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의 의식의 흐름. 겨울] #20
눈이 많이 오기도 했는데 무엇보다도 예쁘게 내려앉았다. 매일 보는 동네가 순식간에 딴 세상이 되었다. 먼산주름의 눈봉우리까지 내다볼 필요도 없이, 창문 너머 집 앞 골목길과 대로변만 슬쩍 일별해도 흰빛 절경에 눈이 부시다. 건물 밖 눈세계가 사람들을 부른다. 평일 오후 네 시경, 거리마다 눈 밟으러 나온 이들이 크고 작은 발자국을 남기고 있다. 참으로 실례되는 말이나, 나를 포함한 그 모두가 동물들 같다. 다들 도톰한 패딩이나 털외투를 껴입은 데다 목도리, 장갑, 비니까지 착용한 모습이라, 몽실몽실한 포유류의 이미지를 상상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러한 외형보다는 뭐랄까, 눈길 위에서 지어 보이는 몸짓과 표정 자체가 동물 같다. ‘지금 너무 좋아’라는 감정이 확연이 드러난다. 하루의 첫 산책을 앞두고 현관문 앞에서 폴짝폴짝하는 강아지,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 등허리 쫙 펴고 기지개 켜는 고양이를 보는 느낌이다. 저마다 맘속에 품은 걱정거리야 분명 한두 개씩은 있겠지만 적어도 오늘만큼은, 눈 쌓인 이 길을 걷는 동안에만은 복잡다단한 생활인의 사정이 순진무구한 동물성—‘일단은 마냥 좋기만 한’ 단순성에 의해 잠재워지는 듯하다.
겨울에 ‘첫눈’을 기다리고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기대하는 심리 또한 인간에게 내재된 동물성의 발현일지도 모르겠다, 라는 생각을 해 본다. 좋아하는 소설인 잭 런던의 『야성의 부름(Call of Wild)』이 떠오르기도 한다. 평생 사람 곁에서 자라 온 65킬로그램 몸집의 대형견이 덜컥 알래스카 야생에 던져지고, 험난한 생존의 여정을 지속하며 시나브로 제 안의 야성을 깨워 나간다는 줄거리. 친구나 애인에게 ‘밖에 좀 봐. 올겨울 첫눈이다!’ 같은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20년 후 첫눈 내리는 날 그때 그 장소에서 다시 만나기로 해’ 류의 낭만주의 대사를 한 번쯤은 들어봤으며, 기상 캐스터들은 설렘 가득한 얼굴로 화이트 크리스마스 가능성을 예보한다. 나는 이 모든 한겨울 일상사가 사람의 동물성, 즉 인간 고유의 야성에 기인한다고 본다. 본디 우리는 첫눈만 봐도 두근거리고, 눈 오는 날 밖에 나가는 게 그저 좋은, 그런 단순한 동물이었던 거다. 나날의 복잡스러운 문제와 사정을 헤쳐 나가느라 골머리를 앓지만, 실은 우리도 ‘눈의 부름(Call of Snow)’에 응답할 줄 아는 야성적 존재라는 사실. 그러니 눈이 부르면, 당장 나가도 된다는 얘기.
사진수필 『평일의 의식의 흐름』(2025)
- 글과 사진. 임재훈
※ 『평일의 의식의 흐름』 브런치북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편으로 분재됩니다. 각 계절당 25편의 글과 그보다 많은 사진들을 실을 계획입니다. 혹시 모를 무단 전재 및 배포 행위를 예방하고자 브런치북에는 원본 사진이 아닌 해상도(용량)를 줄이고 텍스타일 효과를 입힌 사본을 게재합니다. 추후 출간 작업이 진행되면 출판사와 원본 사진들을 공유할 계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