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같다면

15화

by Bono


눈앞의 세상은 암흑이다. 무릎에 눌린 눈자위 속 감은 눈. 더 깊은 어둠을 향해 수직으로 낙하하다 희미하게 스며든 빛에 춤을 춘다. 눈물이 투명하게 부풀린 인식의 장막 뒤에 숨어 리아는 참고 있던 슬픔을 쏟아내고 있다. 상실로 인해 느끼던 공허와 아픔을 눈물로 흘려보내는 일이 가장 헛된 일이라 생각했다. 그런 그녀가 긴 숨처럼 흘려보내는 눈물이 바지 위로 회색 얼룩을 만들고 있다. 얼룩의 그림자가 얼마나 커져야 지금 자신이 느끼는 마음이 사라질지 답을 할 수 없다.


자박자박, 멀리서부터 희미하게 들리던 발자국 소리가 그녀 앞에서 멈춘다.


“여기 있을 줄 알았어요. 말해주지 않아도 알 것 같다는 이 마음이 뭔지 알아요? 완벽한 타인인데, 타인이 아닌. 내가 아닌데 나인 것 같은. 낯설고도 친숙한 느낌의 간극. 나는 깨어난 순간부터 당신에게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감정으로 혼란스러워요.”


정준의 목소리였다. 잔뜩 잠긴 목소리는 휘태에게 소리치던 순간의 여파인 듯하다. 리트리버가 으르렁거림을 멈추니 커다란 늑대가 되었다. 가볍게 까불거리다 폭발적으로 화를 내던 정준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아서인지 마치 그가 얼굴에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놓은 변검처럼 느껴진다. 한 톤 낮아진 목소리와 분위기가 전혀 다른 사람인 듯 다가온다. 리아는 눈물이 멈춘 걸 인지하지 못한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보지 말아요. 처음 보는 것처럼. 나는 너를 전혀 모르겠는데, 넌 누구야? 뭐 이런 식의 눈빛. 그거 굉장히 기분 나빠요. 사람이 자신이 아닌 타인을 매우 잘 알고 있다는 착각을 버려야 한다니까?”


리아는 정준의 심통 어린 목소리에 발끈해 저도 모르게 대답한다.


“정말 모르는 사람 맞거든요? 아무나 붙들고 그쪽은 안녕하시냐고 손 흔들어요?”


리아의 가시 돋친 대답에 정준이 멈칫하며 물러선다.


“개복치 또 등장이네. 말 한마디에도 톡 쏘며 혼자 기절하면서 무슨 용기로 정우, 그쪽의 정우란 놈의 말에 동의를 하고, 심지어 미리 나를 보러 와요?”


정준이 자신을 가리켜 말하는 개복치라는 단어에 리아는 뱃살이 통통한, 지느러미가 거대한 한 마리 물고기가 되어 해변가에서 아가미를 펄떡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갈 곳을 잃어버린 생명체. 스스로의 마음의 감옥에 갇혀버린 존재는 어디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리아는 눈을 좁혀 뜨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음영진 그림자의 얼굴을 응시했다. 잔뜩 미간을 찌푸린 정준의 얼굴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다. 분노가 어느 정도 걷힌 얼굴에는 혼란이 가득하다.


“나는 인간과 자아. 이 둘은 분리할 수 없는 것들이라 생각해요. 어떤 순간에도. 온전히 개별적인 존재의 완성을 이루기 위해 살아야 하는 게 우리니까. 나라는 존재가 태어나서 성장하며 죽기까지. 어떤 누구의 개입도 허락지 않는, 심지어 신의 주사위도 필요치 않는 최선을 다해 삶을 살아가는 인간으로만 살기를 바랐거든요.”

누구나 그런 삶을 바라지 않을까. 저 먼 하늘 위에서 삼신할매의 점지로 엉덩이에 달고 나오는 하늘의 낙인인 몽고반점. 신의 인장이 사라지고 다시 하늘을 우러러보는 순간까지. 온전히 자기 의지로 살아가는 삶의 완결점을 향해 모두가 매일을 달리고 있지 않을까. 제주로 날아오기 전까지 자신의 모습도 별반 다를 바 없는 삶이었기에 정준의 말에 불편한 심사를 감추지 않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또, 또. 그 눈빛. 그래서 어쩌라고? 이런 눈빛을 내게 하면 억울하다니까요. 그런 삶에 지금 변곡점을 만들었다고! 당신과 당신의 정우란 놈이. 내가 의도하지 않은, 생각지도 못했던 변곡점. 나한테 폭탄을 던져놓고 도망친 사람이 누구더라? 그리고 아주 멀리나 가지. 그나마도 바로 코 앞에 숨고.”


“원래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거든요? 그리고 누가 따라오래요? 나는 여기서 나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거든요. 누. 구. 의. 방해도 없이요. 하다못해 갯강구의 방해도 받고 싶지 않았단 말이죠. 아, 성질 더러운 리트리버의 방해도요.”


“아, 이제 갯강구에... 바퀴벌레처럼 생긴 갯강구에. 하! 리트리버! 아무리 족보 있다 하더라도 비글미 쩌는 개에 비교까지 당하고. 지금 그 말, 나한테 한 거 맞죠? 이건 저격인데. 아주 그냥 주몽이세요. 주몽. 쏘면 쏘는 대로 맞추는 주몽.”


리아는 정준의 비유에 뜬금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삼국 신화의 전설 속 인물이 정준의 입으로 소환되는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는 황금빛 개구리 금와왕의 등에 올라 진지한 표정으로 활시위를 당기는 어린 소년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왼쪽 눈을 지그시 감고 팽팽하게 활시위를 당긴 소년의 볼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다. 그를 태운 개구리는 폴짝거리며 뜀박질을 하는데도 한치의 요동도 없이 진중한 표정으로 앞을 보고 있다. 선명한 이미지에 놀라 숨을 들이켠 순간, 눈앞은 가뭇 거리며 반짝이는 태양의 잔불로 붉게 물든 바다가 펼쳐져 있다.


“나는 내내 당신이 궁금했어요. 오랜 잠에서 깨어나 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내 앞에서 울면서 사라지던 당신의 뒷모습을 꿈에서 계속 만나고. 그리고 우연처럼 이곳에서 당신을 보던 날. 처음으로 미친 듯이 알고 싶고, 안고 싶은 존재가 있을 수 있다는 걸 인정하게 됐거든. 그동안 많은 사람들과 만났어요. 사랑이란 감정이 무엇인가 알고 싶어 미쳤던 때도 있었고.”


“도파민의 분출이 남달랐나 봐요. 달리도 아니고, 금사빠인가. 보자마자 사랑에 빠지는 뇌파가 방사형으로 뿜뿜 뿜어져 나오는?”


정준의 말에 리아는 어색함을 감추지 못해 모난 돌로 받아친다. 헛스윙을 해도 발목정도에는 타격을 줄 것 같은 리아의 말. 정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눈을 응시하다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는다. 눈높이가 비슷해진 그들. 리아는 깜짝 놀라 뒤로 몸을 물리지만, 등대의 계단 높은 턱에 등이 부딪히며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한 번도. 사랑이란 감정이 내게 쉬웠던 적은 없어요. 저 사람과 나의 연결고리. 감정으로 연결된 순간부터 생기는 책임감부터 상대에게 무언가 만족을 주어야 한다는 점. 내가 책임져야 하는 존재들이 세상에 늘어났다는 것은 굉장히 큰 중압감으로 다가올 때가 많았든요. 그런 것들이 결국 관계를 힘들게 하는 요소가 되었구요. 그래도 이런 모든 것들이 다 소중한 거 아닌가? 딱 한번 장난처럼. 그래요. 뿔 난 김에 가장 몹쓸 말들로 장난을 쳤던 그날 아침만 예외라고 할게요. 장난친 거 정말로 미안해요. 이건 순도 백퍼 진심이에요.”


리아는 진지한 그의 말과 눈빛에 놀라 자신이 눈물, 콧물 흘려가며 울고 있던 중이란 것도 잊고 정준을 응시했다. 어린아이처럼 볼은 젖어 그를 바라보고 있는 리아를 응시하던 정준은 손을 내밀어 그녀의 볼을 가만히 감싸 쥔다. 손바닥에 닿는 그녀의 온기와 볼을 물들인 물기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자신이 찾아오기까지 혼자 울고 있던 그녀의 외로운 시간이 손바닥에 그대로 새겨진다. 파닥거리며 작게 박동하는 심장을 가진 새를 손에 올린 듯, 모든 것이 조심스러워진다.


“형이 말하더군요. 내 의지대로 깨어났든, 외부의 어떤 존재가 개입되었든. 내가 다시 깨어나 이 세상을 내 몸과 의지로 만나고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축복이라구요. 누군가는 간절히 바란 시간일 수도 있는데 그걸 부인하고 있는 건 어리석은 거라구요.”


정준은 그 말을 하다 멈칫한다. 이 순간부터 그의 발화는 리아와 정준만의 것이 아닌 형태로 오픈된다.


“나는 내게 주어진 삶을 사랑하며 살기로 마음먹었어요. 아직도 사고 당일 내 품에서 사라진 존재를 떠올리며 악몽을 꾸지만. 내가 영원히 침대 위의 번데기로 살아가다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소리를 지르며 깨어나기도 하지만. 거기에다가 이젠 내 의지가 아닌 어떤 전지전능한 존재의 개입으로 내가 깨어났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이 있지만.”


정준은 천천히 엄지손가락으로 리아의 볼에 남아있는 물기를 닦아내며 그녀를 응시한다. 흐트러짐 없이 자신에게 쏟아지는 눈빛이 뜨겁고 무거워 리아는 밭은 숨을 내쉰다.


“지금 이렇게 내가 다시 깨어나 일상을 누릴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기로 마음먹었어요. 삶이 너무도 간절하던 누나의 낙서를 다시 보게 만든. 당신 때문인지도 몰라요. 내 앞에서 울다가 사라진 긴 꼬리의 북극여우 같은. 개복치 같은 당신 때문이죠. 이유도 모르게 머릿속을 맴돌던, 당신. 당신 때문에. 이것도 정우가 의도한 건가?”


정준이 다른 손을 내밀어 리아의 반대편 볼을 감싸 쥔다. 커다란 손에 감싸인 리아는 처음 느껴보는 온기에 놀라 목을 움츠린다. 보통 때라면 양손을 걷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한바탕 쏘아붙일 것 같은 상대의 행동에 아무 말 못 하고 그의 눈빛을 응시한다.









해가 진 시간, 잘게 흩어진 볕이 전부인 곳에서 정준의 홍채가 또렷하게 리아의 눈에 새겨진다. 작은 구의 완벽한 형체가 자신을 향해 열린다. 어둠에 익숙해져 서서히 커지는 그의 눈동자 속 홍채와 함께 자신의 모습이 온전히 담기는 순간을 목도하는 중이다.


“정우. 당신의 정우가 내 안에 있는지, 없는지. 그걸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잖아. 그러려면 나한테 최대한 가까이 닿아있어야 확인해볼 수 있을 텐데. 불쾌감을 넘어선 호기심 때문에라도. 알아야겠어. 나를 깨운 정체를. 지금 그는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당신에 대해서도. 더 깊이.”


정우의 존재를 인정하며 정우의 행동과 정우의 행방에 대해 정말로 궁금해하는 정준을 보자 리아는 자신의 방어막이 해제되는 걸 느꼈다. 허언증이 아니냐 몰아붙이던 모습이 사라지고 진중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를 위로하는 정준의 손길에 어깨에서 힘이 빠지며 비로소 긴 숨이 흘러나온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길에서 긴장이 사라진 걸 알아챈 정준이 가만히 리아의 얼굴을 감싼 손을 앞으로 당기며 그녀를 일으킨다.


처음으로 온전히 나란히 마주 선 그들. 먼 데서 밀려온 파도가 두드리는 방파제의 물결 소리만 쉼 없이 정적을 깨우고 어둠으로 숨어든 작은 생명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소리를 함께 듣는다. 영원할 것 같은 고요한 응시 끝에 정준은 가만히 고개를 내려 그녀의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포갠다. 보드랍게 눌리는 살갗의 감촉, 놀란 리아의 숨소리와 함께 벌어진 입술을 가만히 베어 문다.


저릿하게 몰려오는 아랫배의 통증과 함께 온몸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른다. 볼을 감싼 손을 내려 그녀의 등을 안고 가까이 끌어당긴다. 바람 한 조각 스며들 틈이 없이 온통 자신으로 그녀를 감싸고 싶은 강렬한 욕망이 밀려온다. 연리지처럼 얽혀 이대로 밤을 지새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 손과 몸에 힘이 들어간다. 지금, 그녀와 이 모든 감촉과 느낌을 나누고 있는 사람이 자신이라 확신하자 숨소리가 거칠어진다.


“리아, 나 좀 봐요.”


갑작스러운 정준의 입맞춤에 어린 소녀처럼 허둥거리는 리아를 부르며 정준은 그녀와 눈을 맞춘다.


“나예요. 지금 이 순간, 당신과 이 모든 것들을 나누고 있는 사람. 바로 나예요. 잊지 마요.”


정준이 의미하는 말을 알아차린 리아가 잠시 당황하는 표정을 지으며 몸을 떼내려 하자 정준은 더 강하게 그녀를 끌어안고 입을 맞춘다. 몸이 먼저 기억하는 사랑이라도 시작하고 싶다. 혼자 울고 있던 순간의 고독을 잠시라도 잊어버리게 만들어주고 싶다는 마음이 마음속에 파고든다. 고요하던 하늘에서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한다. 마치 알껍질을 두드리는 것처럼 조심스레 떨어지는 빗방울 사이 정준은 리아의 눈을 응시하며 속삭인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요. 우리. 정우라는 이름 빼고. 당신과 나. 온전히 우리 둘로.”








* 같이 듣고 싶은 곡


정우 - LETTER


https://youtu.be/JSynIocUCZQ?si=6pgAX8_HyNYmzo_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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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