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의 의식의 흐름. 겨울] #1
명사 ‘눈옷’의 사전적 의미가 이러하다. ‘산이나 나무 따위에 수북이 덮인 눈을 옷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누가 만든 단어일까. 누가 처음 썼을까. 산하와 초목에 내려앉는 설편(雪片)을 보며 ‘세상이 하얀 옷을 입는구나’라고 감각하고, 그것을 언어로 기록해 둘 줄 알았던 고운 심성의 주인. 어른일까 아이일까. 누구인지 알 길은 없겠으나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이젠 모두가 그 낱말과 심상을 공유하고 있으니. 그 덕에 겨울이라는 계절 자체가 새옷 입고 찾아오는 내 일상의 반가운 손님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봄, 여름, 가을 내내 쫄쫄거렸던 수입이 겨울 됐다고 갑자기 콸콸 쏟아질 리는 만무하고. 수도관이 얼지나 않으면 다행이겠다. 내가 모아 둔 야트막한 예금 계좌에도 눈이 쌓인다면 참 좋으련만. 그러면 겨우내 꽝꽝 얼어서 돈 녹을 일은 없을 텐데. 무겁게 밟아 온 길에 하얀 족적이 깊고 선연하다. 투명 인간이 된 또 다른 ‘나’들을 줄줄이 데리고 걷는 느낌이다. 이런 참담한 기분으로 계속 걸을 수는 없다. 겨울은 이제 막 시작인데.
도리질을 하고는 눈옷을 상상해 본다. 저 발자국들이 전부 백의 차림의 귀객(貴客)이라면⋯. 천의무봉 눈옷을 입고 내 뒤를 보이지 않게 밟는 ‘행복 조사관’들. 복을 받을 만한 녀석인지 아닌지 면밀히 살피러 온 것일 터. 잘 보여야 한다. 산타 할아버지도 우는 아이한테는 선물을 안 주신다고 들었다. 이미 가진 것, 주어진 것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임을 증명하자. 돈 대신 한숨만 내리붓는 ‘텅장’ 예금주임에도 곧잘 씩씩히 웃기도 하는 ‘마음 부자’라는 걸 보여 주자.
눈옷이라는 낱말 하나가 그날의 내 마음을 살렸다. 가물어 버석대는 마음밭에 비단결 같은 설백색 결정을 고루 뿌려 주었다. 하얀 기운 담뿍 머금고, 발밤발밤, 뽀드득뽀드득, 신중히 한 걸음씩, 눈길을 따라 내가 향해야 할 곳으로 나아갔던 겨울 오후.
사진수필 『평일의 의식의 흐름』(2025)
- 글과 사진. 임재훈
※ 『평일의 의식의 흐름』 브런치북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편으로 분재됩니다. 각 계절당 25편의 글과 그보다 많은 사진들을 실을 계획입니다. 혹시 모를 무단 전재 및 배포 행위를 예방하고자 브런치북에는 원본 사진이 아닌 해상도(용량)를 줄이고 텍스타일 효과를 입힌 사본을 게재합니다. 추후 출간 작업이 진행되면 출판사와 원본 사진들을 공유할 계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