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여행지, 서울, 대한민국 (2)
서울에 오기 전 가장 두려웠던 것이 바로 한국의 무시무시한 무더위였는데, 다행히 우리가 서울에 머물렀던 6월 말~7월 초까지는 날씨가 그나마 괜찮았다. 평소 한국에서 세미나와 강연으로 바쁜 남편도 이번에는 세미나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했다. 2주 남짓한 시간 동안 친정 엄마의 칠순 여행으로 부산을 다녀온 것 이외에도 교보 문고, 명동 칼국수, 국립 박물관 등을 함께 돌았다.
2주라는 결코 길지 않은 기간 중, 우리 가족에게 가장 의미 있었던 시간은 바로 프랑크푸르트에서 오신 조익제 변호사님과 만난 것이었다. 페이스북으로 느슨하게 연결된 인연이 이렇게 서울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다. 심지어 남편은 조변호사님을 처음 뵌 것이었다. 우리의 인연은 2022년에 시작되었다.
코로나가 아직 기승을 부리던 2022년 5월, 스페인을 거쳐, 오스트리아와 독일을 지나 스위스 취리히를 도는 일정으로 다 함께 여행을 떠났다. 코로나 때문에 집에 3년 동안 갇혀있던 우리 가족에게 이 여행은 꿈같은 선물이었다.
스페인 빌바오에서 간 프랭크 게리의 구겐하임 박물관과 몬드라곤 대학, 그리고 생 세바스티안에서 우리는 스페인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그리고 뮌헨으로 가서 뉘른베르그를 거쳐 바이마르의 Bauhaus를 방문하는 등 관광을 하고 다시 차를 몰고 뮌헨으로 돌아와 기차를 타고 오스트리아와 독일에 국경을 맞대고 있는 오스트리아 국경 도시 도른비른으로 갔다. 거기서 스위스 취리히로 이동해 남편 후배 댁에서 하루 신세를 지고 남편 업무를 마친 후 샌디에고로 돌아 올 계획이었다.
아직 코로나로 전 세계의 출입국이 자유롭지 않은 시기였다. 출국 전에도 코로나 음성 확진도 받아야 했고, 국가별로 방역 조건들을 확인해야 했다. 여분의 코로나 키트도 챙겨가고, 여행 중에도 손 소독에 특히 주의를 기울였지만, 역시나 항상 말을 듣지 않는 우리 아들이 문제였다. 취리히에서 미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필수 절차였던 코로나 검사를 했는데, 호야가 양성이 떴다. 나머지 세 사람은 다행히 음성이었으나, 양성인 호야는 입국불가. 아니, 음성이 떠도 2주 후에나 입국이 가능했다. 우리 가족 모두 멘붕에 빠졌다.
남편은 이같은 위기 상황에서 제일 이성적으로 상황판단을 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된 이상 호야의 옆에 내가 남기로 했다. 최소한의 인원만 남고 나머지 둘은 먼저 들어가기로 했다. 학교와 직장에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나와 남편은 아포테케가 문을 닫기 전에 목감기약이랑 감기차, 그리고 여분의 키트를 구하러 다녔다. 항공사와 통화를 해 티켓을 취소하고 작은 아이 티켓을 다시 구입하는 등,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였다. 이 문제로 유나이티드 항공과 밤새도록 씨름했고, 옆에서 남편은 내일 출발할 짐을 싸며 자문을 구할 사람이 있는지 곰곰이 궁리했다.
남편은 페이스북 친구인 프랑크푸르트에 계신 조익제 변호사님을 떠올렸다. 그전에 뵌 적도 없고 페북으로만 간간이 안부를 주고받던 사이였지만 남편은 조변호사님께 연락해 유럽의 코로나 봉쇄 정책과 음성 판정서를 받기 위해 의사를 어떻게 해야 만날 수 있는지 등을 여쭤 보았고, 조변호사님은 의사인 자제분들에게 물어가며 성심성의껏 답변해 주셨다.
남편은 나에게 독일로 돌아가는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다. 일단 스위스 물가가 너무 비쌌다. 음성 반응이 나오더라도 2주나 발이 묶여 있어야 하는 이 상황에서 독일이 물가면에서 경제적으로 나은 선택 아니냐는 것이었다. 게다가 나 역시도 독일에서 여행한 경험이 많았기에 생전 처음 오는 스위스보다 독일 시스템에 더 익숙했다. 독일어는 전혀 할 줄 몰랐지만 적어도 내가 필요한 물건을 사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정도는 아는 독일이 더 나았다. 우리가 스위스로 오기 전 묵었던 뮌헨의 호텔로 돌아가기로 결정했고, 남편은 그날 밤 거의 울며 나와 호야의 취리히-뮌헨행 티켓을 샀다. 조금이라도 편하게 가라고 일등석으로.
남편은 조변호사님께도 일단 상황이 이러해서 아내와 아이가 뮌헨으로 갈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조변호사님은 당신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언제든 도움 줄 테니 편하게 연락하라고 하셨다. 아이와 아내만 이 낯선 땅에 두고 가야 하는 남편 입장에서는 크게 의지가 되는 말이었다.
호야가 손을 더 잘 씻었더라면..
호야가 아무거나 막 만지고 다니지 않았더라면..
호야가 내 말을 좀 더 잘 들었더라면..
멘붕이 가라앉고 중요한 일들이 얼추 정리가 되고 나자 내 마음속에는 호야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찼다. 혼자 여기에 남아야한다는 것이 현실로 다가와 있었기에 너무 무서웠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이런 나의 감정적 동요를 남편은 다독였다.
이미 벌어진 일이니 담담하게 받아들이자.
호야가 왜 오늘 샌디에고행 비행기를 탈 수 없는지 아이에게 잘 이야기해 주고,
손 씻는 일 같은 사소한 일들도 엄마 아빠의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따라오는지 가르쳐 줄 수 있는 기회야.
우리 가족이 얼마나 서로 사랑하는지 알 수 있는 기회니 아이를 원망하지 말자...
이 말을 남기고 남편은 작은 아이와 샌디에고행 비행기를 탔다. 취리히 공항에서 둘을 배웅하고 다시 호텔로 돌아온 나는 바로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한 후 시계를 보았다. 뮌헨행 기차를 타기에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2시간 정도 알람을 맞춰놓고 잤다. 씻고 한숨 자고 나니 피로는 다소 풀렸지만 여전히 몸은 가라앉아 있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물 컵에 물을 반쯤 따랐다. 그리고 발포 비타민 세 개를 한꺼번에 집어넣고는 단숨에 들이켰다. 비타민이 한꺼번에 들어가니 정신이 좀 차려졌다. 비타민 효과든 뭐든 정신차리고 늦지 않게 뮌헨행 기차를 타야만 한다. 코로나로 아픈 아이를 데리고 말이다.
가자.
뮌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