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철이 없구나."
"세상에 맞는 직장이 어딨냐? 맞춰가는 거지."
"너는 그럼 지금 직장인들이 다 우습게 보이냐?"
퇴직. 내가 누군게에게 잘못을 했거나, 상처를 준 뒤에 들은 말이 아니다. 그저 내가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말을 했을 때 가족과 친구를 포함한 주변인들로부터 들은 말이다.
퇴직을 고민하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 하는 일들을 앞으로 십년, 혹은 이십년 동안 해낼 자신이 없었다. 하루 열 두 시간은 가볍게 넘기는 근무시간, 들어온 급여를 따져볼 틈도 없이 일 할 수밖에 없는 업무 강도. 요즘처럼 힘든 시대에 직장을 가지게 되었다는 감사함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회의감이 들어오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루하루 출근이 설레고, 야근이 즐겁고, 피곤함을 뿌듯함으로 달랠 수 있는 직장. 그게 그렇게도 찾기 어려운 걸까?
"그런 건 없으니 포기하는 게 편해."
아는 선배는 그렇게 대답했다. 쉬운 대답이었다.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말이었고, 대단한 무게감을 가지고 한 대답도 아니었으리라.
그리고 내가 바란 것도 그리 대단한 건 아니었다.
내가 하는 일에 확신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언제쯤 찾을 수 있을까가 궁금할 뿐이었다.
문득 억울했다. 내가 내 인생을 사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말을 듣고만 살았구나 싶었다. 항상 현재에 충실하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면서도, 그 현재에 내가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는 귀 기울여 본 적이 없었다. 항상 현실적으로 생각하라는 말에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와 내가 벌게 될 돈을 걱정했으면서도, 내가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사실 역시 현실이라는 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좋아하는 일만 하면서 살 수 있겠니?”
틀린 말은 아니다. 인생 살아가며, 내가 좋아하는 것만 하게 된다면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인생을 살기는 어려울 거다. 하지만, 평생 싫어하는 일만 하는 것보다는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문제는 하나 더 있었다.
내가 좋아하고, 평생 할 만한 일이 뭔지도 잘 모르겠다는 것.
드라마나 영화처럼 고민에 종지부를 찍어주는 누군가의 말 한 마디, 책 어딘가에 적힌 글귀, 혹은 길가다 들은 선율에 실린 가사 한 구절, 그런 것들은 없었다. 고민에 고민에 또 이어진 고민과 고민 끝에 결정은 내가 직접 내려야 했다. 남들이 보기엔 꽤나 만족스러운, 허나 미래가 뻔히 보이는 삶.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어느 방향이든 새로운 미래를 접하게 될 삶. 며칠이 몇 주가 되고, 몇 주가 몇 달이 되고. 불만이 쌓이고 쌓여 점점 그 색이 짙어지면 불안이 자취를 감출만도 한데, 마음 속 걱정의 보따리는 그 용량에 제한이 없는 듯 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이 선택의 고삐를 늦췄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느 날은 무턱대고 산으로 발을 옮겼다. 핸드폰을 들여다 볼 일도 없고, 전광판의 광고를 접할 필요도 없다. 지나치는 나무 하나 하나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도 없고, 그저 묵묵히 걸으면서 머릿 속 책상을 차곡차곡 정리하면 되는 일. 가끔 허리가 쑤시면 멈춰서 하늘을 보고, 빼곡한 나뭇잎 틈새로 비치는 모자이크 너머로 광활하게 펼쳐져있을 모습도 상상해보면서 담담히 발을 옮겼다.
TV에서 꿈을 이룬 유명한 누군가는 말했다. 가망이 없는 꿈은 일찍 내려 놓으라고. 일하면서 즐거운 직장이라는 건 없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제자가 학업의 길에 들어섰을 때보다 취직했을 때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던 건 유명 사립대의 저명한 교수이자 아는 선배였다. '정년까지 다니는 월급쟁이'가 나의 꿈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한 건 우리 아버지였다. 꿈과 행복을 일찌감치 포기하는 것이 어른스럽다하는 세상, 그 둘을 이루는 건 복권 당첨과 다를 바 없다는 세상, 정작 그러면서 다들 퇴근길에 복권 한 두 장씩은 꼭 사보는 세상.
아직은 모르겠다. 나뭇잎 사이 비친 하늘을 가리켜 예쁘다는 사람은 없지만, 그렇다고 하늘 가린 나뭇잎만 보고 산에서 내려오는 등산객도 없다. 사는 것도 비슷하지 않나. '그런 건 없으니 포기해라' 라는 사람보다는, '지금 당장은 안 보이니 땀 좀 빼볼까' 하는 사람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깊은 발자국을 남기는 법이다. 나뭇잎에 하늘이 가려서 보이지 않으니 정상에 가는 걸 일찌감치 포기해라, 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상에서 보이는 풍경을 노래하는 사람과 다가올 밤의 별빛을 노래하는 사람을, 산 중턱 나무 그늘 아래에서 밥집을 차린 사람이 비웃으며 짤랑거리는 돈다발로 등산객의 존경을 산다. 보이지 않는 걸 볼 수 있는 눈, 나무에 가려진 하늘을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한 세상. 자위를 타협과 혼동하지 않는 분별력이 필요한 세상, 물론 그런 것들 없이 값싼 조언을 던지는 것만으로도 존경 받는 요즘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