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음이라는 공유점

[평일의 의식의 흐름. 겨울] #14

by 임재훈 N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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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 회사 그만두고 반강제적 전업 작가 생활을 시작한 지 거의 반년 만에 모처럼 업무 미팅이 잡혔다. 그것도 무려 출판사와. ‘드디어 새 책이, 퇴사 후 쓴 첫 책이 나온다⋯.’ 숱한 투고 끝에 켜진 청신호라, 혹여 금세 꺼져 버리거나 별안간 빨간불로 바뀔까 봐 집에서부터 노심초사하며 행선지를 찾아갔다. 서울 지하철 6호선 녹사평역 인근, 이른바 경리단길. 걱정과는 달리 미팅은 순조로웠고, 정말 오래간만에 ‘뭔가 해냈다’라는 뿌듯함을 맛봤다. 편집자 님과 다음 미팅을 기약한 뒤 한겨울 평일의 호젓한 이태원 골목을 혼자 돌아다녔다. 마침맞게 카메라도 챙겨 온 터라 관광객처럼 곳곳을 구경했다.

신간 제작을 확정 지은 직후라 마냥 기쁠 줄 알았는데, 역시나 직업병에 기인한 만성 불안증이 또 도졌다. 당시 나는 또 다른 책—독자 여러분께서 지금 읽고 계신 바로 이 책을 기획하고 있었다. 테스트 삼아 몇 편의 초고를 써 보면서 ‘새 프로젝트에 적합한 신체와 사유의 리듬(?)’을 익히던 단계였다. 내가 포착한 피사체에 내가 쓴 글을 가볍게 덧붙인다, 현상된 폴라로이드 필름 하단의 흰 공간에 사인펜으로 메시지를 남기듯, 이라는 것이 초창기 아이디어였다. 그런데 막상 시작하니까 사진 찍는 눈도 글 쓰는 손도 경직되어 버렸다. 책으로 낼 거니까 잘 찍고 잘 써야 해, 라는 긴장 탓이었다. 카메라 메고 경리단길을 걷는 동안에도 아니나 다를까 또 굳고 말았다. 고심 끝에 셔터를 눌러 놓고선, 프리뷰 화면을 확인하고는 바로 지워 버리는 짓을 반복했다. 이래가지고야 단행본 한 권 볼륨 채우기는 글러 먹은 듯싶었다.

전전긍긍하던 와중에 발견한 것이 바로 사진 속 마네킹과 석고 흉상이다. 서로 다른 장소의 두 이미지. 공통점은 팔다리가 없다는 것. 차이점은 마네킹에게는 상반신만, 석고상한테는 머리만 온전히 달려 있다는 것. 만약 공통점 하나만 존재했다면 둘을 엮는 상상력이 발동되지는 않았을 것 같다. 하지만 각각 머리와 상반신이 안 달렸다는 차이점 덕에 내 머릿속은 마네킹과 석고상을 하나로 합칠 수 있었다. 아귀가 맞는 지그소 퍼즐 조각 한 쌍—오목한 것과 볼록한 것, 머리가 없는(상반신만 있는) 것과 상반신이 없는(머리만 있는) 것—을 발견한 느낌이랄까. 마네킹에게 다소 고지식한 얼굴이지만 석고상의 머리를, 석고상에게 심히 기묘한 의상이지만 마네킹의 상체를.

내가 ‘차이’라 감각했던 게 어쩌면 둘의 또 다른 접점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수학 용어를 빌리자면 공유점(共有點), 즉 ‘두 도형이 만나는 점이나 맞닿는 점’. 가시적으로는 상이해 보이나, 두 대상에 내재된 보이지 않는 존재성-도형은 사실 닮은꼴이라는 것. 그걸 볼 줄 아는 눈을 가져야겠다, ‘잘 보는’ 연습을 해야겠다, 라고 반성했다. 그래서 일단은 책 기획을 중단했다.

재개할 마음을 먹은 시점은 2년쯤 지난 뒤였다. 그사이 나는 퇴사 후 두 번째 책의 초고를 완성하고 또다시 긴긴 투고 러시(?)에 한창이었다. 신호등은 한참 만에 초록불로 바뀌었고, 늘 그렇듯 굼뜨게 건너편 길로 넘어갈 수 있었다. 출퇴근 안 한 지 3년째 해의 가을이었다. 늦겨울 경리단길 골목에서 잠정 보류했던 사진수필 프로젝트를 다시 떠올렸다. 동네 산책 중에 『평일의 의식의 흐름』이라는 가제를 스마트폰 메모장에 적고, 집으로 돌아와 마네킹과 석고상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머리가 없고 상반신이 없는 두 모형이 마치 사유상(思惟像)처럼 보여서, 모니터 앞에서 허리를 곧추세우고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나의 ‘퇴사 삼부작’ 마지막 권의 집필 신고식이었다.






사진수필 『평일의 의식의 흐름』(2025)

- 글과 사진. 임재훈

- 저자 소개. 포트폴리오 / 인스타그램


※ 『평일의 의식의 흐름』 브런치북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편으로 분재됩니다. 각 계절당 25편의 글과 그보다 많은 사진들을 실을 계획입니다. 혹시 모를 무단 전재 및 배포 행위를 예방하고자 브런치북에는 원본 사진이 아닌 해상도(용량)를 줄이고 텍스타일 효과를 입힌 사본을 게재합니다. 추후 출간 작업이 진행되면 출판사와 원본 사진들을 공유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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