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의 의식의 흐름. 겨울] #22
1월부터 업무 미팅이 잡혔다. 장소는 서울 종로의 북촌. 회사 다닐 때 연을 맺은 그래픽 디자이너 K가 본인의 클라이언트인 한 전시 기획사 측에 나를 추천했다고 한다. K가 동료 디자이너와 함께하는 전시 굿즈 제작 과업에 이른바 ‘스토리 작가’로서 참여하게 된 것.
K에게 받은 초대권으로 미팅 전 전시장에 먼저 들렀다. 빛이 완전히 차단된 암흑 속 경로를 오로지 귀 기울이고 더듬고 냄새 맡아 가며 통과하는 약 90분간의 체험전. 쉽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해 냈다. 나뿐만 아니라 관객 누구라도 해 내게끔 조성된 공간이다. 앞이 안 보이면 섣불리 움직이려들지 않는 다분히 시각 의존적인 몸의 의지가 서서히 청각, 촉각, 후각으로 분산된다. 그 작용을 이끌어 내 주는 존재가 보이지 않게(목소리로) 동행한다. 일명 ‘로드 마스터’라 불리는 전시 길잡이다. 물리적 길뿐만 아니라 머릿속 상상의 영역까지 펼쳐 주는 조력자다.
눈으로 본 것은 하나도 없지만 나는 분명히 어떤 세계에 갔었다. 깜깜나라를 이리저리 헤맨 게 아니라, 컬러풀한 별세상을 신나게 구경하고 나온 느낌. 어둠이 이토록 화려한 색이었나⋯⋯ 라는 감탄을 하면서 마침내 눈을 떴다. 명순응이 야기한 약간의 어지럼증마저 전시의 연장인 듯 황홀했다.
이윽고 이어진 미팅. 디자이너인 K와 동료, 스토리 작가인 나, 그리고 세 사람의 맞은편에 앉은 전시 기획사 대표님과 이사님. 두 분에게서 점자 명함 한 장씩과, 전시장 안의 로드 마스터처럼 정온하고 또렷한 인사말을 건네받았다. 나를 잘 느껴 주실 수 있도록 최대한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과 역량을 활짝 펼치려고 애썼다.
공책, 마그넷, 머그잔, 에코백, 연필, 엽서, 책갈피, 패브릭 포스터 등 10여 종에 대한 소개 글을 쓴다. 각각의 상품성을 부각하되, 그 모든 물성들이 전시 고유의 기획 의도와 정체성의 산물임을 분명히 밝힌다. 스토어 사이트의 상세 페이지 자체가 또 다른 전시 콘텐츠로 느껴지도록 스토리텔링을 한다. ⋯⋯하기로 결정되었다. 내게 선물처럼 날아든 새해 첫 일감.
올해도 지난해와 썩 다르지 않을 것 같다. 갑자기 들이닥치는 원고 수정 요청, 뜻밖의 일거리 제안 등등에 의연히 대처하며 나아가야 한다. 번듯한 신년 계획은 감불생심, 당장 내일의 저녁 약속조차 지키기 난망한 상황의 반복. 이 같은 변동성 이슈는 나 같은 프리랜서뿐 아니라 직장인들도 무시로 겪는 다반사다. 즉, 나처럼 사는 사람이 나만은 아니라는 사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그 숱한 타인들을 감각하는 연습을 해야겠다. 새해 목표다. 눈에 띄지 않을 뿐 틀림없이 앞으로 내딛는 중인 그들의 존재를 잘 느끼고 싶어서다. 미래는 저시정(低視程)의 오늘에선 도무지 전망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의 동료애와 유대감은 내가 노력만 한다면 귀에 들리고 피부와 코끝에 닿을 수 있다. 비록 신원 미상이고 익명일지라도 그렇게 내게 와 닿는 타인들의 자취가 나를 머뭇대지 않도록 자극할 것이다. 로드 마스터와 나눈 어둠 속의 대화가 그랬듯.
사진수필 『평일의 의식의 흐름』(2025)
- 글과 사진. 임재훈
※ 『평일의 의식의 흐름』 브런치북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편으로 분재됩니다. 각 계절당 25편의 글과 그보다 많은 사진들을 실을 계획입니다. 혹시 모를 무단 전재 및 배포 행위를 예방하고자 브런치북에는 원본 사진이 아닌 해상도(용량)를 줄이고 텍스타일 효과를 입힌 사본을 게재합니다. 추후 출간 작업이 진행되면 출판사와 원본 사진들을 공유할 계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