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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no May 28. 2024

우리가 작별 인사를 할 때마다

마거릿 렌클 - 을유문화사








영화 기쿠지로의 여름에 나온 곡, "Summer"이 귓가에 흐릅니다. 산 초입에 이르는 길까지 오는 동안 열어 둔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초여름의 공기는 상냥하고 부드러운 입김을 닮아 있습니다.

나만의 애착장소라는 것이 있죠. 아메리카 북부 평원에서 살았던 라코타족은 블랙힐즈라는 언덕을 부족민들의 애착장소로 삼고 신성시 여겼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이곳은 생명의 힘이 솟아나는, 자신들의 모체인 곳이죠. 힘이 들고 어려운 일이 생겨 마음이 괴로울 때면 항상 이곳으로 달려가 앉자 깊은 묵상과 함께 마음속 그늘을 걷어내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제게도 애착장소가 있습니다. 일을 하는 곰보빵(사무실을 부르는 저만의 애칭)과 어릴 적 살았던 동네의 산, 바다입니다. 마음이 번잡하고 소란한 날에 찾아들면 언제나 넉넉한 품으로 저를 정화시켜 주는 소중한 존재이죠.

특히 이 나무와 나무 옆에 놓인 나무계단을 지나 만나는 작은 평원이 참 좋습니다. 이곳에 오면 숨을 더 크게 내쉴 수 있거든요.







 유년의 기억들과 성인이 되어 갈수록 더 귀중해지는 자연에서의 아름다운 순간들에 대해 기록한 마거릿 렌클의 <우리가 작별 인사를 할 때마다>란 책이 있습니다. 2015년 뉴욕타임스에 칼럼 연재를 시작하며 올린 글들이 묶여 발행된 이 책으로 그녀는 많은 주목을 받게 되죠. 우리들 마음의 향수를 자극하고, 잊고 있던 가장 따뜻한 날들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아름다운 일화들이 가득합니다. 산에 올라 저만의 애착나무 아래 조그만 돗자리를 깔고 앉아 햇살이 종이 위에 만드는 무늬들을 손가락으로 더듬어가며 읽는 순간이 참 행복하더군요.



 세상은 여기서 살아가기 위해 내가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 매일 가르쳐 주고 있다.
너무 많은 움직임의 소용돌이 속에서,
움직이지 않고 고요하게 있기.
조용히 하기.
귀 기울이기.
                                   - p. 182



 너의 생일이다. 너의 생일은 항상 10월의 가장 멋진 날에 찾아온다. 비록 그날이 평일이어도 너는 너의 윙윙거리는 기계들과 너의 견해들을 한쪽으로 제쳐 둘 시간을 찾아내야 한다.

(중략)

 그리고 네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걷는 동안, 아마도 땅이 너를 길로, 너의 손을 잡은 채 떨어지는 나뭇잎을 가리켜 보이는 어린아이에게로 다시 끌어당길 것이다. 봄에 새로 돋아난 풀 색깔을 띤, 좀개부리밥이 떠다니는 습지로. 축축한 개울 후미진 곳에서 들려오는 응답 없는 외로운 개구리의 울음소리로, 묵주 구슬처럼 검은 통나무 위에 줄지어 앉아 햇볕을 쬐는 거북이들에게로. 나무 꼭대기 높은 곳에서 신랄하게 입씨름하는 까마귀와 큰어치에게로. 애인이 미소 띤 얼굴로 눈을 떼지 않고 응시하는 동안 벤치에 앉아 격렬한 몸짓을 하며 이야기하는, 의수를 한 젊은 여자에게로.

 그리고 아마도 너는 그 어느 독수리보다 아름다운 날개를 가진, 하늘을 선회하는 두 마리의 독수리를 볼 것이다. 그러는 내내 나뭇잎이 나뭇가지에서 축복처럼 너에게 떨어져 내릴 것이다.
                                        - p. 300




 
퇴락의 광휘를 몇 번이고 되풀이해 나 자신에게 가르쳐야 한다. 파랑새가 마지막으로 쿠퍼매를 만난 소나무 아래 짙은 청색 깃털이 부유한다.

 겨울이라 말라서 창백하게 바스락거리는 부들레이아 잎들 위에, 사용한 못들이 뒤죽박죽으로 널려 있다. 잎마름병으로 시든 장미, 검게 변하고 죽음에 이를 정도로 무시무시한, 지금은 지난해 여름 그곳에 자리 잡은 홍관조 둥지라는 훌륭한 건축물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얽히고설킨 장미 줄기들.

 사그라드는 햇빛 속 불꽃처럼 빛을 떨쳐 내는 거실 피아노 위에 쌓인 먼지, 그리고 한 번의 긴 한숨 앞에 날려 가는 백합 꽃잎들.
                              - p. 298











 마거릿 렌클의 글은 한쪽에 한 편 정도로 짧은 글들이 이어집니다. 작가의 모계 가계도를 펼치며 마치 누군가의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순식간에 글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한 편, 한 편이 계절을 따라 다양한 소재와 일화들을 통해 마치 자수를 놓듯 유려하게 그려집니다. 그리고 책 속 등장하는 삽화들이 정말 아름답습니다. 그녀의 가족이 그린 그림이라죠. 따뜻한 색감들로 이루어진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마음이 보송보송 맑아지는 기분이 듭니다.



 저도 이런 글을 쓰고 싶어요. 누군가 책을 열고 가던 길도 잊어버린 채 앉아 한참을 읽게 만드는 글을요. 오랜 기간 연재를 통해 시선은 더욱 날카롭게 연마되고 언어는 정교해진 그녀의 글을 통해 많이 배웁니다. 



 블랙베리 윈터 Blackberry Winter라는 말이 나옵니다. 미국 남부, 중서부 지방에 나타나는 겨울처럼 추운 봄을 일컫는 말이죠. 블랙베리가 개화하는 시기와 겹쳐서 이렇게 부른다죠. 우리들 일상에서 뜻하지 않은 서리와 같은 일들이 몰려와 마음이 힘들다면, 마음속 짐을 내려놓지 못해 그 무게로 삶이 기울어져 있다면 잠시 멈추고 마음속 가장 따뜻한 날들을 환원시키며 힘을 내보는 시간을 가지시면 어떨까요? 이 책과 함께요.




 여러분의 귀한 하루하루를 마음 다해 응원합니다. 지금 여기, 숲 속에서 울고 있는 작은 종달새가 되어서요. 아니... 음... 저기... 많이 통통해진 종달새가 되어서요. 빛으로만 걸으셔요. 꼭이요.










* 같이 듣고 싶은 곡


영화 기쿠지로의 여름 o.s.t , Summer


https://youtu.be/yTw4R2bucL8?si=mM3L-ZpG_REkYsJd







#우리가작별인사를할때마다

#마가렛렌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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