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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 May 21. 2024

나에게 주어진 삶

 

사랑하는 선생님들께 


오후 수업이 없는 날은 이른 점심 후 치명자산으로 산책을 나섭니다. 치명자산은, 천주교 성지로 널리 알려진 곳이에요. 산을 둘러싼 둘레길은 ‘바람 쐬는 길’이라 이름 붙을 만큼 호젓하게 산책을 즐기기 좋아 자주 들르곤 하지요. 



마침 오늘은 치명자산 내 평화의전당에서 이콘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영혼의 빛을 따라서’라는 주제처럼 아름답고도 숭고한 성화들을 감사하게 만날 수 있었어요. 저는 ‘야로슬라블의 성모’라는 이콘 앞에 오래 서 있었습니다.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은 성모 마리아의 눈은 슬픔이 가득 차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들에게 닥칠 모든 순간을 미리 준비하는 듯했지요. 


성모 마리아는 의연하면서도 따뜻했습니다. 장미처럼 우아하면서도 고요하게 순명하는 몸짓에는, 악과 대적하지 않고 선한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것 같았어요. 사랑에 대한 믿음이자 내맡김일까요. ‘야로슬라블의 성모’를 통해 바라본 삶의 형태는, 하나 됨의 의미를 되물을 좋은 기회였습니다. 


전시 공간을 나와 예수마리아바위로 찬찬히 걸음을 옮겼습니다. 길 가운데서 만난 찔레꽃, 자주괭이밥, 바위취, 너도바람꽃, 피라칸타 등 색색의 꽃들은 여름의 빛깔을 띠고 있었습니다. 침묵을 통해 꽃들이 전하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았습니다. 충만함이란 무엇에 의해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임을 온전히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순간 바라본 예수마리아바위의 옆모습은 이콘에서 본 성모 마리아처럼 의연하면서도 따뜻하게 저를 품어주는 것 같았습니다. 어떤 것에도 저항하지 않고, 때마다 오는 인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명의 삶. 이를 통해 전해지는 충만함은, 여러 집착과 불안에서 놓여나게 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양한 도구나 방법을 찾곤 하지요.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에는 괴로움만큼의 희망이 공존합니다. 희망은 상황을 왜곡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평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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