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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ica Mar 05. 2024

케냐, 모얄레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한 그 땅

나는 요즘도 가끔 같은 꿈을 꾼다.


인공의 빛이라고는  우리가 타고 달리는 트럭의 헤드라이트 밖엔 없는 비포장길.

사방이 깜깜하고 검은 하늘 속에서 설탕가루처럼 빛나던 별들과  폭신하고 보드랍게 잘 구워진 빵처럼 동그랗고 따스했던  달빛 으로 가득했던 어느 저녁의 아프리카,  동물들의 울음소리와 풀내음으로 코 끝이 달큰했던  케냐의 시골길을 달리는 꿈.

그건 꿈이기도 했고, 꿈이 아니기도 했다.

그때 그 길을 달리는 동안, 난 언제라도 영원히, 이 길을 달리는 꿈을 꾸고 기억을 할것같다는 생각을 했으니까.



나의 인생중  최악의 상황이었던 2012년 가을, 그 때 내 수중에 남은 돈은 4천불 정도 있었다.


이른 봄에 어머님에게 전화를 받고 나서 이후의 생활들은 사실 고정적인 수입이 전혀 없었다.

큰손주가 대학입학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떄문에 아이의 학비를  가끔  마련해보내시긴 했지만, 사실 급한 불 부터 끄느라  보내는 명목에 맞춰 쓸수 없이 급한 발등의 불 부터 끄기에 바빴다.

그래도 그 이상한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수 있을까.

고정수입은 전혀 없는데 불안정한듯, 안정되었었던  그때의 시간을.


불현듯 , 애들 아빠가 이사를 도와준다고 미국에 왔을때 그가 차고 있었던 명품 시계를 내가 감춰 두었던게 생각났다.

그때 내눈에는  한국에서 휴가를 내고 우리  이사를 도와준다며 온  남편의 손목위에서 유난히 반짝이던 그 시계가 그렇게 눈에 거슬릴수가 없었다. 그의 시계에 대해 멋지다고 한마디 건네니 돌아온 대답은 " 아 이거! 중국 출장갔다가 짝퉁 하나 샀어! 꽤 괜찮아보이지? 너도 담에 하나 사다줄까?" 하고 너스레를 떨었다.

유난히 그의 음성에 예민한 나의 귀는 거짓말 탐지기처럼 작동이 되어서 그 괘씸하고도 발칙한 거짓말에

속으로, 아...그렇다면 숨겨둬야겠구나... 없어져도 아무렇지 않다면 가짜가 맞고 , 속상해서 방방 뛰면 진짜인거겠지..싶은 맘으로 쓰윽 가져다 검은 비닐에 둘둘싸서 겨울옷들 틈 사이에 집어놓고 이삿짐을 쌌었다.

다음날 그는, 눈이 벌게져서 시계를 찾아 온 집안을 헤메었다.

때는 이삿날 이었으므로 며칠을 속상해 하던 그의 얼굴을 보며 거짓말을 하던 그에게 모종의 복수는 해준것 같았지만, 씁슬한 마음을 감출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일부러 감추었던 것을 쓰윽 꺼내놓고 그를 기쁘게 해주긴 더 싫었다.

그렇게 넣어두고 잊어버렸던 그 시계가  갑자기 생각난 것이다.


나는 시계를 들고가 감정을 받았다.  

그 시계는 한정판으로 나온 것인데다 , 구하기 힘든 모델이라 보증서가 없었어도 비싼 가격으로 처분할수 있었다.

처음 부터 그런 의도로 감춘건 아니었지만, 나는 그때 시계를 팔아 마련한 돈으로 아이들의 나머지 등록금과 , 얼마간의 렌트비와, 지금 내가 직업으로 삼고 있는 반영구 화장을 배웠고..... 마지막 남은 돈 4천불로 케냐 모얄레의 이원철 선교사님의 사역지로 2주간 다녀올수 있는 비행기 티켓을 구입했다.

해마다 이원철 선교사님의 사역지를 방문해 치과 사역을 하셨던 권사님의 선교여행에 같이 가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처음 받았을때, 나는 나의 형편에 걸맞지 않는 사치이자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자리라고 생각했다.

어릴때 지구본에서나 보던 아프리카 대륙, 다큐멘터리 필름에서나 보던 아프리카땅으로 남을 돕는 선교 여행을 간다는건  내 몸과 마음  하나 가누기도 어려운 신앙초보자의 입장에서는 지나친 욕심이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비행기표 이외에는 숙박비나 기타 다른 비용은 들지 않는다는것과 그런 기회가 아니면 평생 죽을때까지 밟아보지도 못할 언감생심의 땅이 아닌가 하는 마음에 갈등이 되었다.  하긴, 돈이 없다 하면서도 복에 겨운 고민을 한다고 비아냥거릴 사람도 혹여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막상 ....정말 죽어야겠다는 결심이 섰을때 나는 죽기전에 짧은 여행이라도 떠나 내가 살다가는 이 지구의 다른 고장, 다른 마을 사람들을 보고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아버지가 여행업을 하셨던 탓에 여기저기 많은 곳을 여행다니기는 했지만, 늘 비슷한 수준의 호텔과 관광지와 박물관을 방문하는 일정들은 여행이 아닌 관광이었으므로....몇년이 지나고 나면 다 거기서 거기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몇달을 고민을 하던 끝에 남은돈 4천불을 가장 값지게 쓸수 있는건 공과금이나 먹고 입는곳에 쓰는게 아니라는 생각이 굳어졌다.


곧 길을 떠날 결심을 하는 사람에게는 살림살이가 짐으로만 보이는 법이다.

사는것에 대한 애착이 없어지는 사람에게는 삶을 유지하게하는 악세사리 보다는 삶 그 자체에 대한 의미가 이 더 중요한것 아니겠는가.

게다가 나는 "지금"이라는 시간과 경험이 가장 중요한 가치라는 것을 한참 배우고 있는 인생 새내기였다.

머리로 계산을 하고 늘 나의 마음을 이성으로 달래오던 나는 이번엔 내 마음이 시키는대로 따라가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2012년 깊은 가을,  추수감사절과 나의 생일이 낀 그 11월을  아프리카 땅에서 보냈다.



내가 처음 만난 아프리카, 케냐는 아름다웠다.

암스텔담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나이로비의 공항에 내렸을때의 충격을 잊을수 없다 .

수도 나이로비에서 소형경비행기를 타고 모얄레로 가던 그 길, 그리고 그 시골 구석구석을 트럭으로 누비며 만났던 마을 사람들을 잊을수 없다.

산골 귀퉁이 한 자락에서 소를 몰고 느릿느릿 걸어오던 마을 주민과 아이들의 맑은 눈빛을 잊을수 없다.

찌그러진 양은 컵에 손님이라며 대접해주던 귀한 설탕을 가득 넣은  차이티의 맛도 잊을수 없다.

저녁 밥을 짓느라 오두막 집집마다의 뾰족한 굴뚝에서 피어 오르던 장작의 내음도 잊을수가 없다.

가늘고 길쭉한 팔다리에 맑고 하얀 흰자위와 물기많은 그 검은 눈동자들을 잊을수 없다. 이마을 저 마을 모든 사람들이  MR.LEE 를 반가이 부르며 뛰어오던 그들의 모습과 웃음을 잊을수 없다.

올망졸망 아이들을 데리고 치과 진료 받아보겠다고 줄 서 있던 엄마들, 우는 아이를 달래느라 애쓰던 그들의 몸짓을 보며 나는 살아있는 우리 인간속에 살아있는 같은 언어, 사랑을 느꼈다.


나는 트럭을 타고 이 마을 저마을로 이동하는 중간에 만났던 검은 땅 아프리카의 하늘과 땅에 가득한 조물주의 흔적을 본것 같았다.


자연의 무한한 광활함안에서, 밤 이라는 완벽한 어두움 안에서, 아침이라는 찬란한 태양빛 아래에서... 나는 말할수 없이 흐드러진 자연계라는 혼돈의 한가운데 자리한 신의 질서와 위엄을 엿본것 같았다.


그때까지 나는 진짜 밤의 얼굴을 본적이 없었다는걸 거기에서 맞은 첫날 밤 깨달았다.

전깃불도, 가로등도 없는  완벽한 어두움.  

어두움조차  부드러운 융단처럼 윤기있게 느껴지는 그 검고 검은 세상에 오로지 바람소리와, 동물들의 울음소리 사이사이에 벌레들의 속삭임까지 더해져 말할수 없이 조화로운 아름다움이 있었다.

인간의 오감은 절대적 어둠속에서 소리에 더 예민해진다는것을 그때 처음 실감했다.

나의 귀로  신경들이 온통 모여들어 작고 작은 소리조차 낚아올렸다.

바람이 일어나  나에게 다가오는 동안 거치고 들러오는 모든 과정을 소리로 알수 있을것 같았다.

그가 멀리서부터 나뭇가지와, 풀잎들과, 어떤 깃발들과 , 물을 지나 오고 있다는걸....오로지 소리로만으로 알수 있었다.

지금 이땅에서 내가 죽는다 해도 아무도 찾아낼수 없을것 같은 , 그 웅장함.

나의 작음이 그 웅장함에 압도되어 더더욱 작고 왜소해보였다.


주님, 당신이 만드신 그 모든 세상의 창조물들에 비해 저는 이렇게 작아요. 이렇게 보잘것 없어요. 이렇게 하찮아요.

그런데 왜  저를 사랑하세요?


내가 무엇이관대, 이 시대에  한국에서 태어나 나라는 사람으로 살다 미국에 살면서 지금과 같은 삶의 고민을 하고 살게 된건지 정말 중요한 모든것에 대해 나의 의견이나 선택이 반영된것은 별로 없었다.

케냐에서도 시골, 모얄레에서 태어나 초막에서 불을 피워 밥을 짓고, 동생들을 돌보던 흑인 소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삶의 처지와 모양은 달랐어도 인간이라는 큰 틀안에서 우리는 모두 같았다. 우리의 기쁨과 고통이, 우리의 행복과 아픔이, 삶이라는 여정의 고단함은 어느 땅, 그 어느 누구라도 피할수 없는 숙명같아 보였지만 그 고통안에서 빛나는 것 한가지는 , 사랑이었다.

삶의 깊은 피로와 쓸쓸한 스산함 사이사이에 스며들어 있는 바보같은  사랑이 아니라면 이 세상은 이미 벌써 망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 약하디 약한것 같은 사랑, 강한것들 사이에서 우리를 사람으로 살아있게 하고 말랑하게 하는 사랑이 세상을 감싸고 있는것 같았다.


케냐 모얄레에서  그날의 피곤한 일정을 마치고 귀가했던 어느날, 네분의 선교사님들과 함께 동행한 권사님, 그리고 장로님으로부터 깜짝 생일축하를 받았다. 쌀가루로 만들어주신 생일떡에 초를 꼽고, 옆동네 이디오피아의 오일장에서 몰래 사오신  전통의상을 선물로 받았다. 그 귀한분들이  노래해주시고 기도해주신 그날의 내 생일축하가 그저 고마웠다고 말하기에는 부족하다.


남편의 허영으로  가득한 시계를 팔아 살수 있었던 모든것중에, 아니 내가 세상에 태어나 쓴 그 어떤 돈보다 더 훌륭한 값어치로 나에게 돌아온것은 케냐로의 여행이었다.


나는 그 해, 그  여행이 꼭 주님이  나에게 주시는 선물같았고, 위로였으며, 다른 세상을 살아보라는 따스한 응원으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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