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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상 커피의 맛

제가 금요일에 커피를 빚졌어요

by 정재은

런던에서 내가 다니고 있는 학교는 시내 여기저기에 캠퍼스가 흩어져 있다. 학생증으로 어느 캠퍼스든 출입할 수 있어서 이곳저곳을 탐험해 봤다. 그중에서도 워털루 캠퍼스가 기차역에서도 가깝고 내부도 쾌적해 보였다. 도서관 규모도 컸고 카페와 카페테리아도 있었다. 수업이 없는 금요일에 그곳 도서관에 갔다.


그날은 집에서 싸간 샌드위치랑 같이 먹으려고 카페에서 아메리카노 한잔을 주문했다. 영국 신용카드를 만들기 전이라서 단말기에 한국 신용카드를 꽂고 결제되기를 기다렸다. 커피가 먼저 나왔다. 카드를 제거하라는 표시를 보고 카드를 뽑아서 뜨거운 커피를 조심스럽게 들고 돌아섰다.


그런데 아주머니가 '너 아직 커피 값을 지불하지 않았어'라며 나를 불러 세웠다. 커피를 내려놓고 다시 카드를 꽂는데, 단말기 창에 뭐라고 뜨는 말을 다 읽기도 전에 화면이 바뀌었고 다시 카드를 제거하라고 떴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어제까지도 잘 썼던 카드라고 말했다. 다시 시도했지만 안 됐다. 커피는 김을 모락모락 피우며 계산대 앞에 놓여 있었다. 그날따라 여분의 카드도 비상금도 없었다. 서울 같았으면 얼른 폰으로 계좌이체라도 했을 텐데 당황스러웠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서 있는데 아주머니는 “내일 와”라고 하셨다. 그러더니 “아니 월요일에”라고 다시 말했다. 주말에는 쉬는 모양이었다. '여긴 내 캠퍼스가 아니어서…'라고 말할 처지가 아니었다. 거듭 땡큐라고 말하고 커피를 가지고 나왔다.




월요일 아침이 되자마자 결제가 안 됐던 다른 신용카드와 또 다른 신용카드, 작은 단위 지폐와 동전까지 챙겨서 워털루 캠퍼스로 갔다. 카페는 이미 열려 있었다. 그런데! 금요일의 그 아주머니가 안 계셨다. 계산대로 가다가 돌아 나왔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지? 뭐라고 말해야 하지? 갚지 말까?' 잠시 고민하다가 할 말을 번역기에 돌려보고 다시 카페로 들어갔다.


키 큰 아저씨께 “제가 금요일에 커피를 빚졌어요. I owe you a coffee on Friday.”라고 했다. 과연 내 말을 알아들었을까? 나의 우려와는 다르게, 너무나 쿨하게 무슨 메뉴였냐 물었다. 레귤러 사이즈 아메리카노라 답하고 주섬주섬 준비해 온 동전을 꺼내는데 카드밖에 안 된다고 했다. 또 결제가 안되면 어쩌나 떨리는 맘으로 신용카드를 꽂았다. 다행히 이 카드로는 무사히 결제가 됐다. 영수증이 출력되어 나왔고 거기에 서명을 해서 아저씨께 드렸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오늘을 위한 커피'를 주문하겠다고 말했다. 같은 아메리카노였는데 이상하게도, 금요일에 마셨던 그 맛이 아니었다. 외상 커피는 유난히 구수하고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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