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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단풍 Apr 30. 2024

기로

A씨 이야기

A씨는 다시 한번 선택의 기로에 섰다. 한 회사의 채용 공고문 앞에서 굳이 다시 한번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은 그가 이전에 퇴직이라는 선택을 했었기 때문이다. 일자리도 없고 실직자도 많은 요즘 시국에 이게 무슨 사치스러운 고민인가 싶겠지만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자신을 위해서도,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서도 새로운 일자리가 절실했던 그가 고민했던 이유는 공개 채용 공고에 적힌 한 문장 때문이었다.   


[연봉: 사천만 원(초봉 이천만 원, 삼 년 뒤 전환 기회 부여)]     


연봉이 사천만 원인데 초봉이 이천만 원이라는 것은 무슨 뜻인지, ‘전환’이 무슨 뜻인지, 그마저도 기회만 부여한다는 문구도 대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서류를 제출하려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그의 구직기간이 계속 길어지고 있었다는 것이요, 둘째는 회사가 그 이름값은 탄탄히 굳히고 있다는 것이었다.     


“유명한 곳이잖아? 설마 그런 말로 장난치겠어?”     


그가 결심을 굳히는 데에는 아내의 응원도 한몫했다. A씨가 이전 직장에서 퇴직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아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온갖 설움을 꾹 참고 회사를 다니던 그가 어느 날 회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눈물을 펑펑 쏟았을 때, 등을 토닥이며 일단 사직서를 내자는 대담한 제안을 먼저 한 것이 바로 그녀였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때야?”  


그리고 이어진 아내의 말은 장난스럽게 건네졌을지언정 A씨가 반박할 수 있는 가벼운 말은 절대 아니었다. 결국 A씨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서류를 제출했다. 이미 수없이 써온 자기소개서와 이력서, 포트폴리오에 몇 가지 증빙서류만 추가하면 되는 일이었기에 지원은 순식간에 끝났다. 물론 A씨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 회사보다 규모는 작지만 아주 조금 더 나은 초봉을 제안하는 다른 회사에도 지원서를 제출했다. 한 달 후 서류합격 및 면접 통보가 왔을 때도 그는 마냥 기뻐하지 못했다. 공고문에 적힌 ‘전환’이 그의 발목을 붙잡은 것이다. 하지만 최종 합격하기 전에 섣불리 딴지를 걸 수는 없었다. 면접에서 감점을 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조심스럽게 물어봐요. 뭘 걱정하는지는 알겠는데, 그 정도는 누구라도 궁금해할 것 같아.”    

 

그에게 다시 한번 용기를 심어준 것은 아내였다. A씨는 자신이 추가로 지원한 회사가 몇 개나 되는지 세어본 뒤 면접에 들어갔다. 이미 이전 직장에서의 경험을 통해 그의 배포는 면접에서 긴장하지 않을 만큼 커져 있었다. 여유 있으면서도 궂은일은 마다하지 않을, 실로 모범적인 신입사원다운 면접을 마친 그는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손을 들었다. 끝나기 직전 주어진 한 번의 자유 발언 기회에 그는 공고문에 적힌 ‘전환 기회 부여’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특별한 결격사유가 없으면 다 전환되실 겁니다.”     


하지만 탈락을 각오한 질문에도 그는 애매한 답변밖에는 받을 수 없었다. 언뜻 들으면 안심할만한 답변이면서도, 생각할수록 영 찝찝한 답변이었다. 여기서 다시 한번 그의 의심을 잠시 눌러준 것은 바로 회사의 이름값이었다. 최악의 상황을 고려하여 회사가 삼 년 뒤 전환해 주는 대신 내친다고 하더라도, 나름대로 사회적으로 유명한 회사에서 삼 년의 경력을 쌓고 나온다는 것은 타 직장으로의 이직에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 것이다.     


“고생했어.”     


A씨 인생의 두 번째 직장으로의 첫 출근날이 다가오자 그의 아내는 펑퍼짐한 원피스 차림으로 A씨를 배웅했다. 불안해하는 A씨를 본 그녀는 갑자기 A씨의 머리를 두 손으로 잡고 자신의 이마와 A씨의 이마를 마주 대며 눈을 감았다.     


“이게 뭐야?”

“응원하는 거야. 마음 좀 가라앉히고 힘내라고.”     


A씨는 아내를 따라 눈을 감았다. 나름대로 차분하려고 노력했던 그였지만 막상 아내와 이마를 맞대고 눈을 감고 나서야 그가 얼마나 흥분해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무리 하얀 운동화도 흰 눈이 쌓인 길을 밟고 나면 그것이 얼마나 더러워져 있었는지 알 수 있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아내와 이마를 맞대고 한참을 서 있던 A씨는 곧 완전히 평온해진 마음으로 출근길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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