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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큐, 낯선 사람

마트에서 받은 위로

by 정재은

둘째 아이의 일곱 번째 생일. 런던에 와서 처음 맞는 생일이다. 첫째 아이 생일은 이곳에 온 지 한 달 정도 되었던 때라 그야말로 정신없이 지나갔다. 둘째는 미리부터 자기 생일을 살뜰히 챙기기도 했고 나도 약간 여유가 생겨 집에 풍선 장식도 해주었다. 어제저녁에는 미역국이며 계란찜, 옥수수 구이에 딸기까지 둘째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생일상을 차려주었다. 오늘은 교복에 Birthday Boy라는 배지를 달고 신나게 학교에 갔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나서 생일 케이크를 사러 갔다. 프랑스 빵집 PAUL 케이크는 무려 40파운드나 했다. 아이가 좋아하는 딸기가 가득 들어 있긴 했지만 무언가 녹아내린듯한 초록 젤리가 덮인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곳을 나와 마트로 향했다. 케이크 유통 기한이 열흘 정도로 넉넉한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생일 기분을 내는 것이니 일 년에 하루쯤은 방부제를 먹어도 괜찮겠지라고 위안을 삼았다.


서울이었으면 파리***에서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망설임 없이 골랐을 것이다. 둘째가 좋아하는 딸기로 장식되어 있고 빵도 촉촉하고 크림도 부드럽고 맛있으니까. 지금 살고 있는 동네에서는 케이크 선택의 폭이 넓지 않다. 물론 미리 주문해서 맞춤형 케이크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고 시내에 나가면 부드럽고 폭신한 케이크를 살 수도 있겠지만, 미안하다 애미가 그럴 여력은 없었다.


제법 규모가 있는 마트에 가니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축구공 모양이나, 색색깔 스프링클이 잔뜩 붙어 있는 화려한 케이크도 있었다. 애벌레 모양을 한 기다란 롤케이크, 예쁜 색깔을 뽐내는 레드 벨벳 케이크도 있었다. 무지개색으로 꾸며진 것은 화려하고 예뻤지만 색소가 걱정되었고 하얀 아이싱 위에 별로 장식된 것도 귀엽긴 했지만 아이들이 잘 먹을 것 같지가 않았다.


이것저것 따지며 한참을 보고 있는데 옆에 나처럼 케이크를 고르는 분이 계셨다. 그분도 나처럼 케이크를 들었다 놨다 하며 신중하게 고르고 있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케이크를 집어 들었는데 그분도 거의 동시에 같은 케이크를 골랐고, 눈이 마주쳤다!


"네 생일이니?"

"제 아들 생일이에요."

"몇 번째 생일이야?"

"7살이에요."

"생일이 오늘이야? 아름다운 날에 태어났구나. 오늘 내 58번째 생일이야!"

"어머나! 생일 축하해요!"


영국 사는 사람들도 동양인 나이를 가늠하기 어렵다지만 나도 그들의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곱게 화장하고 가늘고 선명하게 그려 넣은 아이라인의 여인은 40대 후반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전혀 그 나이로 보이지 않아요!' '믿을 수 없어요!'라고 말하려고 머릿속에서 열심히 영어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네 아들 생일도 축하해. 그리고 너도 당연히 축하를 받아야 해. 그동안 애썼어."


갑자기 나에게까지 전해주신 축하에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손을 흔들며 돌아서시는데 대고 겨우 'Thank you very much'라는 식상한 인사밖에 못했다. 그렇지만 진심으로 감사했다.




가족과 함께 런던으로 떠나온 지 어느덧 아홉 달이 지났다. 이곳에 오기 전에도 그랬듯이 어떤 날은 좋았고, 마음이 힘들고 슬픈 날도 있었다. 낯선 땅에 있음이 여행하는 것 같아 기쁘기도, 익숙한 것이 그립기도 했다. 잠들려 뒤척이던 시간 대신 나도 모르는 사이 잠에 빠지는, 긴장되고 피곤했던 날들을 지나왔다. 가을에 도착해 춥고 배고팠던 겨울을 버텨냈고, 봄을 누리다 곧 여름이 되었다. 영국 사람들이 모두 활기차고 밝아지는 마법 같은 계절, 여름.


글을 써야지 하며 미루다 보니 어느덧 이렇게 많은 시간이 지났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몰라서 또 며칠이 흘러갔다. 아직 영어로 말하고 쓰는 연습을 더 많이 해야 하지만 익숙한 나의 모국어로 기록하고 싶었다. 언젠가 내 글을 쓴다면 꼭 인용하려고 저장해 놓은 문장이 있었다.


당신은 무얼 하고 있었나요, 하고 묻는다면, 그녀는 애매한 얼굴로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다고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매일 저녁 음식을 만들고 접시들과 컵들을 씻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서 세상 속으로 내보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남은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게 사라졌습니다.
이 모든 한없이 흐릿한 삶들이 기록되어야 해요,

-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새움/여지희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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