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로 가는 길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히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 꽃
누군가가 나의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
이름을 불러주는 이가 있다는 것은 나의 존재를 일깨워 주는 일이었다. 그에게로 가서 그가 불러준 그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것이었고,
의미 없던 나의 몸짓으로 채워진 시간들을 지나 나를 불러준 이를 향해 고개를 드는 일이었다.
그렇게 그 이름에 맞는 존재가 되고 의미가 되는 일.
기도가 나에겐 그랬다.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초자연적인 일이라거나 , 미신적인 믿음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나를 불러준 이에게 내가 반응하는 것이었으니까.
나는 그저 대화하듯 기도했다. 형식도, 기도문도 잘 모르는 나는 질문과 답답함을 토로하고 이야기하곤 했는데, 그런 대상이 생긴것만으로도 나는 마치 소공녀 세라가 람다스로 인해 다락방에 비밀이 생긴것 같이, 뭔가 숨쉴만한 것 같은 든든함이 느껴졌다.
모든 질문에 모든 대답이 즉각적으로 돌아온 것은 아니었지만 어떤 것은 상황으로, 어떤 것은 즉각적 대답으로, 어떤 것은 꿈으로, 어떤 것은 사람들을 통해 답으로 돌아왔다. 그 다이내믹을 말로 온통 설명할 수 없음이 답답하기도 하지만, 이미 세상 속의 작은 한 인간이 온 우주와 커넥트 되는 사건이 인간의 언어로만 표현하기엔 부족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할 수 밖엔 없지 않은가. 유한한 인간이 유한한 언어로 무한을 설명하기란 참으로 요원하고 막막한 일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 와중에도 삶에서 한시도 떠날 수 없는 평범한 생존의 인물인지라, 매일 눈뜨고 맞이하는 생활이란 게 어처구니없이 일상에 매여져 있는 여느 사람답게 종종거릴 수 밖엔 없었다. 눈 감고 기도할 땐 우주를 향해 마음을 내어 보려 애쓰다가도 눈을 뜨면 마주하게 되는 자잘한 현실에서의 내 욕심과 과오와 실수들을 확인하고 보게 되는 것이었다.
사실, 이 글을 쓰면서 돌이켜보건대, 그때의 나의 생활이 어떻게 유지가 되었던 것인지 과정과정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돈이 정기적으로 입금이 되었던 시절보다 오히려 은행이 단 한번도 빵꾸나지 않았다는 사실, 그리고 렌트비를 못내 집을 쫓겨나지 않았다는 것, 더욱이... 우리가 돈이 없어 굶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 기름값이 없어 차를 못 움직였다는 사실도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때를 기억하는 나는 마치 하강 직전의 롤러코스터
정점에서 그저 꾸욱 눈감고 있다가 모든 움직임이 정지한후 살며시 눈을 뜬, 콩알만한 간을 가진 촌뜨기 같았다.
매일이 무서웠고 조마조마하면서도 마음한켠에 뭔지 모를 기대랄까, 배짱이랄까.. .. 하나님이 살아있다면 어떻게 이 상황에서,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나를 살리시려나 ? 하는 궁금함도 있었다.
막다른 길에서 희망이 없을때는 죽음을 염두에 둔 처연한 고요함으로 인해 체감하는 시간도 그 길이가 남다르게 느껴지는 법이다.
정말 하루가 일분 일초처럼 지나기도 하고, 일년이 지나듯 천천히 갈때도 있었으니까.
그때 매주 , 매달 어떻게 살아졌는지 세세한 기억은 없다. 하지만 분명한것 한가지는 한번도 위에 언급한 일이 발생하지 않았고, 살아졌다.
그게 지금 생각해도 너무 신기하다.
렌트비만큼이나 대책없었던 애들 학비 문제만 해도 그렇다.
두 아이 모두를 사립학교에 보내고 있던 내가 그들의 학비를 감당할 수가 없어서 학교를 찾아갔을 때, 아이들의 학교 선생님들은 스스로들 알아서 학교의 장학금과 펀드들을 알아봐 주고 아이가 대학을 지원하는 일까지 돕겠노라고 이야기해 주셨다. 그리고 큰아이는 장학금과 보조금 혜택으로 거의 학비를 면제 받았고 작은 아이도 극빈자로 신청할수 있는 학비보조프로그램이 들어가서 유치원 보낼때보다 적은 돈으로 학교를 다닐수 있게 되었다.
그 무렵 큰아이는 정말 미친 듯이 정신 차리고 공부에 몰두했다. 정신줄 놓은 부모를 믿다가는 큰일 나겠구나 싶어 굳은 결심을 한 애처럼, 생존의 밧줄이 공부인양 공부를 했다.
중학교 때까지 너무 공부를 안 하고 빈둥거려서 아이에 대한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적을 생각하면, 내가 사느라 몸부림치는 동안 어느새 아이는 스스로 공부로 제 살길을 정한 것 같았다.
게다가 큰 아이는 엄마의 외로운 자리를 일찌감치 눈치로 알았다.
아빠가 잠시 다니러 올 때마다 두 개의 핸드폰을 소지하고 엄마가 아닌 다른 여자와 통화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내리막길로 곤두박질치는 악화일로의 우리 집 상황이 아빠로 인한 것임도 이미 알고 있었다.
큰 아이는 고맙게도 친구들을 따라 교회에 열심히 나가는 성실한 아이로 자랐다.
내가 절망스러운 소식들로 몸과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져 울고 있을 때면 가만히 다가와 나의 등을 안아주며 뒤에서 기도를 해주곤 했다. 그리고 내 울음이 잦아들고 호흡이 낮게 돌아오면, 마치 다 안다는 듯.." 엄마, 괜찮아.. 괜찮을 거야..." 하고 나를 달랬다.
누가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 것이라 했던가?
부모는 자식을 의지해 함께 성장한다고 하는 게 맞다. 아니, 자식이라는 울타리 때문에 되레 보호받았다고 해야 한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우리 둘 다 부모 된 자로 부모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고 육아를 한 게 아니었고, 어떤 훌륭한 신조나 가치관을 아이에게 가르칠 겨를도 없었다.
부모 자체가 엉망으로 살면서 무슨 좋은 것을 아이에게 가르치고 본을 보이겠는가?
그래서 내겐 콩 심은 데 콩 난다는 속담처럼 진저리 치게 나를 무섭게 하는 말이 없었다.
행여라도 아이들이 나와 남편의 못난 점만 닮으면 어쩌나 싶어 , 나는 아이들을 보면 늘 죄인처럼 쪼그라들곤 했다. 오직 바라는 것은 제 부모의 못난 점을 닮지 말아야 할 텐데 하는 것과 이 모든 성장과정에 있던 가족의 아픈 기억이 아이들에게 상처로 남아 그들의 생애에 발목 잡는 일이 되면 안 되는데 하는 조바심뿐이었다.
큰애는 마지막 졸업 무렵 많은 상과 장학금을 탔다.
학교에서 일 년 동안 대학수업을 그렇게 많이 들었던 아이도 없었다고 칭찬해 줄 만큼 24시간을 쪼개며 공부한 결과로 많은 학교에서 합격통지도 받았다. 나는 큰아이가 그렇게 성장해 준 것이 기쁘기도 했고, 참으로 자랑스러웠다. 내심, 하나님이 남편이라는 고통을 상쇄하는 기쁨을 자식을 통해 주시나 보다 하고 나는 기대했다. 기대가 생기니 욕심도 슬그머니 고개를 쳐들었다.
나는 졸업식 연설을 연단에 나가서 멋지게 하는 아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행복해졌다. 상상만해도 신나는 일이었다. 지옥같은 내 삶에도 이제 기쁨과 자랑이 생기는구나 싶어 마음이 콩당콩당 거렸다. 상상만 해도 짜릿한 기쁨이었고, 내 목이 안돌아갈만큼 뻐근한 행복일것 같았다. 쥐구멍에 이제 서광의 그림자가 비춰질라나 하는 잔망스런 기대!
나는 더 열심히 해서 졸업식사를 할 수 있도록 점수를 더 잘 받아보라고 아들을 종용하고 부추겼다.. 그리고 소원했다. 미리부터 공부를 좀 했음 따논 당상일텐데 뒤늦게 공부를 시작한 아들이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나는 간절히 원했고….염치불구하고 꼬옥 한번만 들어주십사고 콕 ! 찍어서 ” 구체적으로 “ 기도하고 구했다.
아들이 온 학교가 보는 졸업식에 나가 상을 받고 연설하고 졸업을 한다면 더 이상 바랄게 없는 심정이 되었다. 그 영광이 마치 내 모든 고생끝의 금메달이라도 된양.
그 어느때보다 절실하게 나는 기도했다.
하나님, 아들을 통해서 제게 기쁨을 주세요.라고.
하지만, 아들은 아주 근소한 차이로 졸업식 연설을 할 수는 없는 상황이 되었는데 , 나는 그게 너무도 원통하고 속상했다.
그리고 불평이 나왔다.
하나님, 제가 그리 큰 걸 바라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것도 못 들어주세요?
다른 상이나 장학금 많이 타는 것보다 저는 아이가 졸업식에서 나가서 그렇게 연설하는 것을 보는 게 더 좋았단 말이에요.. 하는 마음이었다.
실망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볼멘 마음으로 기도하려고 앉았을 때였다.
꿈속에 그날 시상식에서 우리 큰아이가 받은 장학금 중 , 한 부모가 나와서 짧은 연설을 한 것이 마치 영화를 돌려보듯 다시 보였다. 그 부모의 아이는 대학 입학을 앞둔 아들을 잃고 그 장학재단을 설립해서 아들을 기리는 장학금을 매해 지원하고 있는 터였는데,, 사실 그 부모의 연설을 나는 귀담아듣지 못했었다.
아이가 졸업식 연설을 못하게 되었단 사실에만 급급해서 실망스런 마음에 화가나 다른 상이나 장학금 수여등에는 별로 내가 집중을 못했던 탓이었다.
한마디로 그 자리에 있었으나 내 감정에 휩싸여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던 것이다.
연설의 내용은 이런것이었다.
그 부모의 아들이 대학 입학허가를 받고 진학을 앞둔 시점에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하였고, 그 아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장학금을 매해 수여한다는... 아들의 못다 이룬 꿈을 이루는 학생이 되길 바란다는 내용의 연설이었다. 그 장학금을 수여하기 위하여 나온 엄마의 표정은 담담한 중에 아픔이 서려있었다. 매해 죽은 아들이 다니던 학교에 돌아와 졸업생중에 아들과 같은 아이들에게 장학금 전달을 위해 연단에 서서 축하를 전하는 그들의 아픈 가슴이 순식간에 그대로 나에게 전해졌다.
그들이 가진 재산을 다 팔아 아들의 생명을 다시 살릴수 있었다면 , 그렇게 하지 않았겠는가!
나라도 그러지 않았겠는가?
아무련들, 남편이 없애버린 재산의 몇백배를 준대도 나는 내 아들과 바꿀수는 없을것이다. 공부를 못한다고 해도 살아있는 내 새끼를 그 어느누구와도 바꾸지 않을것이다.
순간적으로 나는 정신이 들었다.
내가 간절히 원하고 기도하고 땡깡부리듯 했던 그것은… 자식을 통해 얻고자했던 순수한 기쁨이 아니라 내가 키운 내 자식이라는, 내 자랑과 남들에게 보이고싶은 나의 천박한 욕심이었다는걸.
"자식을 잃고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연단에 올라 해마다 장학금을 주는 저 부모 마음을 생각해 본 적 있니?
네 아들이 받은 장학금을 주러 올라오는 저마음이 어떻겠니? 너는 자식을 네 소유처럼 자랑삼고 싶은 마음이 더 크구나..."
참 소스라치게 놀라고 입을 다물수 밖엔 없었다.
나라는 사람의 얕고도 얍실한 마음의 한가운데를 다 드러내 들킨 것 같았다.
너무나 부끄러웠다.
나는 눈을 뜨고도 회개했고 눈을 감고도 회개했다.
나의 잘못을, 나의 비뚤어진 욕심을, 나의 교만함에 범벅된 어처구니없는 불평들을.
들여다볼수록 이기적이고 못난 나의 일그러진 욕망들.
자기변명과 연민 속에 끊임없이 남의 탓만 하던 내게 다가오신 성령은 ,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과오는 둘째치고 너 자신을 똑바로 보라고 일깨우고 있었다.
내가 당연하게 여긴 모든 것들이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음을,
내가 누리는 모든 것들이 나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자식도, 남편도, 재산도, 심지어 나의 생명도 당연하게 주장할 아무 권리가 내게 없다는것을.
과연, 그분은 나를 알고 계신 것 같았다.
나의 이름뿐 아니라, 나의 온 존재와 생애와
선한 의도로 포장한 나의 추함과 악한 마음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