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여행지, 서울, 대한민국 (3)
뮌헨에 도착해 호텔에 짐을 풀고 나와 호야는 2일 동안 방에서 내리 잤다.
식사도 방으로 배달받았고, 약 먹고 간간히 비타민과 감기차를 마셔가며 호텔방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쉬고 약 먹은 덕인지, 아니면 스위스제 감기약이 효과가 좋아서였는지 호야는 3일째, 그리고 나는 4일째 되던 날 음성이 나왔다. 이제 2 business weeks, 즉 10일만 있으면 미국행 비행기를 탈 수 있다. 우리가 원래 들어가려고 티켓을 샀던 날을 기준으로 딱 2주 후다.
미국행 비행기를 타려면 음성 확인을 받아야 했다. 미국에서 올 때 온라인으로 음성 확인까지 받을 수 있는 키트는 이미 써버렸고, 여분의 키트는 준비해 오지 않았으니 독일에서 의사를 만나 소견서를 받아 음성을 증빙받아야 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였다. 조변호사님 자제분들이 의사였던 점은 이런 상황에서 한 줄기 구원의 빛이었다. 남편은 우리의 상황에 대해 조 변호사님께 알려드리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자문을 구했다.
조변호사님께서는 일단 당신이 계신 프랑크푸르트로 오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셨다. 마음 같아서는 당신 댁으로 초대하고 싶지만 코로나 때문에 불가능하니, 자택 부근에 호텔로 와서 며칠 쉬면서 들어갈 시점을 상의해 보면 어떻겠냐고 하셨다. 너무 큰 민폐라 처음엔 거절을 했으나, 조변호사님께서 한사코 이쪽으로 오라고 하셨다. 그러고는 변호사님께서 예약해 놓은 호텔 정보를 보내셨다. 이렇게까지 권하시는데, 더 이상 거절하기도 민망했고 미국으로 돌아가려면 조변호사님 도움이 필요하기도 했다. 결국 나랑 호야는 뮌헨에서 프랑크푸르트로 갔다.
우리가 프랑크푸르트 호텔에 체크인한 후, 8시쯤 되었을까.
변호사님께서 저녁을 못 먹었을 것 같아 집에서 저녁을 해 오셨다며 김치찌개와 밑반찬을 가져다주셨다. 아플 때는 한식을 먹어야 힘이 나는 법이라며 멀리서나마 나와 호야에게 인사를 건네셨다. 멀리 샌디에고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얼글을 마주 보지도 못하고, 이야기도 오래 나눌 수 없어 너무 안타까워하시며 사진 한 장 찍고 헤어졌다. 코로나가 끝나면 꼭 다시 만나자는 약속과 함께.
집 떠난 지 약 2주 만에 처음 먹는 한식이었다. 사모님께서 보내신 김치찌개와 반찬들은 내가 먹어본 그 어떤 한식들보다 최고였다. 변호사님께서는 먹고 남은 식기들은 부담 없이 버려도 되는 일회용품이라고 하셨지만, 댁에서 쓰시던 식기와 용기들임이 분명했다. 어찌 이 소중한 물건들을 버리고 오겠는가. 나는 그날 먹고 남은 용기들과 식기들을 모두 잘 씻어 가방에 넣었다.
해외에서 사는 이민자들이 힘들어하는 부분 중 하나가 손님 접대이다. 매 년 여름 방학 시즌이 되면 미국 아줌마들이 모여있는 사이트에 단골로 등장하는 속풀이 주제가 바로 이 문제다. 우리도 미국에서 근 20년을 살면서 많은 사람들이 우리 집에서 머물다 갔지만, 다행히 나쁜 기억은 단 하나도 없다. 하지만 이 문제가 이민자들에게는 꽤나 민감한 부분임을 너무 잘 안다. 좀 더 솔직히 이야기한다면 이 주제로 올라오는 속풀이 글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손님 초대 및 접대'에 대해 방어적인 마음가짐을 갖는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내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터라 조변호사님께 민폐를 끼치는 것이 더더욱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조변호사님께서는 생판 처음 보는 나와 호야에게 변호사님의 귀한 시간과 음식, 그리고 호의를 넘어선 극진한 대접을 해 주셨다. 아무리 소셜 미디어로 '느슨하게 연결된 관계'였다고 해도 쉽지 않은 일이다. 연고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 독일 땅에서 내 가족도 아니고, 친구도 아닌 타인에게 도움과 배려를 받는다? 아무리 같은 '한국인'이라 해도 쉽게 경험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고 나니 그동안 내가 가졌던 나의 졸렬함이 부끄러워졌다. 오해 없기를 바란다. 그동안 우리 집에 방문했던 게스트들을 졸렬한 마음으로 대접했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 집에 온 손님들은 모두 우리 부부가 진심으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사람들이고, 그들과 함께 우리 집에서 함께 보낸 그 '며칠'은 정말 최고로 즐거웠던 시간이었다. 내가 부끄러웠던 것은 비단 우리 집에 방문한 '손님'에게만 아닌 '타인'에게 넉넉한 마음으로 먼저 손을 내밀지 못했던 것, 바로 그것이다.
나는 그 마음을 잊지 않겠다 다짐했다. 그래서 조변호사님께서 음식을 싸 보내신 보관 용기들과 식기들을 챙겨 샌디에고에 가지고 왔다. 지금도 이 물건들을 볼 때마다 생전 모르는 사람인 우리가 위기에 빠졌을 때, 진심을 다해 도와주려고 손을 내민 조변호사님의 마음을 기억한다. 그런 분을 서울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서로 날짜를 맞추려고 약속한 것도 아니었는데 우리가 한국 체류 기간이 조변호사님의 한국 출장 기간과 겹쳤다. 우리는 만사 제쳐두고 변호사님과 약속을 잡았다. 아이들도 모두 데리고 나가기로 했다. 변호사님께서 아이들이 조금이나마 한국에 대해 알 수 있는 프로그램이 무엇일까 고민하셨다면서 창경궁 투어를 함께 해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하셨다. 그렇게 해서 우리 네 가족과 조변호사님은 6월 말 일요일 오후에 창경궁에서 만났다. 날씨까지 도와주었다. 산책하기에 너무 덥지 않은 날이었다.
남편과 작은 아이는 조변호사님과 처음 만나는 사이였다. 나랑 호야도 한 번 뵌 적은 있지만 워낙 멀리서 인사를 했기 때문에 솔직히 처음 보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서먹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남편은 나와 호야를 두고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던 그날을 기억하며, 조변호사님 아니었으면 아내와 아이만 두고 차마 미국으로 돌아올 수 없었을 것이라며 진심 어린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우리 다섯 명은 창경궁 해설사를 따라다니며 창경궁 투어도 하고, 인근 청국장집에서 저녁 먹으며 마치 오래전부터 알았던 사이인양 자연스럽게 근황과 안부도 묻고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는 등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에는 꼭 샌디에고에서 자제분들과 다함께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헤어졌다.
맨유의 퍼거슨 감독이 그랬다지. 소셜 미디어는 시간 낭비라고.
헌데 우리는 소셜 미디어가 만들어 준 '느슨한 연결'이 이렇게 의미 있는 인연으로 발전한 특별한 경험을 했다. 이 역시 호야가 만들어 준 인연이다. 여행 중에, 위기 중에, 경황 중에 좋은 인연을 만나게 된..
사족. 조익제 변호사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지금 하고 계시는 사업도 크게 번창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