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목적지 방콕, 태국_1
미국에는 타이 음식점이 중국 음식점이나 베트남 음식점만큼 많다. 호야는 베트남 음식이나 인도 카레 등은 아주 좋아하면서도 이상하게 타이 음식은 좋아하지 않는다. 호야가 최애 요리로 세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좋아하는 음식이 베트남 쌀국수라 타이 요리에도 몇 번 도전해 보았는데, 영 시원치 않았다. 사실 방콕 보다 베트남 투어를 더 선호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어쩔 수 없이 베트남을 스쳐 지나가야만 하는 상황이다. 최대한 긍정적인 면만 생각하기로 했다.
호야의 특성상 분명 미국에서 자주 먹던 음식들을 먹겠다고 할 테니, 그중 한 두 번 정도는 새로운 음식에 도전해 볼 좋은 기회다. 그리고 서울을 제외한 아시아 여행은 처음이니만큼 새로운 액티비티에도 도전해 보자. 날씨가 더운 동남아에서 관광을 하기에 인프라가 베트남보다 방콕이 더 낫다고 하니, 이 점도 우리에게는 더 나아 보인다. 호야가 땀을 엄청 흘리니 말야.. 여담이지만 호야가 고등학교 때 수영팀과 워터폴로팀에 들어간 이유도 아주 단순하잖아?. "물속에서는 땀이 안 나잖아요!"
방콕에서의 첫날, 느지막하게 일어난 나랑 호야는 호텔 맞은편에 있는 엠포리움 쇼핑몰 식품관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호텔에서 몰까지는 약 5분도 걸리지 않았다. 방콕의 더위를 각오한 터라 나는 괜찮았는데, 호야는 이 5분 걷는 것도 너무 힘들어했다. 날씨가 흐릿해 구름이 낀 건 줄 알았는데 나와보니 햇볕이 쨍쨍한 데다 꿉꿉하기까지 한 날씨다. 다행히 쇼핑몰 안에는 에어컨이 엄청 빵빵하게 틀어져 있었다. 한기가 들 정도로 세게 작동되고 있어 감기 걸리기 딱 좋겠다 싶었지만 호야는 시원하다며 너무 좋아했다. 초행길이라 물어물어 몰 위층에 있는 식품관으로 들어갔다.
엠포리움 쇼핑몰은 바로 옆에 또 하나의 쇼핑몰인 엠쿼티어 몰을 지척에 두고 있는 종합 쇼핑몰로 명품 쇼핑에서부터 각종 위락 시설까지 다 갖춘 고급 몰이다. 그런 곳이니만큼 식품관도 상당히 수준이 높았는데, 무엇을 먹을지 알아보려고 일단 몰을 한 바퀴 돌았는데, 입점된 음식점이 미쉘린 구르마에서 높은 평점을 받은 곳들이 수두룩했다. 타이 음식을 좋아하는 나는 눈 돌아갈 지경이었고, 뭘 먹어야 할지 매우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이런 곳이라면 호야도 새로운 음식에 도전해 볼 수 있을 거야! 이런 기대를 품고 호야에게 무엇을 먹을지 물어보았다. 호야의 대답은 아주 심플했다.
나는 인도 카레!
무얼 먹든, 스스로 무엇을 먹을지 주변을 보고 선택했다는 것이 대견해서 카드를 손에 쥐어주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호야, 이 카드로 네가 사고 싶은 음식을 사 봐.. 저기 바로 옆에 테이블 보이지? 거기서 엄마랑 만나는 거야. 엄마도 엄마 먹고 싶은 음식 사서 거기로 갈게.
내가 옆에 있으니, 자꾸 나보고 도와 달라고 하기도 하고, 어디 나 없이도 음식을 사 먹을 수 있나 두고 보자.. 싶어 일부러 혼자 음식을 시키게 두었다. 만약 무슨 문제가 생기면 나에게 전화를 할 것이니 괜찮을 거다. 익숙하지 않은 공간,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과 어디까지 부대낄 수 있는지 시험해 보고 싶었다.
나도 부랴부랴 음식을 주문해 나온 음식을 받아들고는 호야와 약속한 장소로 가려고 아까 호야와 헤어진 곳을 지나가려고 하는데, 어라? 호야가 아주 난감한 표정으로 카운터 앞에 안절부절못하고 서 있었다. 순간, 무슨 문제가 생긴 건가 싶어 심장이 마구 뛰었다. 급하게 아이에게 다가가서 '왜 이러고 서 있느냐'라고 물었다. 호야는 잠시 망설이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엄마, 여기는 카레를 시키면 밥이 같이 안 나온대요. 밥 먹고 싶으면 따로 사라는데, 무슨 돈으로 사야할지 몰라 고민하던 중이었어요. 근데 여기는 왜 밥이 같이 안 나와요?
엄마가 준 카드로 사면 되지! 이 답을 호야는 못 찾고 있었다. 호야는 인도 카레와 의례 함께 나오던 밥이 없으니 밥을 먹고 싶으면 따로 사야 하는 이 상황이 당황스러워 평소 같았으면 쉽게 찾을 수 있는 답도 찾지 못하고 얼어 있는거다.
예전 같았으면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 하나도 제대로 못 시킨 아이가 실망스러워 화를 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19년 동안 이 아이와 보낸 시간은 이런 상황에서 아이의 상태를 받아들이고, 아이가 느낄 감정 또한 공감할 수 있을 정도로 나를 바꾸어 놓았다. 문제 상황에서 바로 생각의 전환이 안 되니 자폐인거지. 생각을 전환시키는 것은 앞으로 더 연습하면 되는 것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호야, 여기는 방콕이야. 방콕에서는 카레랑 밥을 따로 주문해야 하나 봐. 그건 엄마도 몰랐어. 그러니 밥을 따로 주문하자. 너 많이 배고픈데 카레만 먹을 수는 없잖니..
우리가 앞으로 계속 여행을 하다 보면, 지금처럼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계속 생길거야. 그럴 때는 당황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찬찬히 생각해 봐. 어떤 것이 더 나은 방법인지 모르겠으면, 지금처럼 안절부절못하고 있지 말고, 엄마한테 뭐가 문제인지 알려주면 엄마가 도와줄 수 있어.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아야 그 문제를 풀 수 있단다. 그러니 문제가 무엇인지 우리 그것부터 생각해 보는 연습을 해 보자.
우리는 방콕에서 좌충우돌했다.
BTS를 타고 다니기로 했는데, 티켓 사는 것부터 막혔다. 호야는 처음에는 왜 이 티켓 발매기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느냐며 불평을 했고, 급기야는 엄마 때문에 BTS도 못 탄다며 짜증을 부렸다. 더워서 더더욱 짜증스러웠던 것은 이해하나, '엄마도 모를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야 했다. 아니 이것을 호야가 모르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미국의 호야 엄마는 호야에게는 슈퍼우먼이었얼지 몰라도 방콕과 앞으로 우리가 갈 여행지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 너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이해시켜야 했다.
여기서 타이 밧트화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툭툭이를 탈 수 없다는 것, 다시 말해 툭툭이를 타려면 미국 달러나 한국 원화로 환전해야 한다는 것 또한 가르쳐야 했다.
예전의 나였으면 이미 버럭 했을 테지만, 뭐가 문제인지 알려주고, 너도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엄마를 도와주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하려고 했던 것들을 못 하게 된다는 것을 여러 번 설명하니 차츰 알아듣기 시작했다. 점차 BTS가 가는 방향이 제대로 가는지, 거꾸로 가는지 호야가 체크하고 내려야 할 곳도 호야가 챙기기 시작했다.
대부분 미국 카드로 긁었지만 현금을 써야 할 때가 있었다. 툭툭이를 탈 때, 사원에 들어갈 때 등이 바로 그런 경우였는데, 처음에는 카드를 안 받고 현금만 받는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가뜩이나 더운데 툭툭이를 못 타고 걸어가야 한다니! 현금이 없어서 서비스를 이용하지 못한다는 것 자체를 이해 못 했다. 돈에 대해 가르친 김에 아예 우리가 하루동안 쓴 돈을 기입하는 일을 호야에게 맡겼다. 그리고 오늘 쓴 돈이 달러로 얼마인지 환산하는 것도 맡겼다. 호야는 이 일을 퍽 좋아했다. 어쩌면 북키핑하는 일을 좋아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에 돌아가면 관련 수업을 한 번 듣게 해 봐야겠다 생각했다.
호야가 여행중에 가장 많이 성장한 부분은 이제는 '무엇이 문제인지'를 파악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전에는 이것이 문제인 줄 조차 몰랐던 문제들도 많았다. 그러니 작동이 안 되거나 하면 화를 내며 집어 던지거나 깨물었다. 호야의 셀폰에 보호 유리를 씌우는 것은 필수다. 안 그러면 액정이 남아나질 않는다. 허나 이 여행 이후로 조금씩 스스로 문제 파악을 하고, 이것을 나에게 전달한다. 적어도 무엇이 문제인지 엄빠에게 이야기하면 엄빠가 도와줄 것이라는 신뢰가 생긴 듯 하다. 그 전에는 나빠진 결과에 대해 혼날 것이라는 두려움이 더 컸었던 아이다. 그 덕에 호야의 인스타가 해킹당했을 때도 초기에 파악할 수 있었고, 구글 계정에 할당된 메모리가 다 차 더 이상 구글닥으로 문서 작성이 안 된다는 것도 나에게 이야기했을 때 메모리가 큰 파일부터 지우라고 알려주었다. 이렇게 '문제를 파악'해 우리에게 '구두나 톡으로 알려주니' 호야의 폭력적이고 신경질적인 대응도 현저히 감소했다. 요즘은 한 발 더 나아가 스스로 해결책을 우리에게 제시하기도 한다. 그럴 때 마다 우리 부부는 정말 아낌없이 칭찬을 해 준다. 설령 그 해결책이 부실해 보일 때에도 말이다.
덥고 조금만 걸어도 지치는 날씨였지만 호야는 생각보다 군소리 없이 잘 따라다녔다. 어떤 면에서는 워낙 참을성이 있는 녀석이다. 잘 참는다고 계속 끌고 다니면 참을성의 끝나는 그 어느 순간 짜증 낼 것이므로 상황 봐서 적당히 시원한 곳에서 쉬다 나오고 또 투어를 하고를 반복했다. 나도 호야를 배려했고, 호야도 '아이고 더워'를 반복하면서도 연신 셀폰 카메라로 인스타에 올릴 사진들을 찍으며 신나게 나를 따라다녔다.
어쩌면 그동안 나의 가장 큰 문제는 '호야에 대한 배려 없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저렇게 인내심 있는 아이를 내 성질에 못이겨 내가 아이를 폭발하게 만든것일지도 모르겠다는 반성도 했드. 내가 호야를 배려하니, 호야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여행 메이트였다. 역시 문제는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