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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no May 21. 2024

언어의 온도

이기주 - 말글터




빠아아아앙-


 경적을 울리며 앞차를 주시한다. 비상등을 켠 채 브레이크를 연속적으로 밟는다. 그 소리에 놀라 잠에 깬 엄마의 몸이 앞으로 쏠리지 않게 한 손으로 뒤로 밀며 막는다. 앞차를 피할 공간이 있는지 좌우를 살피지만 온통 커다란 트럭들이 달려오고 있다. 이대로 죽는 걸까, 이 사이에 끼면 앞차가 포터인지라 뒷부분이 나와 엄마가 탄 차의 어디까지 밀려들어올지, 높낮이를 계산했을 때 우리가 피할 의자 밑 공간이라도 생길지 계산한다. 없다.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식은땀이 난다.



 새벽이어도 유독 많은 차로 앞차와의 안전거리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며 운전 중이었는데, 피할 수 없는 거대한 장애물을 만나버렸다. 천운이랄까? 내 뒤에서 오던 차가 내가 켜 둔 비상등에 속도를 늦추는 것이 보인다. 제발, 제발... 간절한 바람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다. 그때였다 포터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앞차가 정말 기가 막히게도 뒤로 유턴하듯 오른편으로 돌아 시흥 IC출구 쪽으로 슬금슬금 기어가듯 운전을 한다. 갑작스레 멈춰버린 포터 운전자가 삿대질을 하며 그 차에게 욕을 하는 것이 포터 뒤 창문으로 보인다. 출구를 놓친 차가 만든 이 황당한 일로 엄마의 앞가슴을 꽉 쥐고 있던 나 역시 육두문자를 쏟아낸다.


 

 "야, 우리 오징어 될 뻔했네! 욕이 아주 찰지네. 누구헌티 배웠다냐. 가슴은 놓고 얘기혀! 아파, 지지배야!"


 내 손을 탁 치는 엄마의 야멸찬 손길에 정신이 든다. 앞자락이 구겨진 옷을 대충 펴드리며 정신을 차리고 운전을 시작했지만, 한번 놀라서 굳어버린 몸이 쉽게 진정이 되지 않는다. 그렇게 놀란 내 모습을 진정시켜주고 싶었는지 옆에서 엄마께서 하시는 말씀,


"죽으면 죽는 거지. 오징어 안 됐으니 된 거 아녀? 았냐?"


 엄마는 짓궂으시다. 언변도 거침없고, 가끔 욕쟁이 할머니로 빙의해 가게 오는 손님들과 기세 좋게 입담으로 싸울 만큼 호전적이기도 하다. 나이 들어 기세가 꺾여간다고 하지만 한 번씩 희한한 말들로 내 기함을 토하게 만든다. 그런데 지금 이 사건을 두고 논하는 엄마의 말에 되려 내 맘이 상해버렸다.


"엄마, 우리 지금 정말 죽을 뻔했어. 나는 이 짧은 순간 엄마를 어떻게 숨기고 살려야 하나 별 생각을 다했어. 엄마 병원 모시고 다니면서 별 일 다 겪지만, 객사는 예외상황이거든. 그런데 지금 그 말 내게 위로가 하나도 안돼. 말 좀 이쁘게 하면 안 돼?그리고 나 욕, 다 엄마한테 배운거거든요?"


"지는 이쁘게 하는 줄 알아. 맨날 퉁박만 주는 것이!"


 엄마의 말로 우리 둘 사이는 대략 40분 가까이 침묵이 흘렀다. 같은 말로 마음을 전하는데 우리는 어떻게 이렇게 서툴고 매번 속이 상하는 말을 하는 걸까? 서로의 습관적인 말들을 바꿀 방법은 없을까?












 얼마 전 스승의 날 선물로 롤링페이퍼와 수제 치즈케이크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가르쳐 온 나의 황금돼지들(현재 고2)이 전해 준 마음에 감동을 받아 <언어의 온도>라는 책을 한 권씩 선물해 주었죠. 170만 부 기념에디션이란 타이틀이 붙은 책, 직접 받은 아이들이 쉽게 잘 읽혔는지 감상문 비슷한 장문의 편지들을 보내옵니다. 숙제 전송은 잘 잊어버리는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감상문을 보내다니, 놀라운 일입니다.



 편지 속 아이들을 한 명 한 명 떠올려 봅니다. 코로나로 인해 몇 년간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며 수업해 온 아이들이 언제 이렇게 자라서 자신들의 진로를 걱정하고 고민하는지, 그 마음이 온전히 게 닿으니 한 명 한 명이 더 소중하고 귀하게 가오네요.



 서로 표현하지 못했던 마음들이 정성스레 쓴 언어들로 옷을 입고 다가와 마음에 안기면 그 안에 피어나는 말꽃들이 마음밭을 얼마나 풍성하고 다채롭고 따뜻하게 만드는지. <언어의 온도>라는 책을 통해서 말의 귀함을 다시 한번 느꼈기에 선물로 주고 이리 흐뭇한 마음을 누려보는 중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가슴속에 낙원을 품고 살아간다. 우리는 그것을 꿈이라고 부른다. 낙원에 도달하려면 일단 떠나야 한다. 어떻게? 호기심이라는 배에 올라 스스로 물음을 던지고 자신만의 길을 찾는 수밖에.(중략)
 호기심이 싹틀 때 "원래 그렇다"는 말로 억누르지 않았으면 한다. 삶의 진보는, 대개 사소한 질문에서 비롯된다.  p.98





 어제는 노트북을 켜고 '사람'을 입력하려다 실수로 '삶'을 쳤다. 그러고 보니 '사람'에서 슬며시 받침을 바꾸면 '사랑'이 되고 '사람'에서 은밀하게 모음을 빼면 '삶'이 된다.

 몇몇 언어학자는 사람, 사랑, 삶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같은 본류本流를 만나게 된다고 주장한다. 세 단어 모두 하나의 어원에서 파생했다는 것이다. 세 단어가 닮아서일까. 사랑에 얽매이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도, 사랑이 끼어들지 않는 삶도 없는 듯하다. 삶의 본질에 대해 우린 다양한 해석을 내놓거나 음미하기를 좋아한다.

 헤밍웨이는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으나 패배하지는 않는다"라고 했고 어느 작가는 "작은 인연과 오해를 풀기 위해 사는 것이 인생"이라고 읊조렸다.

 "우린 다른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영화 대사도 한 번쯤 되새길 만하다.

 나는 어렵게 이야기하기보다 '사람' '사랑' '삶', 이 세 단어의 유사성을 토대로 말하고 싶다. 사람이 사랑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것, 그게 바로, 삶이 아닐까? p.122




'앎'은 '퇴적'과 '침식'을 동시에 당한다. 살아가면서 자연스레 알게 되는 지식이 있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깎이고 떨어져 나가는 지식도 많다. 공부는 끝이 없다는 뻔한 말이 새삼 무겁게 다가오는 경우도 많다. 여전히 모르는 게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특히 그렇다. -p.202









 다시 오늘로 돌아옵니다. 일상이 바쁘다는 이유로 엄마와 깊게 대화를 하는 시간이 드물죠. 오늘처럼 새벽 3시에 일어나 차로 모시고 병원을 오갈 때가 어쩌면 가장 깊은 속의 말들을 꺼낼 수 있는 날이기에 특별히 엄마의 상태나 얼굴빛, 내게 전하는 말들에 를 기울이려고 노력합니다. 



 이런 날의 엄마는 꼭 맥동변광성 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하나하나, 자기 인생에서 빛나는 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별들은 별빛이 늘 같은 밝기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때때로 변한다더군요. 그렇게 변하는 별들을 맥동변관성이라고 하는데, 엄마의 삶에서 지금은 소멸로 향해가는 조용하고 지루한 날들 사이 어디쯤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반짝임 사이 쏟아져 나오는 축척된 삶의 지혜들을 받아먹으며  또한 엄마의 빛을 받아와 반짝이고 있는 별이기에 출렁이는 별빛을 눈에 담는 순간들을 더 귀하게 여기자 다짐해 봅니다. 쩌겠습니까? 예민해진 달팽이 촉수를 가만히 뒤로 눕힐 수밖에요.  




 

 
"여행은 도시와 시간을 이어주는 일이다. 그러나 내게 가장 아름답고 철학적인 여행은 그렇게 머무는 사이 생겨나는 틈이다.
                        - 폴 발레리


 밑줄 그을 만한 문장들이다. 이들의 이야기처럼, 우린 목적지에 닿을 때보다 지나치는 길목에서 더 소중한 것을 얻곤 한다. 어쩌면 여행의 궁극적인 목적은 '도착'이 아니라 '과정'인지도 모른다. (중략) 어디 여행뿐이랴. 인간의 감정이 그렇고 관계가 그러한 듯하다. 돌이켜보면 날 누군가에게 데려간 것도, 언제나 도착이 아닌 과정이었다. 스침과 흩어짐이 날 그 사람에게 안내했던 것 같다. -p.251






 여행 같은 하루라 생각합니다.

서로의 말의 온도를 심장에 가장 가까운 온도로 맞추며 물드는 시간이 되어 귀를 기울이고 싶어요. <언어의 온도>를 통해 한 발자국 다가설 수 있는 작은 징검다리를 놓아두는 날,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의 온도는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심장에 가장 가까운 온도였길, 바랍니다.



 






* 같이 듣고 싶은 곡


적재 : 별 보러 가자

https://youtu.be/Mz031oU0Xfw?si=FapKkYIRP7lOugbw















#정영주화가

#22년학고재전시

#Another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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