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큐, 낯선 사람들
2022년 10월, 그러니까 런던에 온 지 겨우 일주일이 조금 지났을 때였다. 집은 입주 날짜가 되지 않아 에어비앤비에 머물고 있었다. 지하철이나 기차, 버스 노선이 익숙하지 않아 검색에 의존해 학교며 숙소를 찾아다녔다. 수업이 없는 날 도서관에 가려고 아침 일찍 에어비앤비를 나섰다.
기차 파업에 대해 들었지만 간헐적으로 다니기는 한다는 안내를 확인하고 플랫폼으로 올라갔다. 다음 기차는 08:17에 플랫폼 4로 온다는 안내를 확인한 것이 07:44분이었다. 너무 일찍 도착한 탓에 역에는 한참 동안 아무도 없었다. 비에 젖지 않은 의자를 찾아 앉아 있었다. 기온은 그리 낮지 않은데도 너무 춥게 느껴져 패딩 점퍼 후드를 뒤집어썼다.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해 기차 올 때가 되었나 보다 짐작했다. 긴 금발머리 여자가 급히 계단 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고도 그냥 있었다.
기찻길을 사이 두고 맞은편 플랫폼에 서 있던 한 청년이 뭐라고 나에게 말을 걸었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 들었다. 그냥 나는 워털루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I want to go to Waterloo!! 청년이 무어라고 다시 말했다. 내가 못 알아듣는 것 같으니 손짓으로 자기 발 밑을 가리켰다. 플랫폼이 바뀐 모양이었다. 둘러보니 내가 서 있던 플랫폼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플랫폼 전광판 시계에는 08:16:08이 표시되어 있었다. 1분도 채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뛰었다. 계단을 내려가 반대편 플랫폼 계단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반쯤 올라갔을 때 기차 오는 소리가 들렸다. 뛰어오르는데 체력의 한계가 훅 느껴졌다. 안돼 타야 해. 삼십 분이나 기다렸는데 더 기다릴 수는 없어. 계단을 두 개씩 뛰어올랐다. 플랫폼에 올라섰을 때 기차 문이 열렸다. 사람들을 따라 무사히 기차에 탔다. 나를 구원해 준 이름 모를 청년에게 감사를.
도서관에서 나와 조금 걷다가 내가 사려고 했던 물병을 전시해 놓은 상점을 발견했다. 학교에서 다른 학생이 필터가 있는 물병에 수돗물을 받아 마시는 것이 그렇게 좋아 보였다. 무겁게 집에서부터 물을 싸들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니! 저 물병을 꼭 사야겠다고 생각했었다. 바로 그 가게에 들어갔다. 이 상점에는 도시락통도 있을 것 같아 설렜다. 그동안 마땅한 통이 없어 점심거리를 포일에 싸서 지퍼백에 넣어 다녔던 터였다. 샌드위치는 가끔 눌리거나 찌그러졌고, 다른 음식은 가지고 다니기가 어려웠다. 흔하디 흔했던 반찬통이 이렇게 구하기 어려울 줄이야.
서울 집엔 있었지만 가져오지 못한 아쉬운 물건들, 토스터기며 믹서기 와플기계 등을 구경했다. 맨 안쪽 구석에서 플라스틱 통을 발견했다. 점심을 싸가지고 다니기 적당한 크기를 골랐다. 식기세척기와 전자레인지에 쓸 수 있는지도 확인했다. 기쁜 마음으로 납작한 통 두 개와 물병을 계산했다. 물건을 받아 들고 가게를 나서려는데 갑자기 도난경보음이 울렸다. 요란스러운 경보음 사이로 방금 계산을 해준 직원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별 일 아니라는 듯 눈짓으로 그냥 가라고 했다. 고맙다고 하고 가게를 나왔다.
새로 산 도시락통에 뭘 싸갈까 고민하는 데 마침 마트가 보였다. 들어갈 때 아까 울렸던 도난경보음이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망했다.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을 때 안으로 들어오지 말고 그냥 돌아서서 나갈걸.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마트 안에서 마땅히 뭘 고르지도 못하고 서성였다. 역시나 출구로 나오는데 경보음이 시끄럽게 울렸다. 키가 크고 거대한 가드 아저씨가 내 쇼핑백을 열어 들여다봤다. 얼어붙은 나는 "내가 전 가게에서 물건을 샀는데…"라고 중얼거렸다. 영수증을 받았던 게 떠올라서 그걸 보여주려고 주머니를 더듬었다. 아저씨는 쇼핑백을 여며 나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는 두툼한 손으로 내 어깨를 두드리며 "노 프라블럼"하고 미소 지어 줬다. 짧은 순간 어찌나 긴장했던지 "땡큐"가 절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