제약이 많다. '(19) 이태리 렌터카 이용 팁 AtoZ' 참조 ) 


그저 우리가 하루를 묵어갈 곳에 불과했지만, 숙소에 도착하자 우리는 벌써 중세로 시간여행을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입구는 아주 좁았는데 들어가고 나니 중심에 작은 실내 정원이 있고, 그 실내 정원을 둘러싸고 숙소들이 배치되어있는 구조였다. 



약간 과장하자면 건물 복도나 객실에서는 '우리가 잠시 박물관에 묵어가기로 했나'하는 느낌이 살짝 들 정도였다. 


시에나는 행정구역상 피렌체와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토스카나 주'에 속해있다.  르네상스 시대에 융성했던 다른 도시들이 그러했듯이 은행업과 상업으로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13~14세기에 걸쳐 가장 번영했다.  그런데 교황과 황제의 권력다툼 와중에 상대를 잘못 만났다.  강성한 도시, 메디치 가문의 도시 피렌체와 적대적인 관계에 놓였던 것이다.  게다가 1348년 페스트의 창궐로 인구가 격감했고 결국 15세기 초에 세력을 잃게 된다. 


그래서 시에나의 시계는 멈춰있다. 로마 건국신화에 나오는 로물루스(Romulus)의 쌍둥이 형제 레무스(Remus)의 두 아들이 세웠다는 도시는 중세에 멈춰있었다. 


밤이 찾아오긴 했지만 그냥 숙소에 눌러 있기에는 너무 아쉬워서 우리는 이 도시의 야경을 훔쳐보기로 하고 밖으로 나왔다.  





이태리의 모든 도시는 두오모가 있다. 시에나도 마찬가지이다. 여행책자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가 될 뻔했는데 흑사병이 돌아 지금 형태로 마무리되고 말았다.'라고 되어있으나, 직접 보면 애초에 기획 자체가 달랐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양식도 많이 달랐고 성당 주변의 배치도 그랬다. (성당의 전면부를 '파사드'라고 한다.) 어쩌면 해가 진 뒤 나트륨 등 불빛을 반사하는 파사드가 따뜻한 색이어서 차가운 대리석의 느낌보다는 덜 웅장한 느낌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오른쪽과 왼쪽은 같은 성당인데 낮과 밤의 느낌은 보는 것처럼 매우 다르다.  


피렌체 중심의 골목길에서는 '중세'가 느껴지지 않았다. 반면 시에나는 15세기 이후 시간이 멈춘 도시답게 밤거리 곳곳에 중세의 체취가 묻어났다. 실제 우리가 그 시간대에 있었다면, 노란 가로등 불이 없고 매우 어두웠겠지만, 나는 그 조명 속에 웅크리고 있는 골목길과 건물의 창문들 속에서 시간의 그림자를 보았다. 



우리는 예산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식비에는 많은 투자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오래된 도시에서는 이 고장 고유의 먹을 것을 맛보고 싶었다. 


숙소 프런트에서 추천을 받아 꼬불 꼬불 찾아간 곳은 입구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가자 아주 넓은 공간이 펼쳐져 있었고, 지하를 파내 조성한 듯한 방도 있었다.  이탈리아 반도에 가장 먼저 정착한 사람들로 알려진 에투리아(Etruria) 사람들은 평지가 아니라 언덕 위에 방어하기 좋은 도시를 건설했고, (시에나나 오르비에토 모두 언덕 위에 세워진 도시이다) 굴을 파는데 선수들이었다고 한다. 에투리아 귀족들은 땅 속에 전용 창고를 여러 개 갖고 있었다.  



어떻게 주문해야 할지를 잘 몰라서 쩔쩔맸는데 나중에 로마에서 주 이태리 한국 대사관에 근무하시는 분께 물어봤더니 '그냥 먹고 싶은 것 하나만 시켜 먹어도 아무 말 안 한다'라고 설명해줬다. 


얘기가 나왔으니 이태리 메뉴가 대충 어떻게 구성되어있는지 보면 1. 안티파스토 (Antipasto 전채요리)  2. 프리모 피아토(Primo-Piatto 첫째 요리) 3. 세콘도 피아토(Secondo-Piatto 둘째 요리) 3. 돌체(Dolce 디저트)의 순이다. 물론 1번 앞에 아베르 티보 (Aperitivo 식전요리/식전 주)가 있기도 하다. 


이탈리아 전통요리학교 ALMA가 설명하는 이태리 코스 요리 


아베르 티보 (Aperitivo 식전요리/식전 주) 

결혼식이나 큰 행사 때 먹는 요리로 전채요리 전에 나온다. 

안티파스토 (Antipasto 전채요리) 

식전에 입맛을 돋우는 애피타이저로 차가운 전채요리인 프레도(freddo)와 더운 전채요리 깔도(caldo)가 있다.  

프리모 피아토(Primo-Piatto 첫째 요리)

첫 번째 식사로 본격적인 요리. 보통 밀가루로 만들어진 것인데 파스타, 피자, 리조토 등이다. 

세콘도 피아토(Secondo-Piatto 둘째 요리) 

생선, 고기 등 메닝 요리 두 번째 접시. 콘토르노(Contorno)인 익힌 채소와 생채소를 같이 먹기도 한다.  포르마조(Formaggio)는 치즈를 말한다. 

돌체(Dolce 디저트) 

아이스크림, 과일 등 다양한 디저트 음식을 내놓는다. 



많은 사람들이 이태리의 '맛'을 말하는데, 나는 사실 입맛이 '저렴'해서 그런지 몰라도 대단히 '맛있다'는 느낌은 없었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좀 별로였다. 특히 전채 음식으로 나온 것 가운데는 빵 위에 생선 발효 소스를 얹은 것이 있었는데 멸치젓을 올린 맛이어서 깜짝 놀랐다.  


그렇게 밤이 지나고 아침이 찾아왔다. 


우리가 목표한 곳은 사실 두오모가 아니라 시에나에서 가장 중요한 관광자원인 캄포 광장(Campo)과 우뚝 솟은 만쟈 탑(Torre del Mangia)이었다. 


1349년에 완공되었다는 캄포 광장은 베니스나 피렌체, 밀라노와 전혀 다르게 극장처럼 경사가 있었다. 부채꼴 모양의 이 광장을 만쟈탑에서 내려다보면 9개의 구획으로 나뉘어 있다. 이 구획들은 공화국을 통치했던 9인으로 구성된 정부를 상징한다고 한다. 


부채꼴의 가장 위쪽에 연못이 있다. 시에나가 늑대 후손의 도시인만큼 연못에는 늑대의 형상이 자리 잡고 있다. 


이 광장에서는 안장 없는 말의 경주(Palio)가 벌어지는데, 나는 나중에 사진들을 찾아보고 경주가 벌어지는 시기에 오지 않은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뜨거운 함성과 열정이 느껴지긴 했겠지만 그 인파가 광장에 가득했다면 시간이 박제된 듯한 느낌을 얻어가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http://horsenetwork.com/2016/08/palio-di-siena-worlds-oldest-wildest-horse-race/

우리가 광장에 갔던 날, 하늘에는 양떼구름이 가득했다. 나는 동행인에게 '광장에 누워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전설'이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수치심 없이 광장에 누워 하늘을 감상할 수 있게 하려는 계략이었다. 만쟈탑이 페스트의 소멸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고 하니, 사실 그리 큰 거짓말은 아니었다.   



광장에 세워진 만쟈탑에 오르는 일은 그리 만만하지는 않다. 별도의 엘리베이터(밀라노 두오모는 엘리베이터가 있다)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시에나에 가서 탑에 오르지 않는다면, 절대로 시에나를 다 보았다고 말할 수 없다.   


종탑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중세의 파수군이 된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오밀조밀 집들이 있고 그 너머에 성벽, 그리고 그 너머엔 이태리 반도의 구릉과 평야가 펼쳐져 보인다.  

만쟈 탑에서 바라본 시에나 전경 (c)Storypop


따지고 보면 서울도 시에나만큼이나 오래된 도시이다. 시에나가 15세기쯤 박제되었다고 하는데 그때 서울 역시 조선의 수도였다. 그러나 서울은 시간을 품은 공간들이 매우 빠른 속도로 사라져 가고 오히려 과거의 흔적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곳을 찾아보기 어렵다. 


날씨가 꽤 쌀쌀했지만 우리는 꽤 오랜 시간을 탑 위에서 보냈다. 


어쩌면 전혀 다른 문화, 전혀 다른 건축양식이지만 타워 크레인이 바삐 움직이는 서울의 공간들이 300년, 400년, 500년 전 어떤 모습이었을까 상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비수기인 겨울, 계절 탓도 있었겠지만 한낮 시에나의 거리는 고즈넉했다. 


겨울의 햇살은 오래된 길, 오래된 건물에 긴 그림자를 만들어내며 과거의 체취를 덧입히고 있었다. '늑대의 전설'에 동참하는 레무스의 두 아들이 세운 도시. 시간의 박제와 같은 그 도시는 그렇게 우리를 떠나보냈다. 


(c)Storypop


#italy #siena #이태리여행 #유럽여행 #시에나 #캄포광장 #만쟈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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