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우 Oct 19. 2021

전화기

"아~ 아~ 점백이네, 점백이네, 이장 집에 서울서 따님 전화가 와 있습니다. 얼릉 와서 받으세요."  

이런 동네 확성기 소리를 듣던 때가 따져보면 그리 오래 전의 일이 아니다. 밥 하다가 동네 아낙들은 점백이네 딸이 전화 한 이유를 나름 짐작하고는 했을 터다.

"점백이네는 이번 달 초삿날이 환갑인디 서울 딸이 못 올라나? 웬 전화디야.~" 라는둥 토를 달면서 말이다.       

처음 은석골에 갔을 때, 아마도 27년 전쯤으로 기억되는데, 이런 확성기 소리를 듣고 시내에서 10여 킬로도 떨어지지 않은 곳의 생소함에 놀랐었다. 그땐 그곳이 시가 아니어서였는지 전화선이 아마도 이장 집에나 있었나 보다. 하기야 우리가 집 지어 이사 갔던 25년 전에도 마을 울력 나오라는 안내 방송에서부터 누구누구가 얼마 얼마를 냈다고 백중날 마을 잔치에 추렴한 내역을 발표하기도 했었다. 그 쩌렁쩌렁한 이장님의 목소리, 한껏 뽐내고 다듬어 더 향토스러운 목소리가 온 동네에 새벽같이 울려 퍼졌었다.       


지금 같은 휴대폰 세상을 당시에 상상이나 했을까?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전화기가 있는 애들은 좀 사는 집 애들이었다. 텔레비전이 나 중학교 일 학년 때 우리 집에 놓였고 전화는 대학 들어가며 놓였다. 당시에는 연락할 전화번호를 적어 내미는 것이 얼마나 폼 나고 그럴듯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전화를 받는 것은 참으로 반갑고 행복한 일이었다. 주황색 공중전화의 다이얼을 돌려 누군가에게 전화를 한다는 것 역시 맘 설레는 일이거나 용건이 분명한 일이었다.       


그러다가 소위 카폰이 나오게 되었다. 결혼 후 긴 안테나가 뒤꽁무니에 달린 지인의 승용차를 얻어 탔다가 거기서 이동 중에 차 안에서 거는 카폰을 경이로운 눈으로 봤던 때가 어제 같다.

초창기 휴대폰은 거짓말 보태면 붉은 벽돌만 했다. 휴대폰 자랑을 하고 싶은 사람들은 부러 바지 뒷 주머니에 그걸 우겨 꽂았는데 한쪽 엉덩이가 툭 튀어나와 불편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어그적 거리며 걷기도 했다. 그래도 안테나까지 달린 그것을 꼭 뒷주머니에 보란 듯이 꽂고 어기적거리던 사람들이 심심찮게 있었다.       

전화요금은 엄청 중요한 지출 목록이 되었던지라(아마도 필수품이 아니라 과외 지출이란 생각에서가 아니었을까 싶다) 전화를 오래 쓰면 어른들 눈치가 보였다. "용건만 간단히"라는 문구는 늘 전화를 쓰는 사람이 익혀야 할 예절이었으니 말이다. 스팸 전화라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을 시절이다. 아니 그 비싸고 귀한 전화를 감히 알지도 못하는 남에게 무작위로 보내는 정신 나간 사람이 있다고?     


객지에서 하숙하는 아들이나 가족에게 전화를 할 때면 주인집 전화를 통해 한참을 기다려서 받았고 눈치가 보였던 때니 긴한 용건 없는 전화는 당연히 생각도 못할 일이다. 

데이트 중의 남녀가 아무리 서로 좋아하고 보고 싶어도 설령 그녀의 집에 전화를 해도 좋다고 허락받았더라도 온 식구가 죽 둘려 앉은 안방에서 전화를 받는다는 것은 동네방네 소리치며 이야기하는 격인지라 사적인 대화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을 것이다. 도끼눈을 뜨고 바라다보거나, 갑자기 조용해진 방에서 시선만 돌렸지 온 신경이 귀에 쏠린 가족들, 거기서 받을 전화를 상상해보라! 아마도 서로 전화하기로 약속했다면 당연히 부모님이 안 계시는 틈새 시간을 함께 노렸거나 괜히 티브이 보는 척 전화기에 바짝 붙었다가 약속한 전화가 울리자마자 받아서는 목소리라도 잠시 듣거나 약속만 잡고는 잘못 걸린 전화인 듯 이내 끊는 연기가 필요했으리라. 나를 포함한 우리 친구들이 쓰던 방식이니 정감이 갈 수밖에 없다. 우체부 아저씨가 반갑고 편지가 기다려지던 때가 이미 가버렸듯이, 전화가 반갑고 소중했던 때 역시 시간 저편으로 사라졌다.     


이제 전화는 단순히 목소리를 듣는 기기에서 손 안의 컴퓨터가 되어 세상과 실시간으로 소통하고 일도 처리하는 기기가 되었다. 천리안이 따로 없고 자신의 그림자보다도 더 밀착된 물건이 되었다. 더 없이 편리하게 확장되어가는 이 진화의 끝이 어디일지 상상조차도 할 수 없다. 그러나 발달된 머리에 비해 가슴의 감동은 없는 시절을 우리는 살고 있나 보다. 매사가 느리고 불편했던 때보다 더 행복해진 것도 아닌 것 같다. 

이제는 전화가 울려도 기다리는 특별한 일이 있는 게 아니라면 그저 무덤덤하고 오히려 광고성 전화로 귀찮을 지경이다. 부러 반가운 사람, 가슴 설레는 전갈을 기다릴 사건을 일삼아서라도 만들어야 할까 보다.           

작가의 이전글 Sad movie’와 순주 할머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