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했다.”
중요한 일을 치르고 나오면 입버릇처럼 내뱉던 말이었다. 망했다. 언제부터 이런 말이 입에 붙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귀신에게 잡혀갈까봐 아이의 이름을 개똥이나 못난이라 짓는 것과 비슷한 마음으로, 부디 망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망했다라고 한 것인지도 몰랐다. 어쩌면 마음에 들지 않는 결과가 발표됐을 때 충격을 줄이기 위해 미리 밑밥을 까는 것인지도 몰랐다.
아무튼 중요한 건, 이번에는 그런 의도와 상관없는 사실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는 것이 문제였다. 정말로. 며칠간 밤새워 준비했던 예상 질문, 답변, 거울을 보며 한참 가다듬었던 목소리와 표정. 마음처럼 흘러나온 건 한 한글자도 없었다. 불과 몇 시간 전의 내 목소리가 떠오를 때마다 나는 화장실에 앉아있을 때처럼 몇 번이고 몸서리를 쳐야했다.
“잘 보고 왔어?”
열린 방문 너머로 나지막한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그럼요. 방문을 마저 천천히 열며 나는 힘없이 대답했다. 요리를 하시던 중이었는지 소매를 잔뜩 걷어붙인 할머니의 손가락 끝에서는 투명한 국물이 뚝뚝 떨어졌다.
“무김치를 좀 담갔다.”
며칠 전 할머니는 뜬금없이 무를 사오셨다. 백화점도 슈퍼도 아닌 길에서. 어쩌면 할머니보다도 어렸을 아주머니로부터, 매연 자욱하게 배었을 무를 양 손에 한 봉지씩 사들고 오신 것이다. 차라리 마트를 다녀오시지 그랬어요, 할머니. 귀찮음과 핀잔이 섞인 그 말에 할머니는 멋쩍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할아버지 생각이 나서.』
그 말씀에 차마 토를 달 수가 없어서, 나는 냉장고 구석에 자리를 겨우 만들어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던 것이다. 그리고 며칠 동안 냉장고에 있던 그 무는 오늘 겨우 모습을 드러낸 모양이었다. 문득 아직도 옷장 한 쪽 구석 가득하게, 또 가지런하게 걸려있는 할아버지의 옷들이 생각났다.
“뭐 집에 있는 게 없어서……. 그냥 담갔는데. 잘 될지 모르겠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할머니의 표정은 참 밝았다. 얼마나 열심히 담그셨는지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하고 메리야스는 땀으로 범벅인데도, 할머니의 얼굴에는 후련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잘 될거에요.”
할머니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몇 년 전부터 할아버지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어두워졌던 얼굴이었는데. 지금 땀범벅인 그 얼굴에 그늘은 한 조각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 다 잘 될 거다.”
조용한 집 안에 힘겹게 끌리는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느새 방 안에도 새콤한 냄새가 가득했다. 한 겨울 저녁 여섯시, 해는 이미 기울고 창문 너머 이웃집도 새파랗게 물드는 시간. 꺼져있는 방 형광등 스위치를 누르면서, 나는 이미 뒷모습만 보이는 할머니를 나지막히 불렀다.
“할머니, 김치……. 하나만 먹어봐도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