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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by 봄단풍


제일 늦게 온 사람이 뻔뻔하게도 버스에 가장 먼저 오를 때가 많았고, 그런 사람은 꼭 마지막 자리를 쟁취하고 오래도록 가는 것이다.




정류장에는 눈이 내렸고, 나는 혼자였다.


얄밉게도 전광판은 그 어느 때보다 선명했다. 다른 버스들의 예상 도착시간이 한 자리일 때, 하필 내가 기다리는 버스가 도착하려면 15분이나 남았을 때. 밤 열한시가 넘은 시각, 다른 대안을 찾기에도 어려웠다. 나는 점점 차가워지는 발끝을 오므리며 버스가 오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렸다.


기다리는 사이 사람들은 하나 둘 늘어났다. 나보다 늦게 왔는데도 바로 자신의 버스를 타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 벌써 두 번이나 지나쳐 간 버스도 있었다. 인생 참 불공평하지. 평소 같았으면 그냥 지나쳤을 일인데도 내 입가에서는 나지막이 욕이 흘러나왔다.


몇 분의 시간이 더 흘렀다. 정류장에 사람들은 늘었지만 딱히 외로움이 가시지는 않았다. 오히려 분했다. 지금 몇 대의 버스가 지나가고도 남아있는 사람은 필시 나와 같은 버스를 기다리는 것일 텐데, 누구는 10분 넘게 발을 동동 구르고 누구는 헐레벌떡 뛰어온 숨 고르기도 전에 버스를 탈 테니까. 아니 자기가 늦게 왔으면 뒤에 줄이라도 서야하는 거 아냐? 왜 버스 정류장에서는 줄을 안 서는 거야?


눈발은 거세졌다. 98년도 컴퓨터의 화면보호기마냥, 어두운 하늘 도화지 삼아 소복이 내리는 눈은 없었다. 한 여름 모기마냥 얼굴에 다닥다닥 달라붙는 눈은 점점 따가워졌다. 그리고 그 내리는 눈 너머, 드디어 내가 기다리는 버스가 도착했다. 혼자 숙제를 마치고 간 수업시간에 선생님의 확인을 기다리는 모범생처럼, 나는 주머니속에서 미리 꺼내 둔 카드를 만지작거리며 버스가 멈추길 기다렸다.


물론 그마저도 내 맘처럼 되지 않았다. 버스는 정류장 한참 앞에 멈추더니 아무렇지 않게 문을 열었고, 기다리던 사람들은 우르르 몰려가 새로 줄을 만들었다. 또 마음 한구석 울컥, 화가 치솟았지만 나는 꾹 참고 줄을 섰다. 맨 뒤였다.


『잔액이 부족합니다.』


버스에 오르고 나서도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 같은 느낌에 나는 두꺼운 잠바 안으로 턱을 깊숙이 파묻었다. 밖은 추웠고 손끝과 발끝은 여전히 시려운데 얼굴만은 화끈거렸다. 하루종일 감지 않은 정수리 부근이 열이 올라오는 것처럼 간지러웠다. 얼른 몸을 숨기러 자리를 찾았지만, 마침 버스에 마련된 의자와 사람 수는 딱 맞아 떨어졌다. 나 빼고. 머리로 쏠린 열기를 한숨으로 뱉어내며, 나는 뒷 문 가까운 쪽의 손잡이를 잡았다.


돌아보면 늘 그랬다. 내가 얼마나 오래 기다렸든, 얼마나 힘들게 기다렸든, 또 다른 곳에 눈도 돌리지 않고 전광판 대기시간만 줄어들길 바라며 카드도 미리 꺼내두고 배낭을 앞으로 멨어도, 그 오랜 기다림 끝에 도착한 버스에 제일 늦게 오를 때가 많았다. 제일 늦게 온 사람이 뻔뻔하게도 버스에 가장 먼저 오를 때가 많았고, 그런 사람은 꼭 마지막 자리를 쟁취하고 오래도록 가는 것이다.


모르지, 그 사람도 늦은 시간에 버스를 탔으니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 하지만 본래 타인의 삶은 눈에 보이는 게 전부인 법이다. 그 이상은 어차피 내게 의미가 없으니까.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나는 분개하고, 분하고, 억울하고, 대상 없는 짜증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창문을 열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내게 남은 건 그런 감정의 찌꺼기들 뿐이었다.


어느새 밖의 눈은 그쳤고, 나는 버스에서 홀로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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