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의 낙원

[평일의 의식의 흐름. 겨울] #13

by 임재훈 NOWer



종로3가의 한 찌갯집 앞. 바로 들어가려던 걸음을 뒤로 물린다. 약속 상대가 10분쯤 늦는다고 한다. 쫌맞게도 나는 10분 먼저 도착한 상황. 20분간 산책이나 할 겸 가게와 가까운 낙원악기상가로 향한다. 지하 1층, 지상 15층 규모인 우리나라 최초의 주상 복합 건물. 찻길에 세운 필로티 구조라 ‘도로 위의 낙원’이라 불린다. 상가 안을 천천히 구경하고 싶지만 찌갯집 약속 탓에 그럴 수는 없고, 아쉬운 대로 이런저런 정보를 스마트폰으로 검색해 본다.

2⋅3층은 악기 전문점 300여 곳의 영업장, 4⋅5층은 악기 관련 사무 공간 및 음악인들을 위한 합주연습실과 공연장 등으로 쓰인다. 6층부터 15층까지는 149세대가 거주하는 ‘낙원아파트’다. 특히 4층은 그 유명한 옛 ‘허리우드 극장’ 자리다. 1969년부터 2005년까지 36년간 영사기를 가동했던 개봉관. 지금은 노년의 문화 향유자들을 위한 장소로 꾸며져 있다. 폐관한 허리우드를 어느 사회적기업이 인수 및 리모델링하면서 2009년 1월 실버 세대 전용 영화관으로 새롭게 개관한 것이다. 당시 극장명은 ‘허리우드클래식’이었다가 이후 ‘실버영화관’이라는 보다 직관적인 이름으로 바뀌었다. 2016년 9월에는 또 다른 사회적기업에 의해 ‘낭만극장’이라는 단관 상영관이 하나 더 생겼다. 즉 낙원악기상가 4층 허리우드 터에는 현재 실버영화관과 낭만극장이 자리해 있다. 두 공간 모두 문화체육관광부가 지정한 ‘예술 영화 전용 상영관’이다. 국내외 다양한 고전 영화와 더불어 문화 예술 무대도 선보인다. 60세 이상 관객은 2,000원에 영화를 관람할 수 있다.

정보 검색을 마친 뒤, 건물 외벽의 ‘허리우드클래식’이라는 레터링 간판을 유심히 쳐다본다. ‘허리’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다. 그러다 별안간, 나의 오랜 유년기가 예정에도 없던 상영을 시작한다. 1990년대 비디오 대여점에서 보았던, 혹은 내 부모님과 학교 선생님들에게서 들었던 옛 영화 제목과 배우들. ⟨퍼니 걸(Funny Girl)⟩이 아니라 ⟨화니 걸⟩, ⟨자이언트(Giant)⟩ 말고 ⟨쟈이안트⟩, 알랭 들롱(Alain Delon)은 아랑 드롱, 엘리자베스 테일러(Elizabeth Taylor)는 에리쟈베스 테일러, ⋯⋯.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웬즈데이⟩의 원작이라 할 수 있는 1960년대 미국 시트콤 ⟨Adam’s Family⟩의 1992년 영화판 제목은 우리나라에서 ⟨아담스 훼밀리⟩였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상호가 ‘훼미리마트’였던 편의점도 한때 존재했었다.

‘허리’ 아래에서, 내가 이런 발음과 표기에 익숙한 세대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영단어 ‘hollywood’의 올바른 우리말 표기는 ‘할리우드’다. 한글 자음 리을이 받침 자리에서 충분히 알파벳 엘(L) 발음을 대응하는데 굳이 뗄 이유가 없다. 이 같은 비표준 영어 표기의 상당수는 일본식 발음을 따른 것들이다. 우리말은 일본어와 달리 모음 ‘ㅓ’와 받침소리를 두고 있고, 알파벳 에프(F)의 대응 글자로 자음 피읖을 쓰는 게 일반적이다. 그럼에도 ‘자이언트’가 ‘쟈이안트’로, ‘패밀리’가 ‘훼미리(훼밀리)’로, ‘할리’가 ‘허리’로 불리고 적혔다.

만약 누군가가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져 온 일본어 잔재의 영향이 이리도 억세다’라고 해석한다면 나는 이견 없이 동의할 수 있다. 일리 있는 견해라고 본다. 그러면서도 조심스레 한마디 얹어 보고 싶다. 동시대 현대인들이 무식하고 무지해서 일본식 영어 발음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다기보다는, 그저 살아왔던 대로 살아갔던 것일 뿐이라고 말이다. 더군다나 모든 영단어가 일본식으로 사용되었던 것도 아니다. ‘빠떼리’(배터리), ‘사라다’(샐러드), ‘고로께’(크로켓) 같은 대중적(?) 낱말들 한편에, 고쁘(コップ)도 고히(コーヒー)도 페또(ペット)도 아닌 ‘컵’과 ‘커피’와 ‘페트’라는 우리말식 외래어 표기가 병용되었으니.

현재 시각으로 보면 조금은 별나지만, 표준어 규정이 견고해지기 전의 일상적인 생활상이다. 언어 정책의 과도기라 해야 할까. 우리나라에 외래어 표기법이 제정된 시기가 1986년 1월이다. 이제 고작 40년쯤이 지났다.

외래어 표기에 대한 내 단상은 (좀 뜬금없지만) 우리나라의 제사⋅차례 문화와도 연계된다. 어동육서, 좌포우혜, 조율이시, 홍동백서 등이 『주자가례』를 비롯한 유교 경전 그 어디에도 안 나오는 무근거한 상차림이란 사실이 이제는 언론 보도를 통해 널리 알려졌지만, 또한 유교 전통 문화를 보존하는 성균관의례정립위원회가 ‘명절 때 전 안 부쳐도 되고 음식 가짓수는 최대 아홉’이라고도 발표했지만, 그럼에도 한사코 옛 방식을 고수하는 분들을 후세대가 아예 배척한다거나 모질게 비난하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다. 그분들이 살아 온 생애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옳고 그름의 판단과는 별개로, 어쨌거나 그분들은 ‘홍동백서의 세상’ 속에서 자기 삶과 가정을 꾸려 온 개별자들이니까. 그분들에게는 그 ‘비표준의 세계’야말로 추억 속 낙원일 테니. 근엄한 명분(조상님 모시기)과 엄격한 규칙(홍동백서 등등)을 내세우지만, 본질은 저마다의 낙원을 교자상 위에나마 재현해 보려는 노스탤지어 아니려나.

외래어 표기법 제정 이전에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낸 세대라면 아무래도 ‘화니’와 ‘에리쟈베스’를 ‘퍼니’와 ‘엘리자베스’로 바꿔 부르기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비표준임을 알면서도 끝내 ‘홍동백서의 세상’을 내려놓지 못하는 오늘날 제주(祭主) 가정들처럼.

‘허리’를 ‘할리’로 고쳐 쓴다고 해서 ‘허리우드’와 함께 자라고 늙어 온 개별의 삶들까지 교정 대상으로 삼을 수는 없다. 그건 너무 매정한 처사다. 나부터도 주윤발(周潤發)과 장국영(張國榮)을 외래어 표기법—표준 중국어 발음인 보통화(普通話)를 한글로 적고 읽는 것—에 따라 ‘저우룬파’, ‘장궈룽’으로 호명하는 게 영 어색하다. 그런데 또 장자이(章子怡)와 진개가(陳凱歌)는 ‘장쯔이’, ‘천카이거’로 부르는 게 편하다. 나 또한 구습의 추억을 간직한 장년층인 것이다.

‘할리우드’만을 허용하는 표준의 사회 어딘가에, ‘허리우드’라는 작고 해진 세상이 여태 남아 있다. ‘할리’여야 할 ‘허리’를 그대로 놓아 두었을 뿐인데, 한 세대 이상의 모든 은빛 삶들을 차별 없이 정중히 모시겠다는 격조와 너그러움이 읽힌다. 완벽주의자의 원고에서 오탈자를 발견하고 얼마간 인간미를 느끼듯, ‘허리의 낙원’ 앞에서 괜스레 안심하게 된다. 표준도 괜찮고 비표준이어도 나무라지 않는 곳. 대립도 분별도 다 잊고 그저 영화 한 편 감상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성소. 언젠가 나도 저 영화적 낙원에 깃드는 상상을 해 보며⋯⋯ 다시 종로3가 찌갯집으로 돌아갔다.

메뉴판에 ‘알고니 볶음’이라 적힌 안주를 주문한다. ‘알고니’는 ‘곤이’의 비표준어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그야말로 아저씨답게 쩝쩝 소주를 마셨던 어느 40대의 겨울 저녁.






사진수필 『평일의 의식의 흐름』(2025)

- 글과 사진. 임재훈

- 저자 소개. 포트폴리오 /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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