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레드 스피도'
파리 올림픽 기간에 맞춰 미국 극작가 루카스 나스의 ‘레드 스피도(Red Speedo)’가 런던 리치먼드에 위치한 오렌지 트리 극장에 올랐다. 자칭 ‘독립극장의 강자’를 표방하는 오렌지 트리 극장은 영국 예술위원회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지 않고, 티켓 판매와 기부금으로 운영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1971년 선술집에서의 공연을 시작으로, 1991년 지금의 위치(리치먼드)로 이전해 다양한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180석의 작은 규모임에도 극장의 열기는 런던 웨스트엔드의 어느 극장보다 뜨겁다.
극장은 무대 바닥에서부터 2층 벽면, 객석 기둥까지 모두 파란색으로 칠해져 있어 마치 실내 수영장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준다. 천장에는 무늬가 있는 유리 패널이 설치되어 있는데, 빛이 굴절되어 마치 물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듯한 효과를 연출한다. 무대 한쪽에는 수영장으로 들어가는 수직 계단이 설치되어 있고, 빨간색 판자 위에 하얀색 글자로 ‘레드 스피도’라는 공연 제목이 적혀 있다.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로이 오비슨의 ‘유 갓 잇(You Got It)’이 크게 울려 퍼지며 반복된다.
빨간색 판자를 치우자, 가로로 긴 형태의 물이 채워진 수영장이 드러난다. 무대가 밝아지고, 등부터 허벅지까지 커다란 용 문신을 새긴 수영 선수 레이가 수영장에 걸터앉아 작은 당근을 씹어먹는다. 그는 유명 스포츠용품 회사인 ‘스피도’와 스폰서십 계약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계약 하루 전날 수영장 라커룸 냉장고에서 경기력 향상 약물이 발견되고 만다. 레이의 형이자 매니저 역할을 하는 피터와 코치, 그리고 전 여자친구인 리디아 사이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관계가 극의 갈등을 증폭시킨다. 각자의 이유로 레이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과정에서 서로의 욕망과 가치가 충돌한다.
이십 대 중반의 레이는 아내도, 아이도, 집도 없다. 때로는 잘 곳이 없어 라커룸에서 잠을 청하기도 한다. 잃을 것이 없는 레이와 달리, 피터에게는 지켜야할 것이 너무나 많다. 레이의 성공은 피터가 변호사에서 스포츠 에이전트로 전향할 기회를 제공할 것이고, 딸을 사립학교에 보내 미국 사회에서 살아남게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줄 것이다.
레이가 아무리 노력해도 한계를 넘지 못하던 시기에 운동 치료사인 리디아는 그에게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의 수치가 수영 속도 차이에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한다. 예시로 선수들의 손가락 길이를 비교하며, 천연 재료로 만든 약물을 제안한다. 레이가 선수 감축에서 살아남기 위해 약물의 도움을 받았을 때, 세상은 비로소 그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피터는 레이의 약물 복용 사실이 발각될까 노심초사하며 이를 어떻게든 은폐하려고 애쓴다. 형제의 갈등은 레이의 전 여자친구 문제로 최고조에 달한다. 레이는 머리를 부딪혀 피를 흘리고, 분노와 절망 속에서 피터의 머리를 수영장 물속으로 강하게 밀어 넣는다. 피가 흐르고 물이 튀는 강렬한 이미지는 형제간의 대립과 폭발하는 감정을 생생하게 드러내며 극의 긴장감을 끌어올린다.
루카스 나스는 이번 프로덕션의 프로그램 북에서 ‘공평한 경쟁의 장이란 무엇일까’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해 ‘레드 스피도’를 썼다고 밝혔다. ‘레드 스피도’는 초연된 지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시의적절한 극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작품은 우승이라는 목표를 향한 치열한 경쟁 속에서 약물 사용에 따른 윤리적 갈등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이는 자본과 힘이 승리에 미치는 영향을 드러낸다.
최근 국내에서 재연된 ‘크리스천스’(6.25~7.13/두산아트센터 Space111)의 극작가로도 널리 알려진 루카스 나스는 인물의 내면 갈등을 치밀하게 묘사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레드 스피도’ 역시 이러한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 이 작품은 승리의 기회가 자본과 힘을 가진 이들에게 더 쉽게 주어지는 현실을 짚으며, 치열한 경쟁 속에서 개인이 마주하는 윤리적 갈등을 탐구한다. 최근 나이키가 내건 ‘승리는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는 광고 문구는 이 연극에서도 유효하다.
작가는 희곡 앞부분에 캐릭터와 배경을 설명하면서 희곡 문법을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 말 줄임표(…)는 생각의 짧은 순간을, 줄 바꿈은 숨을 돌릴 기회를 의미한다. 대시 기호(-)는 멈추지 않는 유동성을 강조하는데, 스타카토가 아닌 흐름을 유지하는 데 중점을 둔다. 작가는 인물의 숨결까지도 계산해 희곡을 썼고, 연출가 매슈 던스터는 이러한 작가의 의도를 무대에 잘 살려냈다. 특히 희곡에는 없었던, 레이가 수영장에 들어가 오랫동안 물속 깊숙이 가라앉아 있던 장면은 관객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작품은 90분 동안 빨간색 삼각 수영복 하나만 걸친 레이의 모습을 통해 그의 내면에 숨겨진 연약한 면모를 표현한다. 이는 객석이 무대와 맞닿아 관객과 배우 사이의 거리가 가깝고, 배우가 숨을 곳이 없는 4면 객석 구조를 가진 오렌지 트리 극장에서 더욱 극대화됐다. 수영 선수의 다져진 몸과 등판에 새겨진 커다란 용 문신은 강인한 육체를 상징한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승리라는 부담을 안고 있는 연약한 한 명의 인간이 존재할 뿐이었다.
글 정재은(영국 통신원) 사진 오렌지 트리 극장, images by Johan Persson
* 월간 객석 2024년 9월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