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유지 2 / 하노이
BR397 TPE-HAN Jul.10 09:00 - 11:05 / 인피니티 라운지
TG565 HAN-BKK Jul.10 20:45 - 22:30
오늘은 7월 10일,
길에서 하루를 보내야 하는 날이다.
하노이로 9시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야 하니 언제쯤 공항 셔틀을 타는 것이 좋겠느냐 물어보니 프런트 직원은 6시 반까지 로비로 내려오란다. 이 시간으로 예약을 전날 미리 해 두길 잘했다. 공항까지 가는 승객들이 제법 많아 셔틀버스가 가득 찼다. 아침은 라운지에서 먹을 거라 따로 호텔에서 조식은 신청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라운지에서 거의 하루를 다 보내게 될 것이다.
혹시나 문제가 생기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방콕까지 가는 티켓 2장 모두 다 잘 발행되었다. 수하물 또한 방콕에서 찾으면 되는 것까지 확인했으니 한시름 덜었다.
이코노미를 타고 다닐 때에도 아멕스 플랫 카드랑 제법 높은 등급의 Priority Pass (PP) 카드를 가지고 있어서 많은 라운지를 다녀봤는데, 비즈니스석 라운지라 그런 건지 아니면 아시아 국가들의 라운지가 그런 건지 대체적으로 라운지가 상당히 훌륭했고 타오위안 라운지도 예외는 아니었다. 타오위안 공항의 인피니티 라운지는 다시금 이 나라가 얼마나 선 line을 유려하게 잘 쓰는 나라인지 알 수 있게 디자인되어 있었다. 정말 세련됨 그 자체였다.
보잉 777W로 운항되는 BR397은 인천-타이베이와 비슷하게 2시간 반짜리 단거리 노선이다. 그럼에도 이 단거리 노선을 A330으로 운항하는 아시아나와는 달리, 에바 항공은 최신식 기재로 운항하고 있었는데 기재와 서비스, 모든 면에서 압도적으로 훌륭했다. 어메니티 파우치 안에 구비된 개인 용품 가짓수는 아시아나가 더 많았지만, 어차피 이 물품들은 비즈니스석 화장실에 가면 다 비치되어 있었다. 샴페인으로 시작하는 웰컴 드링크 서비스부터 디저트까지 어느 하나 빠지는 것이 없었다. 기회가 된다면 다음번에는 꼭 에바 항공을 타고 타이베이를 틀러 한국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했던 비행임과 동시에 국적기인 아시아나가 더 분발해야겠다는 아쉬움 또한 컸다.
나는 대학교 2학년이었던 1999년, 아에로플로트를 타고 상하이를 경유해 모스크바를 갔던 것이 최초의 해외여행이다. 그 이후로 대학원을 다니면서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롭스크, 이르쿠츠크, 모스크바,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비행기로, 이르쿠츠크-노보시비르스크는 기차로 다녀왔으며, 특히 블라디보스토크는 총 3번을 다녀왔다.
내가 갑자기 이렇게 러시아에서 가 본 도시들을 나열한 이유는 바로 하노이 공항에서 바로 이 러시아 공항들의 향기를 진하게 맡았기 때문이다. 입국장에서 출국장으로 가는 길은 잠시나마 나에게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했다. 왠지 권위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제복을 입은 출입국 담당 관리들, 낮은 층고, 휑한 입국장, 그리고 입국장 벽면에 그려진 벽화까지.. 베트남이 사회주의 국가임을 새삼 깨닫는다.
트랜싯 통로를 통해 다시 출국장으로 올라와 보안 검사를 다시 받고 보세구역으로 올라오니 입국장과 달리 출국장에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출국장에는 좌석이 부족해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바닥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에어컨도 제대로 잘 안 나오는지 후텁지근했다.
여기서 방콕까지는 이코노미로 가므로 PP카드를 받는 Song Hong Premium Lounge로 올라갔다. 그동안 PP카드는 유럽이랑 미국에서 제대로 써 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 여행에서는 하노이와 방콕에서 아주 요긴하게 잘 사용했다.
라운지 안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검소하다 못해 초라하기까지 한 출국장에 비해 라운지는 베트남을 세련되게 풀어낸 실내 디자인이 눈에 확 들어왔다. 라운지 비즈니스룸에 비치된 컴퓨터나 라운지 군데군데 놓인 이동식 에어컨들은 연식이 꽤 나가는 것 같았고, 언뜻 잘 보이지 않는 곳들은 마감이 엉성했다. 그렇지만 전반적으로 인테리어도 훌륭했고, 샤워도 하고, 쉬어 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너무 만족스러웠다. 출국장에는 오랜 시간동안 시간을 보낼 장소가 마땅히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법 소음이 크긴 했지만 이동식 에어컨이 있어 출국장에 비하면 한결 시원했다.
우리가 들어온 송홍 라운지 옆에 베트남 항공 비즈니스 라운지가 하나 더 있었는데, 그 라운지도 송홍 라운지 못지않게 훌륭했다.
여기서 최소한 네댓 시간은 있어야 한다. 나는 그다지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베트남 쌀국수 귀신인 호야는 라운지에서 쌀국수를 말아주는 것을 보고 두 그릇을 순식간에 해 치웠다. 사실 우리가 베트남에 온 이유도 호야가 워낙 쌀국수를 좋아해서였는데.. 이렇게라도 아쉬움을 달래길 바래본다. 사실 호야는 이 날 비행기를 두 번이나 탄다고 더더욱 신이 나 있었다. 그래, 네가 행복하면 된 거다!
방콕도 그러했지만 베트남도 역시 사람들이 너무 좋았다. 의례적인 친절이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친절이 느껴졌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점이 동남아의 매력이 아닌가 한다. 라운지 구석에 바가 있었는데, 낮이라 그런지 바텐더에게 커피도 주문할 수 있었다. 이 바리스타 겸 바텐더 아저씨도 굉장히 친절했다. 내가 알고 있는 베트남 커피는 화이트 커피란다. 그에게 이 커피를 베트남에서는 뭐라고 부르냐고 물어보았더니 '카페 농'이라고 한다고 가르쳐준다. 잊지 말아야지.. 카페 농^^
점심 생각이 없었는데 갑자기 배가 고파졌다. 김밥과 김치도 있는 것을 보니 한국 고객들도 꽤 많은가 보다. 여기서 베트남 스타일 음식들만 골라와 먹었는데, 너무 맛있어 두 접시를 먹어치웠다.
식사를 해 가며, 커피를 마셔가며, 유럽에서 비워져 있는 일정들을 마무리하며 시간을 보냈다. 호야에게는 방콕과 비엔나 공항에서 무엇을 타고 다니면 좋을지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우리 일정을 다 못 외우는데 호야가 외우고 있으니 일정 짜는데 호야가 큰 도움이 되었다. 체류할 도시의 출도착 시간과 날짜를 호야에게 물어보면 바로바로 답이 튀어나왔다. 그 덕에 꽤 스피디하게 아직 정해져 있지 않은 호텔들을 다시 예약하고, 툴루즈 가는 기차표랑 툴루즈-런던 가는 비행기 티켓도 확정할 수 있었다. 이제 런던에서 브뤼셀 가는 일정만 결정하면 된다!
이렇게 라운지에서 시간을 보내자니 좀 아쉬웠다.
어느 정도 일정이 나온 것 같으니 쇼핑이라도 좀 해야겠다 싶어 짐 싸들고 라운지에서 출국장 쪽으로 내려왔다. 출국장 한쪽에 롯데 면세점이 있었고, 여기를 지나니 작은 상점들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었다. 가게에서 망고랑 두리안 등 열대 과일들과 인형들을 파는 것은 비슷했다. 얼핏 보면 거의 똑같은 물건들을 파는 것 같아 보였으나, 자세히 보니 약간씩 차이가 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쇼핑이라도 제대로 하자 싶어 하나하나 들어가 자세히 보았다. 남편은 여행지에서 마그넷을 모으는 취미가 있다. 남편 선물로 들고 갈 마그넷도 꽤 그럴싸한 것으로 사가고 싶었다. 마음에 드는 것이 나오지 않아 거의 포기하려고 했었는데, 기적적으로 수공예로 컵받침이나 쟁반, 바구니를 만드는 곳을 발견했다. 맘 같아서는 종류별로 다양하게 사가고 싶었으나, 우리는 이제 여행을 시작한 처지였고, 앞으로 들러야 할 곳이 많았다. 이런 기념품도 짐이기 때문에 많이 살 수도 없었다. 나는 한참 망설인 끝에 컵받침 2개만 골랐다. 다른 것을 못 산 것은 지금도 너무 아쉽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방콕으로 출발시간이 다가왔다.
우리가 탈 TG565편은 2시간도 채 안 걸리는 단거리 노선으로 이코노미 좌석만 있다. 밤비행기지만 좌석은 제법 많이 찼다. 가족 단위로 휴가 가는 사람들이 많은지 어린이 손님들이 꽤 많았다. 아이들이 작은 목소리로 깔깔대며 웃고 떠들었다. 여행을 떠나는 아이들의 설렘이 갑자게 나에게 전해져 덩달아 나도 행복해졌다. 일정 짜는데 치여서 정작 여행은 즐기지도 못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따지고 보면 인천을 떠난 건 고작 하루밖에 되지 않았다. 꽤 오래전에 출발한 것 같은 느낌은 나의 착각이다.
모니터로 영화도 볼 수 없었고, 설마 기내식도 줄까 싶었지만 승무원들이 빠른 속도로 선택의 여지없이 타이 카레를 나눠 주었다. 양은 적지만 무척 맛이 있었다. 그동안 이 여행을 하며 탔던 비행기 중 가장 기재도 안 좋았고 서비스도 소박했다. 그럼에도 처음 가보는 방콕이 어떨지 마구 기대를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비행이었다.
앞으로 3일 동안 이동은 이제 그만. 신나게 방콕을 즐길 테다!
방콕 수완나품 공항에 도착한 것은 10시 반. 입국 수속은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지만 워낙 공항이 커서 짐 찾는 곳을 못 찾고 한참 헤맨 탓에 12시가 넘어서야 입국장을 나왔다. 너무 늦어 호텔에 타고 갈 택시가 없으면 어쩌나.. 했는데, 이게 왠걸.. 밤 12시가 넘은 방콕 공항은 불야성이었다.
그랩으로 택시를 불러 힐튼 방콕 스쿰나윗 호텔로 들어가니 1시가 넘었다. 씻고 내일은 정해진 일정이 없다 생각하며 한숨 돌리니 갑자기 배가 너무 고팠다. 인천 공항 라운지에서 쑤셔 넣었던 컵라면이 생각났다. 이 라면 덕에 호야랑 나는 허기를 면하고 잘 수 있었다. 이 날 먹은 오뚜기 순한 맛 진컵라면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컵라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