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이야기를 글로 써 드립니다.
저는 사실 어릴 때 기억이 그다지 많지 않아요. 상담을 받으면서 어릴 때 기억이 참 희미하고 얕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래도 기억나는 어릴 때의 단편들을 적어볼게요.
최초의 기억은, 컴퓨터 책상 아래에서 동화책을 읽고 있던 기억입니다. 베란다에서 햇볕이 들어오는데, 커다란 동화책을 허벅지 위에 올려두고 쪼그려 앉아 글씨를 읽고 있던게 생각나요. 그때 읽던 동화는 <행복한 왕자>였던 것 같아요. 기억 여러개가 겹쳐져서 조작된 내용인지 확신은 할 수 없지만, 까치(...? 제비..?)가 왕자동상의 눈(진짜 눈이 아니고 에메랄드로 만들어진 눈모양의 보석)을 가난한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그런 내용의 동화였던 것 같습니다. 지금생각하니 대사가 섬득하네요. “그럼 내 눈을 떼서 갖다줘...” 여러 가지 동화가 수록된 동화집이었어요. 글씨를 읽고 있는 기억이니까, 아마 꽤 컸던 것 같아요. 혼자서 글을 읽는 모습이 최초의 기억이라고 하니 상담선생님이 당황하던 모습이 생각나네요. 보통 누군가와 관계 맺고 있는 모습을 많이 얘기한다고 하시더라구요.
어릴적 퇴근한 엄마는 늘 방송통신대학의 과제를 하고 있었어요. 강의가 녹음된 테이프를 틀어놓고 뭘 끝도 없이 적던 엄마의 모습이 되게 많이 기억나요. 엄마가 써놓은 글씨는 워낙 흘림체라 어린 저는 겨우 겨우 한 글자씩 읽었던 모습이 생각나고. 공부하는 엄마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엄마가 뭘 하나씩 가르쳐줬어요. 가장 선명하게 기억나는 건 엄마가 시계 읽는 법을 가르쳐주던 장면인데, 시계를 동그랗게 그려놓고 1~12를 동그라미 원 안에 돌려가며 쓰고, 그 바깥에 분 단위를 다시 적어주셨어요. 1 옆에 5, 2 옆에 10, 3 옆에 15 이런 식으로. 왜 그렇게 읽냐고 물어봤던 것 같은데 엄마는 그냥 그렇게 사람들끼리 쓰는 약속이라고 말해줬던 기억이 납니다. 나중에서야 60진법이라는 걸 알게 되었죠. 살면서 중요한 건 그냥 일단 이유 없이 체득한 다음에, 거꾸로 이치에 대해 배우게 되는 것 같기도 해요.
아, 저는 어릴 때 눈높이 국어와 수학을 했는데, 국어는 꽤 잘했던 것으로 기억이 되어요. 어느 순간 진도가 너무 빠르다고 눈높이 선생님이 국어는 그만해도 될 것 같다고 했어요. 초등학교 2~3학년인데, 중학교 진도를 나가게 될 참이라며 국어는 그만두고 수학만 하라고 할 정도. 그냥 계속 하게 해주지 굳이 그만두게 할 건 없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눈높이 선생님이 중학생 강의는 하기 싫었던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반면 수학교재는 맨날 숨겨놓느라 바빴어요. 책꽂이 뒤에 숨겨놓고 교재 잃어버렸어요 거짓말 했다가 선생님이 딱 발견해서 거짓말했다고 한참 혼난 기억이 있지만, 그 뒤에도 종종 베란다에 숨겨놓았다는 것.
뭘 좋아했지. 고래밥을 사면 꼭 과자곽 어느 한 쪽을 뜯는게 아니라 박스의 넓은 면 사이를 가로지르는 뜯는 선을 따라 뜯어 과자를 몽땅 다시 박스에 부은 뒤 들고 다니며 먹는 걸 좋아했어요. 할머니가 점선을 따라 뜯지 않고 옆면을 뜯어버리면 울어버렸어요. 당황한 할머니가 밥풀로 뜯은 박스를 다시 붙여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일요일에 친구 따라 간 교회에서 배운 찬송가도 은근 좋아했던 것 같아요. “주는 나를 먹이시는 목자요~ 나는 주의 어린양. 기쁨으로 나를 먹여주시니 내게 부족함 전혀 없어라” 이 노래 되게 좋아했는데, 제목도 모르고, 가사도 정확한지 잘 모르지만 아직도 가끔씩 흥얼거려요. 아, 초등학교 4학년때는 합창부에 자원해서 들어가기도 했어요.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하는 어린이였네요. 예쁜 아기곰, 화가, 이런 노래 많이 불렀어요. 다니던 피아노 학원에서 MBC창작가요제에서 입상했던 여러 동요들을 가르쳐주셔서. 청음을 하다 음감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음악은 내 길이 아니야 하고 단호하게 뒤로 돌아섰던 기억이 나네요. 실제로 도나 솔음 이외에는 나머지 음들은 잘 구별 못하는 편입니다.
피아노 학원은 꽤 오래 다녔는데, 4학년 쯤 웨딩피치의 방영시간과 피아노 학원 가야하는 시간이 겹쳐서 피아노 그만다니겠다고 했더니 엄마가 한번에 그래 그만 다녀라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엄청 혼날 줄 알고 용기내서 말했는데, 너무 쿨해서 깜짝 놀랐던 기억. 한편으로는 좀 서운하기도 했던 것 같아요. 두고두고 그때 비디오를 사주고 피아노 학원을 다니게 해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웨딩피치에선 데이지를 제일 좋아했고, 세일러 문에서는 우라노스를 제일 좋아했어요. 애들이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캐릭터라서, 자연스레 더 좋아했던 것 같기도 해요. 남들이 너무 많이 좋아하면 굳이 나까지 좋아해주지 않을거야 라는 이상한 심리를 가졌던 아이였어요. 아마 인기 없는 캐릭터들에게 더 동질감을 느끼지 않았나 싶어요. (성격 참....)
5학년 때는 거의 제 인생의 황금기였는데요. 1년 동안 네명씩 모여 모둠(조)을 만드는 활동을 굉장히 많이 했는데, 너무 즐거웠어요. 남자 둘 여자둘 1분단 첫째줄이랑 둘째줄이 책상을 돌려 한 조가 되었죠. 넷이 죽이 너무 잘맞아서 즐겁고 신나는 학교생활이었습니다. 수업시간에 수업 안 듣고 사회과부도 펼쳐놓고 지명 찾는 놀이. 샤프 돌려서 가르키는 방향 나오는 애가 맞기. 이런거 엄청하고, 맨날 킥킥거리다 선생님한테 걸려서 펭귄조는 항상 빨간스티커 1등이었어요. 빨간색은 불량조에게 주는 불명예 스티커였지만, 아무렴 어때요. 이때는 그런 것 상관없이 너무나 즐거웠던 기억만 남아있어요. 모둠원끼리 사이가 너무 좋아서 함께 수영장도 가고. 굳이 안 해도 되는 장기자랑도 준비해서 발표하고 (쿨의 애상에 맞춰서 춤을 췄던 기억) 암튼 넷이 너무 친하게 놀았어요. 제 첫사랑도 이때 제 짝이었고. 둘 다 반에서 키번호 1번이어서 짝이 됐는데, 5학년 11월 쯤 제 전학이 결정되어서 뭔가 좋아한다고 표현도 못하고 급하게 헤어져버렸던 아련한 추억이 있어요. 제가 전학 간 다음에 다른 짝꿍 만들어주시겠다고 담임샘이 말하셨는데 그 아이가 그냥 혼자 앉겠다고 했다고 하더라구요. 연락이 완전히 끊겼다가 재수할 때 싸이월드 열픙 속에 그 아이와 친구가 되고, 방명록에 그 아이가 ‘내가 너 좋아했었다던데’ 글도 남기고 가고...그러다 스물 몇살쯤 다같이 모여 술도 먹곤 했었는데, 어느 순간 또 연락이 다 끊겼어요. 아무튼 즐거운 추억이 많아요. 이때 만난 둘째줄 여자아이는 지금도 연락하고 있어요. 스무살 때 인도 배낭여행도 같이 다녀왔고요.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는데....아마 제 인생 통틀어서 가장 걱정없이 재밌었던 시절이 아니었나 생각해봅니다.
다이어리 속지 모으기와, 현금 모으기에 혈안이 되었있었던 것 같고, 친구들 사이에서 따돌림 당하지 않으려고 여러모로 애쓰면서, 그러면서도 또 못되게 말하는 구석이 많은 어린이었어요. TV보는 건 당연히 좋아했고, 토마토, 미스터큐, 이런 드라마에서 유행한 헤어 아이템들을 많이 하고 다녔어요. 곱창밴드, 유리알끈, 폭이 넓은 머리띠. 어릴때는 SES와 박지윤을 참 좋아했어요. 하늘색 꿈 부를때부터 성인식 활동까지 박지윤은 참 오래 좋아했었네요. 아폴로보다는 밭두렁, 쌀대롱을 좋아했었고, 조르고 졸라서 엄마가 사줬던 다마고찌는 놀이터에서 놀다가 잃어버려서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나요.
쓰다보니 너무나 길어졌네요. 한가지를 오래 깊게 좋아하기보단 얇고 넓게 이것저것 좋아했던 것 같아요. 좋아하는 대상에 대해서도 친구들 의견에 크게 좌우되었구요. 친구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따라서 많이 좋아했었어요. 참 그때부터 오롯이 줏대가 없었어요.
기억이 별로 없었는데.....쓰다보니 주절거리며 방대한 양... 어린이 시절이니까 12살까지만 써야지... 읽고 싶었던 이야기가 맞는지 자신은 없지만, 보내드립니다. 첫번째 읽고 싶은 이야기에 멘션을 보내주셔서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