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복과 털양말

[평일의 의식의 흐름. 겨울] #15

by 임재훈 NOWer


#winter #15 DSC07520.jpg
#winter #15 DSC07519.jpg


누구나 일상적으로 입을 만한 여성용 내복 상의. 발목 부분에 동물의 눈과 코가 그려진 앙증맞은 230㎜ 털양말. 누군가는 사진 속 빨래를 보고 ‘어른과 아이(양말 사이즈와 디자인으로 보아 초등학교 오륙 학년 정도)가 같이 사는 집’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상식적인 유추다. 내복과 양말 다 한 사람의 물건이고, 이 집에 살던 유일한 아이는 이제 265㎜ 발을 끌고 멀리서 혼자 지낸다. 이 사실을 알고 난 뒤 ‘어르신 양말 취향 진짜 귀여우시다’ 혹은 ‘우리 엄마도 꼭 저런 양말만 신으시던데’ 같은 생각을 한다면 그 또한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어른이 아이처럼 입고 말하고 행동하는 게 뭐 그리 대수로운 일이라고. 단 한 번도 아이였던 시절이 없는 양산형 성인 안드로이드라면 모를까. 신체의 한 군데쯤 여전히 깜찍한 동물 얼굴 동심일 수도 있는 거지.

엄마의 스몰 사이즈 내복 상의, 내 발보다 35㎜ 작은 양말. 한때는 내가 다 입고 신을 수 있었던 치수. 저만 한 크기로도 충분히 따뜻할 수 있었던 ‘나’를, 엄마는 올겨울에도 꺼내 깨끗이 빨았다. 거실 창문을 열자 섬유 유연제 향이 커튼 따라 나폴거린다. 여기서 더 커지고 멀어지지 말아달라고, 어린 나를 닮은 엄마의 빨래들이 속살거리는 느낌. 오랜만에 맡는 집 냄새에 머릿속이 몽글몽글해진 탓인가, 건조대에 같이 걸린 내 오버핏 옷들이 전부 내 욕심들로 보인다. 엄마가 또 조용히 세탁기에 넣고 돌렸구나, 내일 아침 떠날 무렵엔 작아져 있겠네, 자기 욕망 한 벌 스스로 빨래도 못하는 철부지라니, ⋯⋯.






사진수필 『평일의 의식의 흐름』(2025)

- 글과 사진. 임재훈

- 저자 소개. 포트폴리오 / 인스타그램


※ 『평일의 의식의 흐름』 브런치북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편으로 분재됩니다. 각 계절당 25편의 글과 그보다 많은 사진들을 실을 계획입니다. 혹시 모를 무단 전재 및 배포 행위를 예방하고자 브런치북에는 원본 사진이 아닌 해상도(용량)를 줄이고 텍스타일 효과를 입힌 사본을 게재합니다. 추후 출간 작업이 진행되면 출판사와 원본 사진들을 공유할 계획입니다.

월, 화, 수, 목, 금 연재
이전 14화없음이라는 공유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