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깨끗한 거리

[평일의 의식의 흐름. 겨울] #2

by 임재훈 N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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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본 깨끗한 거리가 겨울에도 여전하다. 에이포 용지 몇 장이 눈발에 약간 젖었을 뿐 검은색 바탕체 글씨는 한 점 번짐 없이 의연하다. ‘깨끗한 거리’라는 다섯 글자가 이 거리의 얼굴 같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도 있듯, 이렇게나 깨끗한 만면에는 실수로라도 옷가지의 실밥 한 가닥 떨구지 못할 것 같다. 가을에도 겨울에도 깨끗했으니 그다음 계절도 한결같으리라는 기대를 품게 된다. 내 얼굴에 새겨 넣을 표정을 엄격히 관리해야겠다는 생각을 문득 해 본다.

활자체를 의미하는 영단어가 ‘typeface’다. 글자(type)의 얼굴(face), 타입페이스. 똑같은 메시지라도 어떤 서체로 입력하느냐에 따라 표정이 달라진다. ‘안녕하세요’라는 지극히 평이한 말을 진지한 궁서체, 쿨한 필기체, 꼬불꼬불 펜글씨체로 각각 인쇄할 경우 세 가지 표정이 나온다. 읽는 이의 상상의 영역에서 세 사람—가령 근엄한 어르신, 캐주얼 룩의 젊은 성인, 갓 한글을 뗀 어린이—이 동시에 인사를 건네는 셈이다.

나는 타인에게 어떤 타입의 얼굴로 기억될까. 나는 당신에게 좋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사람일까. 가끔은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내 얼굴을 점검해야겠다. ‘깨끗한 거리’라 명명된 거리를 실제로 깨끗하게 관리하는 누군가처럼.






사진수필 『평일의 의식의 흐름』(2025)

- 글과 사진. 임재훈

- 저자 소개. 포트폴리오 / 인스타그램


※ 『평일의 의식의 흐름』 브런치북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편으로 분재됩니다. 각 계절당 25편의 글과 그보다 많은 사진들을 실을 계획입니다. 혹시 모를 무단 전재 및 배포 행위를 예방하고자 브런치북에는 원본 사진이 아닌 해상도(용량)를 줄이고 텍스타일 효과를 입힌 사본을 게재합니다. 추후 출간 작업이 진행되면 출판사와 원본 사진들을 공유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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