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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CHO Apr 14. 2022

투쟁 대신 타협으로 마음을 움직이다.

Hoya의 ‘나의 선생님’ (8)

 호야가 킨더에 들어갈 때 우리가 세운 목표는 딱 하나였다. 학교에 즐겁게 다니는 것.

 이 목표는 특수 교사인 Mrs. Jeni의 Lunch Bunch 프로그램 등과 일반 교사들, 그리고 아이 친구들과 부모들의 배려 하에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비록 정학을 맞는 사태까지 일어나긴 했지만, 가장 심각한 문제였던 때리는 버릇이 없어졌으니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 호야는 그 이후로 학교에서 별문제 없이 수월하게 학교생활을 했다.

아이의 사회적인 측면은 학교의 도움으로 이렇게 순조롭게 발달했지만, 나도 학부모였다. 미국 사회에서 아시안 학부모의 스트레오 타입으로 굳어진 '성적에 목숨 거는 엄마'까지는 아니었지만, 우리에게 아이의 학업 성취도 역시 중요했다.

그런 면에서 학교의 지원은 턱없이 부족했다. 아이의 일반 교실에 1대 1 에이드를 계속 요청했지만, 결국 이 학교를 떠나는 날까지 우리는 에이드를 배정받지 못했다. 그렇다고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었기에, 아이가 학교에서 한 수업 자료를 가지고 오면 집에서 내가 내용을 보충해 보냈다. 대학생 시절, 나름 수학 과외로 용돈 좀 벌던 나였지만, 아들을 가르치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나는 '빼기'가 얼마나 추상적이고 어려운 개념인지 내 아들을 가르치면서 절절하게 깨달았다.


학교 오픈 하우스 날의 교실 벽에. 우리 아이는 대부분 이름만 있고 비워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학교 행사에 맘편하게 참석한 것은 작은 아이가 학교에 입학하고나서야 가능했다.


집에서 닦달을 해서 학교에서 빼먹은 부분들을 보충해가도 학기 초에 열리는 일종의 학부모 회의이자 오리엔테이션 행사인 학교 Open House 행사에 걸린 아이들의 학습물에 우리 아들은 이름만 덜렁 붙어있고 그 아래는 비어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어느새 아들의 머릿속엔 "집=공부하는 곳", "학교=쉬러 가는 곳"이라는 이상한 공식이 자리 잡았다. 집에 오면 공부하자고 책을 꺼내는 것은 대견스러웠으나, 어느 누구 하나 공부하라고 강요를 하는 사람이 없는 학교는 아이에게 편안하기 그지없는 곳이었다. 내가 평생 홈스쿨링으로 아이의 배움을 전적으로 책임질 것이 아닌 이상, 이 잘못된 인식도 바꾸어야 했기에 점차 집에서 내가 하는 홈스쿨링 시간을 줄여나갔다.


학교는 쉬러 가는 곳이 아님을 가르쳐 준 선생님들

학습적인 측면에서 일반 교사들의 도움이 정말 절실했는데, 그런 면에서 우리는 운이 좋았다.

킨더 반 배정은 운만 100% 작용하는데, 희한하게 우리 반엔 백인 아이들이 단 한 명도 없었다. 100% 유색인종이었다. 나중에서야 알았다. 우리 학교는 외국인들의 이동, 그중에서도 한국인들의 이동이 잦았는데, 학기 중 2월경(공교롭게도 한국 학기가 시작되는 3월 직전이다)에 외국인들이 빠져나가면 클래스 하나를 공중분해해 다른 반으로 아이들을 재배정하는 방식으로 재정적인 소모를 줄였다. 이런 방식이 주변 학부모들에게 소문이 나서, 한국인 커뮤니티에서 우리 학교는 기피대상이 되고 있었다. 나도 수없이 선배맘들에게 '절대로 도일 초등학교만 피하면 된다'는 충고를 들었다. 우리는 남편이 박사과정이 끝나가는 시기였기에, 곧 이사를 가야 했으므로 그때 전학시킬 요량으로 이 학교에 보냈는데, 우리 아이가 마침 공중분해가 예정된 학급에 배정이 된 것이었다. 우리 반이 외국인과 유색인종으로만 채운 것은 이 과정에서 발생할 잡음을 사전에 최소화하기 위한 학교의 사전 작업이었다. 그러나 우리 아이는 이 교실에서 처음 킨더를 시작했던 친구들과 다 함께 킨더를 마칠 수 있었다. 한국인 커뮤니티에서 우리 학교가 기피대상이 되면서 학생들의 학기중 엑소더스가 없었기 때문이다. 킨더 담임이었던 Mrs. Lunn은 임시 교사였지만 젊은 초임교사들에게 볼 수 있는 열정과 헌신으로 우리 반을 이끌어 학부모와 학생들이 똘똘 뭉쳐 우리 반을 최고의 반으로 만들 수 있는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킨더가 끝나갈 무렵엔 다른 학급의 엄마들이 모두 우리 반의 긍정적이고 밝은 에너지와 역동성을 부러워하게 될 정도였다.


1학년 때 담임이었던 Mrs. Wong은 성실하기로 유명한 아시안 중에서도 유난히 성실한 분이었다. 이 선생님은 아시아식 반복학습으로 수학을 지도했는데, 이 방식을 자발적으로 잘 따라가는 학생들은 초등 저학년 수학은 다 커버 가능하다고 해서 엄마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다. 사실 이 선생님의 반복학습은 사실 호야에게는 제일 잘 맞는 방식이었다. 선생님은 매주 토요일 저녁에 수학 심화학습 자료를 단 한 주도 빼지 않고 학부모들에게 보냈는데, 이런 일은 워라밸이 중요한 미국인들 사이에서 보기 힘든 일이었고 그 성실함에 남편도 혀를 내둘렀다.  

1학년 때 Mrs. Wong 아래에서 얼마나 힘들었냐며 우리 아이를 책임지겠다고 자발적으로 나서 준 2학년 담임 Mrs. McKenna는 아예 호야의 테이블을 자신의 테이블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배치해 아이의 학습 상황을 수시로 들여다보고, 미진하면 자신의 쉬는 시간을 써서라도 아이를 가르쳐주는 열정을 가진 분이었다. 그리고 초등 고학년으로 취급되는 3학년과 4학년 때 담임이었던 Mrs. Wheeler와 Mrs. Yamamoto는 모두 각 학년에서 최고로 인정받는 선생님들이었다.

우리 아들을 맡았던 선생님들의 노력과 헌신에 학부모로서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학교를 통해 받았던 배려는 사실 이게 전부였다.



컴플레인 대신 지원을!

학부모 입장에서는 충분히 컴플레인을 할 상황이었다.

나 말고 다른 special kids mom들은 수시로 교무실과 교장실로 쫓아가 컴플레인을 했고 우리 아이부터 배려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중 한 엄마는 참다못해 교육청으로 신고를 했고, 결국 학교와 법정 싸움까지 벌인 끝에 에이드 서비스를 받아냈다(이 이야기에는 반전이 있다). 미국서 학부모가 학교를 상대로 법정 소송을 벌이는 것은 흔한 일이다. 이민 변호사나 이혼 변호사만큼이나 흔한 것이 학교를 상대로 싸우는 특수 교육 변호사다. 우리 애만 생각하면 나 역시 이런 움직임에 합세해야만 했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잘 모르는 내가 봐도 학교 상황이 너무 빤했다.

우리 학교 학부모들은 대부분 UCSD에 공부하러 온 학생들이었다. 그들이 박사 과정생이든, 포닥이든, 의사 출신 단기 연수생이든 잠시 머물다 떠날 사람들이었고 형편도 넉넉하지 않았다. 이런 상태에서 학부모들의 기부금으로 운영되는 미술 수업이나 음악 수업은 아예 기대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바로 옆 동네에 있는 라호야 초등학교는 부촌에 있었기 때문에 적립된 학부모 기부금이 상당해 라호야 초등학교 학군 내에 있는 YMCA에 직접 계약을 맺고 1학년 때는 수영, 2학년 때는 필드하키를 시키는 것과 극명한 대조를 보였다.

학기 초마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수업 시간에 수행한 학습물들과 집에 보낼 가정통신문을 넣어 보내는 Red Folder를 주었는데, 처음에 입학할 때만 해도 플라스틱 폴더를 주었다. 그러다 점차 종이 폴더로 바뀌었고, 그마저도 주지 못해 학부모들에게 각자 레드 폴더를 하나씩 사서 보내라고 통보했다.

학교 재정이 점점 더 악화되고 있다는 신호였다. 이런 상황을 빤히 알면서 '왜 내 아이에게 빨리 에이드 안 붙여주냐'며 따져댈 만큼 내 얼굴이 뻔뻔하지 못했다.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우리 학교에서 가장 큰 행사는 학기 말에 있는 International Festival이었다. 전 세계에서 모여든 학부모를 둔 우리 학교 맞춤형 행사였다. 아이가 킨더에 들어가서 보니 약 50명의 학생들이 '한국'에서 왔고 외국인으로는 가장 큰 그룹이었지만, 한국 학부모들이 전혀 조직이 되어 있지 않은 채, 다들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학교에서는 왜 이렇게 한국 학부모들이 조직이 안 되냐며 안타까워했다. 나는 이들을 조직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서로 연결하고 퍼포먼스팀, 미술팀과 액티비티 팀, 그리고 운영팀을 만들어 팀별로 움직이게 했다. 앞장서서 일을 할 엄두는 내지 못했더라도 이런 조직이 필요하다고 느꼈던 동료 학부모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들과 함께 일을 하면서 이 조직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굴러가려면 '우리가 지금 이렇게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투명하게 밝히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 누구도 소외되는 일 없이 말이다.

팀을 조직한 후 나는 전체 학부모의 커뮤니케이션을 맡았다. 못하는 영어지만 한국 학부모 대표로 행사 준비 미팅에 참석하여 우리의 상황을 알리고, 학교에서 행사를 진행하는데 필요한 지원 사항들을 알렸다. 각 팀이 알아서 운영을 하고 미팅을 했는데, 새로운 사항이나 건의 사항들이 있으면 나에게 알려만 달라고 했다. 그렇게 나는 학교-한국 학부모, 그리고 이벤트 운영팀과 개별 학부모들을 연결하고 전체 학부모들에게 상황을 알리고, 아무리 작은 의견이라도 토론을 통해 제안을 실행해나가는 방식으로 이 행사를 리드했다.

그 당시 인스타에 올라온 행사 안내문

행사 당일에는 한국을 알리는 무료 액티비티와 함께 25센트짜리 혹은 50센트짜리 액티비티, 그리고 한국 기념품들을 기부받거나 혹은 구입해서 약간의 이윤을 남겨 팔았다. 우리 부스에 방문하는 다른 학생들과 학부모들도 처음엔 한국 부스의 유료 액티비티에 대해 생소하게 여겼으나, 학교에 수익금이 기부된다는 사실을 알고는 기꺼이 지갑을 열어 주었다. 큰돈을 모금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도일 초등학교 한국 학부모 커뮤니티는 다른 나라 부스들보다 학교에 가장 많은 기부금을 모아 보낼 수 있었다. 작은 돈이었지만 학교에서는 너무 고마워했다.


우리가 함께 얻어낸 성과였고, 이러한 움직임은 다른 나라의 학부모 커뮤니티에도 전해졌다. 내 역할은 비록 작았지만, 이러한 움직임의 시작이 되었다는 점에서 스스로 참 자랑스럽다.

단 한 번도 사회생활이라고는 해 본 적이 없었던 내가 이렇게 팔을 걷어붙인 이유는 작게라도 학교에 도움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학교에 도네이션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동료 한국 학부모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우리가 학교에 기여하는 정도에 따라 우리 아이들도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한국과 달리 미국은 공교육도 공짜가 아니라는 사실과 함께. 돈을 기부할 수 없다면, 시간을 기부하는 것도 우리가 할 수 있는 하나의 옵션이라는 것.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은 그들의 마음이 동해야 하는 것.

학교와 교사들을 압박하는 방식 대신 협조적인 방식을 취하자, 선생님들도 사람인지라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해 아이를 도와주었다. 2학년 때 담임이었던 Mrs. McKenna는 자신의 피 같은 휴식 시간을 호야 지도에 기꺼이 사용했다. 본격적으로 학습량이 많아지는 4학년이 되자 더 이상 담임 선생님에게만 호야를 맡겨둘 수 없었던 Mrs. Jeni는 스스로 에이드가 되어 개별 학습을 지도했다. 바쁜 시간을 쪼개 1시간이든, 2시간이든 상황이 허용되는 선에서 아이를 자기 사무실로 불러 개별지도를 한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동일한 출발 선상에서 출발한 아이들이 각자의 속도로 전진하고 있을 때, 제자리걸음을 하거나 심지어 뒷걸음질 치는 아이를 둔 엄마의 심정이 어떤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을 절대 이해할 수 없다. 그 불안함을 달래기 위해 아이를 억지로 책상에 데려와 때로는 얼러가며, 때로는 윽박질러가며 학습지를 채웠지만 엄마의 그 불안함을 고스란히 아이에게 전달되어 아이만 불안하게 할 뿐이었다. 어찌어찌 말을 물가로 끌고 오더라도 결국 그 물을 마시는 것은 결국 말인 것처럼, 학업 역시 아이가 주도해 나가는 것이 정답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결국 엄마 혼자만의 자기만족에 불과하다.

이론적으로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이 사실이 막상 현실이 되었을 때 '때를 기다림'이라는 정답을 실제로 이행하기는 쉽지 않다. 나 역시 그랬다. 결과적으로 교사들에게 호야의 학습을 맡겨둔 것이 학교가 취한 액션의 전부였지만, 그 뻔한 결과 안에서 좀 더 나은 상황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모든 엄마들의 마음일 게다. 앞에서 언급한 학교를 상대로 소송을 건 엄마도 일반적으로 미국 엄마들이 취하는 일반적인 최선책 중 하나다. 2년 넘게 학교를 상대로 소송을 해서 한 학년을 낮추고 에이드 서비스를 받아내는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 또한 상처뿐인 승리에 불과했다. 학교와 소송 과정 중에 서로 불신과 앙금이 쌓였고, 마음이 상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약자인 아이가 받아야 했다. 결국 이 아이는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야 했다.

나는 싸우기보다 그들과 타협하는 방식을 택했다. 누려야 할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싸움을 택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들의 결사적인 투쟁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 아이가 누리고 있음을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고, 그들에게 감사하게 생각한다. 다만 학교와의 관계에서 굳이 갑을 관계를 따진다면 학생과 학부모가 을이 될 수밖에 없는 '영어도 유창하지 않은 아시안 학생과 가족'의 현실을 직시한 것이다.


벌써 아이가 3학년,

5학년 졸업 후에 진학할 중학교를 고려해야 할 시점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금 이대로는 한계가 분명했다. 이 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학군의 중학교를 간다면 상황이 더 나빠졌으면 나빠졌지 더 좋아질 리는 없다는 결론을 이미 내린 터였다. 우리는 우리 아이를 위해 더 나은 대안을 찾아야 했다.


2022년 4월 13일

E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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