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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no Apr 16. 2024

나는 메트로폴리탄의 경비원입니다

패트릭 브링리 - 웅진 지식하우스





  별빛도 아직 잠들어있는 새벽, 버스를 타고 온 세상을 깨우듯 소란스레 서울에 왔다. 혜화역 3번 출구에서 진료시간에 늦을까 봐 숨이 턱에 차다 못해 심장이 터지게 뛰었는데 료는 5분도 안돼서 끝나니 허탈해진다. 무리하게 달려서인지 걸을 때마다 발바닥이 찌를 듯이 아프다. 료를 기다리며 한번 더 읽게 된 책이 이 시간에 대한 보상이랄까?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앉아 그들을 바라본다. 군가는 앞으로의 삶을 조금 더 온전히 누릴 수 있도록, 누군가는 옆에 있는 이의 마지막을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서 이곳을 고 있다. 처방전이 적힌 종이들을 펄럭이며 지나는 사람들, 그들의 손에 들린 처방전대로의 약으로 해결될 수 있는 모두 다 가벼운 병들이면 좋겠다.


 모든 인간의 끝은 정해져 있지만 끝을 향해 가는 시간의 질을 다르게 만들기 위한 노력들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이 곳은 인공이 다 다른 영화들을 다른 배속으로 재생시켜 놓은 것 같다. 온갖 표정의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패트릭 브링리의 <나는 메트로폴리탄의 경비원입니다>란 책을 다시 펼친다. 








 누구보다 우애가 돈독했던 두 살 위 형을 암으로 잃게 된 그는 <뉴요커>를 그만두고 2008년 6월,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는 세상에서 빠져나가 온종일 오로지 아름답기만 한 세상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속임수가 가능한' 곳,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취직한다. 그곳에서 자신이 만난 사람들과 위대한 예술작품에 대해 기록한 10년 간의 시간이 내 손에 펼쳐진다.

  


글 초반부에 그가 피터르 브뤼헐의 1565년 작 <곡물수확>에 매료되던 장면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근본적으로 예술만이 가진 특별한 힘에 반응하듯 그 위대한 그림에 반응했다. 다시 말해서 그림의 위대한 아름다움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음에도 이미 그것을 충분히 경험한 것이다. 그때는 내가 느낀 감상을 말로는 분출할 수 없었다. 사실 할 수 있는 말이 별로 없었다. 그 그림의 아름다움은 언어적인 것이 아니라 물감과도 같이 과묵하고 직접적이며 물체적이어서 생각으로 번역하는 것조차 거부하는 듯했다. 그래서 그림에 대한 나의 반응은 새 한 마리가 가슴속에서 퍼덕이듯 내 안에 갇혀 있었다. 그 감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 p.30











 아름다움을 느끼는 섬세한 촉수가 있으나 그걸 어떻게 글로 표현해야할 지 몰랐던 패트릭은 박물관에서 근무하며 수많은 작품들과 내면의 대화를 하며 자신의 생각들을 다듬어간다. 다양한 전시실을 순례하듯 돌며 형의 죽음으로 상실해 버린 자신의 삶의 방향성을 찾아나가는 날들은 느리게 배를 밀고 나가는 한 마리의 달팽이를 지켜보는 기분이 들게 만든다. 폴리에스테르 재질의 남색 제복을 입고 세상의 시계와 다르게 걷는 넓은 마음과 커다란 귀를 가진 달팽 사유는 깊고 넓고 다정하다.




 아메리카 전시관의 분수대 앞에서 한 어머니가 아이에게 동전 두 닢을 건네며 말한다. "하나는 네 소원을 위해서, 다른 하나는 네 소원만큼 간절한 다른 누군가의 소원을 위해서." 이런 말은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데 나는 듣자마자 언젠가 내 아이들에게 똑같이 말해주리라 결심한다. p.143


카메라 뒤의 남자는 그가 현실을 더 꽉 움켜쥐고 있는 기분이 들 것이다. 손 틈새로 금세 빠져나가버릴 순간을 온전히 경험하는 건 어려운 일이니까. 우리는 소유, 이를테면 주머니에 넣어갈 수 있는 무언가를 원한다. 하지만 아름다운 것은 주머니에 들어가지 않고, 우리가 보고 경험하는 것 중에서 아주 작은 부분만 소유할 수 있다면? 이런 생각에 이르자 갑자기 전시실 안의 낯선 사람들이 엄청나게 아름다워 보인다. 선한 얼굴, 매끄러운 걸음걸이, 감정의 높낮이, 생생한 표정들. 그들은 어머니의 과거를 닮은 딸이고, 아들의 미래를 닮은 아버지다. 그들은 어리고, 늙고, 청춘이고, 시들어가고, 모든 면에서 실존한다. 나는 눈을 관찰 도구로 삼기 위해 부릅뜬다. 눈이 연필이고 마음은 공책이다. p.152


 하지만 내가 뜻밖으로 느꼈던 것은 거장의 '지문'을 그토록 부자연스럽고, 일그러지고, 불완전하고, 초보적인 것에서 발견했다는 사실이다. 완벽한 외양을 갖춘 완성품만으로는 예술에 대한 배움이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 작품들이 탄생하는 과정에 들어간 고통을 잊지 않아야 한다. 자기 자신이 무언가를 어떻게 만들어낼지 궁리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의 창작물을 보는 데서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사실 평생 처음으로 나도 뭔가를 만들어가고 있는 느낌이 든다. 엄청나게 무질서하고 즉흥적인 과정을 밟으면서 두 명의 작은 인간과 그들이 살아갔으면 하는 작은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결코 완벽하지도, 완성할 수도 없는 프로젝트겠지만 말이다. p.275



 사람들이 바다처럼 몰려가 맡겨뒀던 옷을 찾아 입고, 지도를 보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세상을 떠나 일상과 삶으로 돌아가는 수순을 밟고 있다. 많은 경우 예술은 우리가 세상이 그대로 멈춰 섰으면 하는 순간에서 비롯한다. 너무도 아름답거나, 진실되거나, 장엄하거나, 슬픈 나머지 삶을 계속하면서는 그냥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순간 말이다. 예술가들은 그 덧없는 순간들을 기록해서 시간이 멈춘 것처럼 보이도록 한다. 그들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것들은 덧없이 흘러가버리지 않고 세대를 거듭하도록 계속 아름답고, 진실되고, 장엄하고, 슬프고, 기쁜 것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고 믿게 해 준다. p.324









 내 이름의 처방전을 받고, 다음번 예약일을 확인하고 병원을 나섰다. 터덜터덜 심술 난 아이처럼 뒤꿈치에 힘을 주며 걷던 걸음의 템포를 바꾼다. 패트릭 브링리의 눈앞에서 미술관을 나서던 사람들의 모습 떠올랐. 퐁퐁, 작은 말풍선처럼 떠오른 장면장면들이 징검다리가 되어 내 발 앞에 놓인다. 아름다움과 현실 사이, 웅장한 문의 입구에서 자신이 마주한 거장들의 작품들을 마음에 품고 돌아서 나오는 이들의 마음에 어떤 감동이 담겨있었을지 궁금해진다.



 삶은 우연히 만드는 무늬들로 이루어진 퀼트작품이 아닌가! 바늘을 든 나는 헤르미온느의 시계가 없는고로 앱을 열어 버스 시간을 뒤로 미루고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향한다. 절뚝여도 괜찮다. 봄꽃이 피어나 재잘대는 입구를 지나 나를 맞이하는 풍경을 본다. 제일 먼저 확인하는 제복. 일단 경비원 제복은 우리가 압승이다. 깔끔한 양복을 입고 들어가는 입구를 지키고 서 있는 분들의 모습이 뭐랄까, 조금 더 부내가 난다고 할까? 하지만 책 속에서처럼 다가가 무언가 묻고 싶은 마음은 생기지 않는다. 조급해 보이고 성말라 보이기에 섣불리 말을 걸어 볼 생각은 접고, 2층 사유의 방으로 향한다.



 둡고 긴 복도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붉은 사암에 드리운 노을빛이 방 전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한쪽 다리를 다른 쪽 무릎 위에 얹고 손가락을 뺨에 댄 채 생각에 잠긴 반가사유상의 모습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간다. 일월식 보관과 연화관의 서로 다른 머리 장식과 정교한 손 끝, 유려하게 흘러내리는 보드란 곡선의 치맛자락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한참을 서성인다. 보고 또 보고. 오가는 사람들이 내 옷깃을 스치고 공기를 흐트러뜨리는 순간에도 온전히 몰입한다. 불상의 감긴 두 눈이 그리던 세상의 어디쯤을 떠올려보며 책 속에 묘사된 것처럼 위대한 예술작품이 우리를 사로잡는 순간의 감동을 마음껏 누려본다. 파란 제복의 달팽이가 전해 준 말이 고스란히 내게 스민다. 의 책속에서 묘사된 사진을 찍던 관람객처럼, 잠시나마 소유할 수 있는 아름다움의 조각들을 열심히 그러모은다.

 













* 같이 듣고 싶은 곡


림스키코르사코프 : 세헤라자데


https://youtu.be/6exoB7IW8qw?si=S_FOkKLdCarW1og8

















#나는메트로폴리탄의경비원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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