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나는 아이를 키우는 일에 온 정성을 쏟았다.
나는 밥 하는 일과 살림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
나는 시댁과 친정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아이에게 줄 이유식을 만들고, 집을 잡지화보처럼 예쁘게 꾸미고 늘 깨끗하게 치웠다.
요리를 배우러 다녔다.
배운 요리를 만들어 시댁 어른들께 일주일에 두세 번 이상 날랐다.
아이의 조기교육에도 열심을 냈다.
꽃꽂이를 배우러 다녔다.
그림을 배우러 다녔다.
세상 걱정 없는 팔자 좋은 년처럼, 보기드문 외제차를 끌고 백화점으로 , 시장으로 누비며 남편이 비운 자리를 시어른들과 아이로 온통 시간을 채웠다.
무언가로 숨쉴틈 없이 꽉꽉 채우지 않으면 그 공백 때문에 무너질 것 같았다. 한 사건이 마무리되고 다음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 평화 아닌 평화로운 시간들이 불안해서 미칠 거 같았다.
낮동안은 태엽 감긴 인형처럼 쉼없이 돌다가, 아이가 잠이든 혼자만의 시간이 되면 무너져 내렸다.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의 베란다에 서서 , 혹은 아무도 보지 못하는 뒷베란다의 세탁기옆 틈새에 쭈그리고 앉아 나의 태어난 그날과 결혼식을 올린 그날을 저주했다.
그러다 보채는 아이를 달래고 챙기면서는 다시 활짝 웃었다. 그 아이의 자라남이, 그 아이의 눈빛이, 그 아이의 살냄새만이… 나를 숨 쉬게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잠시라도 아이가 자거나 곁에 없을 때면 ,
수많은 생각들과 답 없는 질문들이 나에게 파도처럼 밀고 들어왔다.
나는 물어볼데가 필요했다. 정답이 아니더라도 의견이라도 듣고싶었다.
사실 결혼날짜까지 잡고 불교이신 시어머니가 궁합을 보러 갔을 때 궁합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어머님과 반지를 맞추러 만나기로 한 날짜가 훨씬 지나서도 연락이 없으셔서 기다릴 즈음, 그가 가출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었다.
좋지 않은 궁합으로 주저하시는 시부모님께 세상 둘도 없는 모범생이자 순둥이 아들인 그가 가출로 의사표명을 하고 이주이상 지났을 때, 결국 못 들은 이야기로 하기로 하고 시어른들은 결혼을 진행하신 거라 했다.
마치 그가 전쟁에서 이기고 온 사람처럼 의기양양하게 내 앞에서 그 이야기를 할 때, 나는 의아했다.
궁합? 운명?
나는 그건 심기 약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생각했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엄마에게 전했다.
하지만 나쁜 궁합을 거스르고 사랑의 힘으로 어쨌든 잘 무마하고 살아온 친정 엄마는, 나와 그의 궁합 따윈 보지도 않았다.
우리 친정도 아버지 쪽은 기독교, 엄마 쪽은 불교였다.
엄마의 결혼생활은 경제력의 차이뿐 아니라 종교, 고향까지 모두 정반대인 집안의 결합이었다.
이북 실향민이자 무에서 유를 창조하여 부를 일군 집의 미모의 장녀가 쫄딱 망한 집의 생계부양자이자 가난의 바닥을 치고 교회에 열심이던 집안의 7남매 둘째 아들과 결혼하기란 초반부터 수월하지 않았다..
게다가 양쪽집안 모두 시대의 아픔을 소화하지 못하고 그저 자존심의 날만 곧게 서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엄마 아빠를 중심으로 한 양쪽집안의 모든 “다름”이 불러온 것은 다름에 대한 인정과 포용이 아닌, 서로에 대한 비난과 판단과 다름에 대한 확인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엄마 아빠는 그걸 사랑으로 우겨 이겨내며 살아왔다.
궁합을 비웃듯, 끈질기게.
하지만 나는 그날 아침 신문에서 읽었던, 대선 결과를 정확히 예측하여 유명해진 두 명의 무속인에 관한 기사를 보고 누워있다가 홀린 듯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난생처음, 혼자서는 시내한번 가보지 않았던 내가 서울을 벗어나 기차를 타고 알지도 못하는 동네, 수원의 어느 곳으로 수원할아버지라는 점집을 찾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