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여행지 서울, 대한민국
호야는 6월이 되면서부터 축제 모드였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출발일이 며칠 남았는지 펙보드에 카운트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고 기내용 체크인 러기지 가방을 방에 가져다 놓고 짐을 쌌다 풀기를 반복했다.
여행 가기 전 처리해야 할 일들이 쌓여 있었다.
씨월드에서는 파트타임 알바생에게 2주 이상 휴가를 주지 않기 때문에 여행 출발 일정에 맞춰 회사를 퇴사를 하고, 원한다면 재입사를 해야 했다. 게다가 6월 초는 입사 1주년이라 회사에서 “샴고래와 식사 Dine with Shamu” 행사에 초대했다. 호야는 기쁜 마음으로 이 행사에도 참여했고, ChatGPT의 도움을 받아 '2주 후 사직 통보' 문서를 제출 후 지급받은 유니폼과 물품들을 반납하는 등, 퇴사에 필요한 절차들을 스스로 밟아나갔다. 이렇게 호야는 씨월드에서 1년의 경력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6월은 더구나 후배들의 졸업식 시즌이었다. 호야는 후배들의 졸업식과 졸업 파티 때문에 정신이 없었는데, 그 와중에도 호야는 매일 러기지 가방에 짐을 싸고 풀러 대며 출발할 날을 기다렸다. 나도 여행 중에 내 고질병인 허릿병이 도지지 않도록 1월부터 꾸준히 F45를 하며 체력을 비축해 나갔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함께 16번째 생일을 보내고 싶다는 작은 아이의 희망에 따라 인천이 첫 번째 도착지가 되었다. 이번 여행은 두 아이의 성장을 축하하는 의미 있는 여행이었던 만큼 아이들을 더 기쁘게 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동안 모아둔 마일리지를 모두 방출해 비즈니스석으로 예약했다. 아이들은 비즈니스석으로 여행을 간다는 사실에 더더욱 흥분했다. 호야가 초등학교 5학년이었나.. 구글에서 비즈니스석 좌석을 보고는 나에게 "엄마, 비행기 안에 누워서 잘 수 있는 자리가 있대요!"라며 눈이 똥그래져서 아주 대단한 발견을 한 것처럼 말했던 적이 있다. 이번 여행이 바로 그 소원을 풀어줄 것이다. 아이들은 자다가 기내에서 라면을 꼭 먹겠노라며 다짐했고,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우리도 너무 뿌듯했다.
2024년 6월 20일 인천행 아시아나 A380 밤비행기를 타야 했기에 우리 네 식구는 2시경 집에서 출발해 엘에이 공항 인근에 있는 호야 아빠 친구의 집 앞에 차를 댔다. 고맙게도 우리에게 2주 동안 차를 주차하라고 허락해 주셔서, 2주간 민폐를 끼치기로 했다. 그곳에서 공항까지 우버를 타고 LAX 공항에 도착, 탑승 수속을 마치고 스타 얼라이언스 라운지에 들어갔다. 그동안 이코노미로 여행을 하면서도 카드 혜택으로 라운지를 자주 이용했지만, 비즈니스석 승객으로 스타 얼라이언스 라운지를 이용한 것은 처음이었기에 좀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우리는이 곳에서 간단하게 저녁 식사를 하고 탑승 시간이 오기를 기다렸다. 호야는 샤워를 한 후, 옷까지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는 밤 10시 30분에 탑승.
우리가 탄 아시아나 203편은 1-2-1 배열로 좌석이 배치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둘 다 성인 혹은 16 살인만큼 이번 여행을 부모인 우리의 간섭 없이 독립적으로 하기를 원했고, 그런 아이들의 뜻을 존중해 가운데 두 좌석에 나와 남편이 앉았고 남편 쪽 복도에 작은아이, 내 쪽 복도에 호야가 앉았다.
출발이 약간 지연되었지만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문제는 기내 서비스가 시작되면서부터였다. 호야가 다른 승객들에 비해 서비스 시간을 너무 많이 잡아먹었기 때문. 승무원들이 웰컴 드링크를 서빙하는 첫 번째 서비스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말이다.
승무원: “손님, 음료로 무엇을 드시겠습니까?”
승객: “물 주세요"
보통은 이렇게 단답형으로 대답을 한다.
이미 기내에 준비되어 있는 음료와 식사, 그리고 스낵 종류들이 적혀있는 메뉴판이 이미 나누어져 있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릴 일이 없다. 그런데 호야는 그 메뉴판을 받아 사진도 찍어놓고는, 정작 안에는 보지도 않았는지 계속 질문을 했다.
호야: “어떤 음료들이 준비되어 있죠?”
승무원: “네, 저희 기내에는 물, 와인, 맥주, 오렌지 주스, 그리고 각종 탄산음료들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호야: “음.. 그럼 저는 아직 21살이 안 되었으니 술은 마실 수가 없어요. 그러니 와인이나 맥주는 안 되고요, 소다는 이미 라운지에서 마셨으니 더 마시면 안 되고요.. 오렌지 주스 주세요.”
아니, 그냥 “오렌지 주스요”하면 될 것을!!
메인 음식을 서빙할 때도, 식후 디저트를 서빙할 때도 이런 식이었다. 승무원에게 계속 말을 걸었고, 호야가 질문을 한 이상 승무원도 대답을 해야 했기에 서비스 속도가 다른 승무원들에 비해 현저히 더뎠다. 이런 일이 계속되니 담당 승무원에게 너무 미안했다. 항상 그래왔듯이, 그냥 내가 호야와 함께 앉아서 서비스받는 것을 도와주었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을.. 괜히 엄마의 도움 없이 따로 여행해보고 싶다는 아이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해 이렇게 불편한 상황을 만든 거 같아 승무원에게 너무 미안했다.
기내식 서비스가 끝나고 기내에 불이 꺼지자 나는 화장실 쪽으로 갔다. 그곳에 호야를 담당한 승무원께서 계셨다.
나: “저희 아이 서비스 하느라 너무 힘드시죠?"
승무원: “아, 아닙니다"
나: “제가 옆에서 도와주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요.. 사실 저희 아이가 고기능성 자폐인이라 사회성이 좀 떨어집니다. 그동안은 항상 기내에서는 제가 아이를 도와주었는데, 아이가 이번에는 자기도 성인이니 혼자서 여행해 보고 싶다고 해서 따로 앉았어요. 근데 본의 아니게 승무원분께 폐를 끼친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승무원: “아닙니다. 오히려 아드님께서 원하는 것을 확실하게 이야기해 주셔서 저로서는 서비스하기 편합니다.”
나: “제가 옆에서 서비스하시는 것을 계속 보았는데, 저희 아이가 꽤 번거롭고 귀찮은 승객인데도 얼굴 한 번 찡그리시지 않고 서비스하시더라고요. 제가 달리 해 드릴 건 없고, 칭송 레터를 써 드렸으면 하는데, 혹시 어떻게 하면 되나요?”
그러자 승무원께서 너무 좋아하시며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나에게 칭송 레터 폼을 가져다주셨다. 그 순간 퍼뜩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있었다.
나: “저희 아이가 어릴 때부터 땡큐 레터를 자주 썼기 때문에 이런 칭송 레터도 잘 쓸 겁니다. 이 양식을 저희 아이에게도 따로 한 장 가져다주시겠어요?”
호야는 Thank You 레터 쓰는 것을 참 좋아한다.
타인의 배려를 받으며 성장한 호야는 감사해야 할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기에 학기 말과 연말에 카드 쓰느라 참 바쁘다. 특히 학교 선생님들, 학교 스태프들, 하다못해 학교 앞 교차로에서 학생들 교통 지도를 하는 자원 봉사자들.. 이 분들의 도움과 배려로 호야는 학습적인 측면에서 다른 아이들보다는 '느리고 더디게 성장'했지만, 밝고 성실하고 사교적인 성인으로 성장했다. 사실 '느리고 남들에 비하면 더디지만 학습면에서 작게라도 성장'을 한 것도 이 분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기에, 나는 매년 학기말마다 호야가 선생님들께 Thank you 카드를 쓰도록 가르쳤다. '배려받음'에 대한 최소한의 성의 표시였다. 이 땡큐 카드를 쓰는 것이 미국 문화에서는 기본 중의 기본인지라 더 신경 써 챙기긴 했다. 호야는 중학생이 되자 내가 따로 챙기지 않아도 본인이 알아서 땡큐 카드를 준비했다. 나는 호야가 준비한 카드에 소액이나마 충전된 기프트 카드를 넣어 아이 손에 들려 보내기만 하면 되었고, 호야는 신이 나서 이 카드를 선생님께 나누어 드렸다. 항상 마지막은 헤어짐에 대한 아쉬움으로 '울음'으로 마무리 하긴 했지만.
이런 일종의 루틴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그날까지 계속되었다. 그래서인지 호야는 땡큐카드 쓰는 것을 정말 좋아하고 잘한다. 분명 이 칭송레터도 잘 써드릴 것이라 생각하며, 호야에게는 따로 이야기하지 않고 양식을 아이에게 가져다주라고 승무원분께 요청을 드렸다.
그러고 나서 얼마나 흘렀을까..
자다가 깨서 화장실에 다녀오는데, 호야를 담당한 승무원분께서 나에게 다가오셨다.
승무원: 어머니, 아드님께서 저에게 주신 칭송레터 너무 잘 받았습니다.
저 그 레터 읽고 너무 감동받아 눈물이 났어요.
저.. 이런 말 외람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꼭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어머니, 아드님 참 잘 키우셨습니다..
그동안 호야를 키우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았던가.
‘더 이상 우리 유치원에서는 네 아이를 위해 해 줄 것이 없다’며 유치원에서 쫓겨나는 일은 부지기수였다. 유치원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여름 캠프에서도, 애프터 스쿨 프로그램에서도, 한글학교에서도 하다못해 동네 도서관에서도 눈총을 견디다 못해 나왔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내 주변에서 호야에게 가장 호의적이지 않았던 인종은 아이러니하게도 아시안들이었다. 중국인들은 괜찮았다. 일본 아이들은 아예 호야를 대놓고 무시했고, 한국 아이들도 호야와 어울리는 것을 힘들어했다. 한인 성당 유아실에서, 한국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동네 도서관 열람실에서, 한글학교 등록받는 줄에서 타인이 내 아이에게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한 두 마디에 울며 아이 손을 잡고 그 자리를 떠났다. 둘째 아이의 플레이그룹도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호야 때문에 흐지부지 된 적도 몇 번 있었다. 심지어 한국의 가족들마저도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나는 더 이상 울지 않고, 대신 맞섰다. 발달 장애아이를 키우려면 '울보'보다는 '쌈닭'이 그나마 나은 옵션이었기에.
고기능성 자폐인의 가장 어려운 점은 이 아이들은 얼핏 보면 '눈치 없는' 일반 아이들처럼 보인다. 자세히 보면 자폐 성향이 보이나, 스쳐 지나가는 일반인들이 호야에 대해 머무는 시선은 ‘눈치코치가 1도 없는 아이'에서 그치기 때문에,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배려받기가 쉽지 않다. 고기능성 자폐인 아이를 둔 엄마로서 내가 제일 걱정했던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었다. 인정욕구가 있는 우리 아이가 남들에게 인정받기는커녕 천덕꾸러기, 왕따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 이것이 바로 내가 제일 두려워했던 호야의 미래였고, 이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없었던 시절, ‘이 세상에 나와 호야만 없으면 해결될 일이 아닐까..’ 하는 나쁜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호야와 집 밖에 있는 그 모든 순간순간, 단 한순간도 편한 적이 없었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사람에게서 치료받아야 하는 법이다.
어느새 내 주변에는 나에게 상처 주는 사람들보다, 나를 위로해 주고 어떻게 하면 호야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지 함께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나는 '쌈닭'이 되기보다는 '전략가'가 되기를 마음먹었고, 그렇게 아이를 키워냈다. 그렇지만 마음 한 구석에 깊숙이 자리 잡은 상처는 아물지 않은 채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호야가 무엇을 하고 살면 좋을까?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 떠난 길.
그 첫 번째 여정인 한국 가는 비행기 안에서 19년 동안 호야를 키우며 사람들에게 받은 그 모든 상처가 아물었다. 타인에게 받은 따뜻한 말 한마디가 주는 힘이 이렇게 크다. 그 날, 나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신 아시아나의 이름모를 승무원께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 전하고 싶다.
이 순간 이후로 나의 상처 위에는 ‘뿌듯함’과 ‘미래에 대한 희망’이라는 새로운 꽃이 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