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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의동 에밀리 Aug 18. 2024

Ch.01 봄의 마녀, 헬렌

[???]

정신 차려!


검은 화면에 누군가의 대사가 뜬다. 화면이 점차 깜빡이더니, 목소리의 주인공이 흐릿하게 보인다.


[???]

괜찮은 거지?


「여기가 어디……」


[???]

하아, 역시 부작용이 있나 보네. 겨우 기력을 되찾게 했더니, 단기 기억상실이라. 난 힐러는 못 되겠어……. 이름은 기억 나?


「응……? 내 이름은…….」


~ 당신의 이름은? ~

설정하지 않으면, 기본 이름 「엘레나」로 진행됩니다.

[ > 확인 ]


이 부분에서 이름을 골라야 하는구나. 아마 예전 같았으면 무슨 이름으로 지을까 고민하다가 시간만 엄청 지났을 텐데. 이제는 사실 이름 따위는 그다지 크게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기본 이름 그대로 정해서 진행하기로 한다. 


「내 이름은……. ‘엘레나’야.」


[???]

휴, 다행이다. 조금씩 기억이 돌아오나 보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말이지-


이제 화면 속의 모든 것이 완전히 선명하게 나타난다. 배경은 숲 속이다. 눈 앞에는 붉은 머리의 소녀가 무언가를 조잘조잘 이야기한다. 머리색과 어울리는 붉은 원피스를 입은 소녀다. 손에는 나무 지팡이를 들고 있고, 지팡이의 위쪽에는 붉은 수정이 둥둥 떠 있다. 온통 붉은색으로 디자인 된 것을 보니, 분명 불을 다루는 캐릭터인 게 틀림없다. 


[??? / 도로시]

엘레나, 도로시를 지켜주려고 회복 마법을 너무 과하게 썼어. 고블린 세 마리 정도는 기본 공격으로도 금방 해치울 수 있었는데. 물론 급습이라 나도 놀라서 화염을 뿌려대는 바람에 이렇게 주위를 온통 재로 만들어 버렸지만…….


꼬마 마녀의 이야기가 끝나자, 안내창이 뜨면서 무언가를 알린다.


~ 화염 마법사 도로시 ~

새로운 길드원 확보!

“작다고 무시했다가는 화염 맛을 각오해야 할 걸?!”

[ > 확인 ]


‘도로시’라는 길드원에 대한 간단한 설명과 함께, 빨간색을 테마로 하는 귀여운 마법 소녀의 캐릭터 일러스트가 함께 나타난다. 

확인 버튼을 누르자 창이 사라지고 주인공이 말을 잇는다.  


[엘레나]

아아, 이제 기억이 나는 것 같아……. 그러니까, 갑자기 나타난 고블린에 맞서서 도로시가 반사적으로 공격마법을 가동했고. 나는 뒤로 물러서서 무작정 회복 마법을 퍼부어 주었고…….


[도로시]

으응. 그런데 엘레나, 힘 조절을 하지 못해서 기절해버렸나봐……. 

일어설 수 있겠어?


~ 당신의 대답은? ~

>  응, 괜찮아.

  역시 조금 어지러운걸.

[ 확인 ]


혹시라도 대답에 따라 전개가 달라지거나 호감도가 깎이는 구조면 어쩌지?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이 정도 선택으로 뭔가가 급격하게 바뀔 것 같지는 않다. 게다가 심지어 게임의 극초반이니까. 공략을 따로 찾아보지 않고 그냥 마음 가는대로 선택하기로 한다.


[도로시]

금방 회복해서 다행이야. 

역시 사제 출신은 회복력도 남다른 걸까?


다행히 도로시의 대답을 보니, 아마 예상이 맞았던 것 같다. 호감도 창도 안 뜨고, 스탯도 아이템도 변화가 없다. 게임 스토리 진행과는 무관하게 소소한 대화를 나누는 정도인가 보다.


[도로시]

어쨌든 이제 고블린은 없으니, 서둘러 가자. 해가 지기 전에 동쪽 숲을 벗어나지 못하면 꼼짝없이 야영을 해야 하니까.


그렇게 말하고는 도로시가 씩씩하게 앞장서 걸어간다. 멀뚱히 멈춰서서 멀어지는 도로시를 보고만 있었더니, 어느 정도 가서는 뒤를 돌아 이 쪽을 바라본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다. 따라가보니 그제야 도로시가 발걸음을 잇는다. 

계속 따라가면서 조작법을 익혀본다. 기본적으로는 다른 모바일 RPG 게임들과 비슷한 구조다. 왼손 엄지로 상하좌우 키패드를 움직여 이동하고, 화면을 조정해서 시야도 위아래나 사이드로 옮길 수 있다. 혹시나 싶어서 컨트롤러를 연결해보니 잘 작동된다. 분명 모바일에 최적화해서 만들었을 텐데, 개인적으로는 이런 게임은 늘 컨트롤러가 더 편하다.

기본적으로는 오픈 월드 게임인 모양이다. 맵이 끊기지 않았는데도, 도로시를 한참 따라가다 보니 지역 변경을 알리는 글자가 떠오른다.


~ 동쪽 숲 ~


실제 세계에서도 이렇게 자기가 있는 지역의 이름을 시시각각 알아볼 수 있으면 얼마나 편리할까? 아무리 스마트폰으로 지도를 확인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는 길찾기란 은근히 걸리적거리는 기분이다.

한참을 걷던 중, 앞장서던 도로시가 탄성을 내뱉는다.


[도로시]

와아-! 엘레나, 여기 좀 봐봐.


이전까지 쭉 숲을 이루던 울창한 나무들 대신, 난데없이 너른 풀밭이 나타난다. 저편에는 작은 집도 한 채 서 있다. 

풀밭으로 진입해서 주위를 둘러본다. 나무들에 빙 둘러져 감싸인 모습에, 마치 비밀스러운 공간을 찾아낸 듯 한 기분이 든다.


[도로시]

멋진 정원이네-


자세히 보니 풀밭에는 꽃이며 작은 관목이 자연스러우면서도 조화를 이루고 있다. 아마 저 작은 집의 주인이 정성껏 가꾼 정원이리라. 이 공간의 이유 모를 무해함이 느껴져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도로시]

앗, 엘레나! 저기 누가 있어.


도로시의 말이 끝나자, 한 여인이 집 뒤편에서 나타난다. 머리에는 챙 넓은 밀짚모자를 쓰고, 손에는 면장갑을 꼈다. 걸을 때마다 원피스가 바람에 기분 좋게 살랑거린다. 

여인이 발을 옮길 때마다, 디뎠던 땅에서 작은 꽃이 피어난다. 이 쪽도 마법과 관련된 인물인가? 분위기상 평화 그 자체인 것 같아서 전투 대상은 아닌 듯 한데…….

전개가 어떻게 될 지 가늠하는 사이, 그녀가 인기척을 느꼈는지 이 쪽을 돌아본다. 흠칫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

안녕하세요.


[도로시]

우와, 굉장한 미인-


[???]

후훗. 칭찬은 고맙게 받을게요. 그나저나 당신들, 어떻게 여길 찾아냈는지 궁금한걸요?


[도로시]

델피온 황성으로 가려고 동쪽 숲을 지나던 길이었어요. 아참, 제 이름은 도로시, 화염 마법사예요. 이 쪽은 엘레나, 길드 마스터고요. 아직 두 명 뿐인 길드이지만, 헤헤.


[??? / 헬렌]

길드라니, 흥미로운데요? 만나서 반가워요. 나는 「봄의 마녀」 헬렌이라고 해요. 델피온 황성이라면 조금 더 가야 할 텐데, 회복을 돕는 차를 마시고 가지 않겠어요? 마침 초콜릿 쿠키를 구워둔 참이기도 하고요.


다행이다. 적 타입이 아니라 일반적인 NPC였던 모양이다. 아직 캐릭터 움직이고 점프하는 것 정도밖에 익히지 못했는데, 벌써부터 전투를 하라고 하면 스트레스를 받을 뻔 했다. 

아니, 그보다 전투에 반강제적으로 내몰리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랄까? 나는 그저 RPG 게임 속 세상을 돌아다니고 싶을 뿐인데. 이 게임을 선택한 이유도 그래서였다. 전투보다 힐링 그 자체의 여행을 컨셉으로 하는 RPG라니, 딱 내가 찾던 타입이었다.


[도로시]

초콜릿 쿠키? 당연히 좋죠!


헬렌의 우아한 손동작에, 정원 한 켠에 놓여 있던 테이블과 의자가 펼쳐지더니 금세 근사한 야외 다과회 모습이 갖추어진다. 작은 집 문이 열리고, 쿠키와 티 세트를 실은 트레이가 저절로 움직여 테이블 쪽으로 다가온다.

세 개의 의자 가운데 두 개에는 도로시와 헬렌이 하나씩 앉고, 나머지 한 개의 의자를 화살표가 반짝이며 가리킨다. 빈 의자에 가까이 가보니 ‘앉기’로 상호작용 가능한 버튼이 뜬다. 도로시와 헬렌을 따라서 테이블에 함께 앉아본다. 


[헬렌]

제가 좋아하는 블렌딩의 홍차예요. 회복을 돕는 ‘봄의 생동력’을 함께 우려내서 꽃향기가 살짝 배어 있답니다. 초콜릿 쿠키와 곁들이면 더 좋구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로시가 쿠키를 집어들어 한 입 베어문다.


[도로시]

헙! 너무 맛있어!


[헬렌]

후훗, 입에 맞으시다니 다행이네요. 엘레나도 한 입 먹어보지 않겠어요?


~ 당신의 대답은? ~

> 그렇다면, 사양 않고-

  아쉽지만 다이어트 중이라서요.

[ 확인 ]


게임에서까지 다이어트를 할 필요가 있을까? 사양 않고 먹기를 선택하자, 엘레나가 다과를 먹는 모션이 나타나면서 대화가 이어진다.


[엘레나]

(홍차와 쿠키라……. 달콤한 초콜릿에 고소한 버터 향이 입 안 가득 채워져.)


[도로시]

정말 환상적인 맛이에요! 정원도 정말 멋지고요. 햇살도 좋고, 봄바람도 따뜻하고, 꽃도 예쁘고……. 종종 놀러 와도 될까요?


[헬렌]

쿠키가 입에 맞아서 다행이네요. 그렇지만 아쉽게도 다음을 기약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도로시]

네? ……혹시 제가 쿠키를 너무 많이 먹었나요?


[헬렌]

하핫, 그런 게 아니에요. 저의 마녀령에는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주문이 걸려 있거든요.


[도로시]

으음……. 아름다운 장소라서 불청객이 많았던 건가요?

그런데 저희는 이렇게 들어왔고……. 설마 저희도 불청객……?


[헬렌]

하하, 걱정하지 말아요. 불청객이었다면 쿠키를 내어드릴 리 없잖아요?

흐음, 어디서부터 설명하면 좋을까요. 우선 이 마녀령은 제가 봄의 기운을 한껏 살려놓은, 아주 아름다운 장소인 것은 맞아요. 

하지만 보통의 사람들이 이 곳에 자주 드나들면 자기도 모르게 위험한 상태에 빠져 버린답니다. 겨울과 여름, 가을이 없이 봄만 추구하는 행위나 다름 없거든요.


[엘레나]

봄만 추구하는 행위라니, 어렵네요……. 


[헬렌]

마녀령의 바깥은 자연의 순리를 따라서 사계절이 흘러간답니다. 아주 당연한 일이죠. 하지만 저의 마녀령은 늘 봄이에요. 봄을 섬기는 마녀가 되기로 선언한 이후로 단 한 번도 계절이 바뀐 적이 없거든요.

하지만 저와 같이 특이한 경우가 아닌 이상, 보통의 인간은 자연의 힘을 거스를 수 없어요. 그러니 "난 봄이 좋아"라며 다른 계절을 아무리 외면하더라도, 결국에는 자의와 상관 없이 계절은 닥쳐온답니다. 현실을 외면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변화에 취약해지도록 만들 뿐이에요.


[엘레나]

결국에는 겨울이든 여름이든, 버텨내야 한다는 말씀이시군요.


[헬렌]

비슷해요. 

다행히도 자연이 주는 시련은 비록 가혹한 시기는 있을지언정 유한하답니다. 매일이 혹독한 겨울이지만은 않으니까요. 봄은 반드시 오기 마련이에요.

이 곳 「봄의 마녀령」도 예외적으로 봄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진입이 허락되어 있어요. 대개는 기나긴 겨울에 지친 사람들에게 열리곤 하는데, 여러분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었을지…….


[엘레나]

(어려운 이야기……. 그러나 왠지 위로 받는 기분이야.)


[도로시]

으음, 우리가 황성에 가느라 조금 지친 건 맞긴 한데……. 

그래도 매일이 봄날인 이곳이라면 문제 없지 않을까요? 헬렌이 지켜주니까요!


[헬렌]

글쎄요.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요?

아, 좋아요. 저 쪽에 피어 있는 장미 한 송이를 가져다 주겠어요? 이 정원에 장미는 많으니까요.


[도로시]

맨손으로? 도로시는 아직 쿠키를 더 먹고 싶은데…….


~ 당신의 대답은? ~

> 내가 가져올게.

  충분히 먹지 않았어?

[ 확인 ]


[도로시]

역시 엘레나는 친절해!


~ 봄의 마녀에게 장미를 (0%) ~

새로운 퀘스트 발생!

정원에 피어 있는 장미를 가져다 주자.

[ > 수락 ]


퀘스트창을 확인하고 정원을 둘러보니, 한 켠에 장미밭이 보인다. 다가가니 ‘꺾기’로 상호작용이 가능하다.


~ 봄의 마녀에게 장미를 (100%) ~

정원에 피어 있는 장미를 가져다 주자.  COMPLETE!

[ > 확인 ]


[엘레나]

(앗! 꺾자마자 시들어 버렸다…….)


[헬렌]

놀랄 것 없어요. 당연한 일이니까요.

아시다시피 저는 봄의 마녀. 제 영역의 계절이 봄에 머물러 있도록 하는 힘의 근원은 저의 마력이에요. 따라서 저의 땅에 뿌리 내리고 있던 장미가 타인에 의해 꺾이면, 별도의 마력이 투입되지 않는 한 봄의 생명력을 이어가지 못해요.


[도로시]

그런…….


[헬렌]

비자연적으로 이어지는 봄에 기대기만 하면 이런 결과를 초래한답니다.

그런데 변화에 취약해지는 것과는 별개로, 봄이 너무 길어지면 오히려 봄을 망각하게 되는 상황도 발생한답니다. 그리고 「봄의 마녀」로서 제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봄의 매력을 잊어버리는 쪽이 더 큰 문제예요.

봄은 정말 아름다운 계절이지만, 우리를 더욱 단단하게 해 주는 것은 바로 사계절의 순환이에요. 봄을 기다리게 하기 때문에 겨울을 버텨낼 힘을 가지게 되고, 또 여름이 찾아오더라도 이 다음에 올 계절들을 기억해내며 삶을 지속할 수 있어요.


[엘레나]

그러니까, 사계절이 순환하기 때문에 봄이 봄 다워지는 셈이군요?


[도로시]

흐으응, 사계절의 순환이라…….


도로시의 대사를 마지막으로, 화면이 검은색으로 바뀌면서 글씨가 뜬다.


「그 후, 우리는 한참 동안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래도 궁금한 것은 잔뜩 남아 있었다. 헬렌은 어쩌다 ‘봄의 마녀’가 되었을까? 왜 하필이면 동대륙에, 그것도 델피온 제국 동쪽 숲에 마녀령을 선언했을까? 」


[헬렌]

이런, 제가 여러분을 너무 오래 잡아두었군요.

그래도 이걸 가져가면 황성에 좀 더 빨리 닿을 거예요.


~ 봄바람이 깃든 스크롤 ~

‘봄의 마녀’의 주문이 걸려 있다. 동쪽 숲에서 사용 시 인접 지역으로 즉시 이동.

[ > 확인 ]


~ 황성으로 가자 (0%) ~

새로운 퀘스트 발생!

x 나리엔 마을로 이동

x 델피온 황성으로 이동

[ > 수락 ]


[도로시]

고마워요, 헬렌! 홍차와 쿠키, 정말 맛있었어요.


도로시의 말에 헬렌이 손을 흔들며 미소를 보인다. 

아마 봄의 마녀 에피소드는 여기까지인 것 같다. 다음은 헬렌이 준 아이템을 사용해서 인접 지역으로 이동하고, 나리엔 마을로 가는 순서겠지? 오픈월드 치고는 메인 스토리 위주로 진행을 따라가기 쉽게 만든 것 같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게임 속이라지만 봄의 향기에 너무 취했던 걸까? 어쩌면 ‘헬렌’이 했던 이야기들이 조금은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하다.

따뜻했던 대화를 뒤로 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 ☆ ────────

<Ch.01 봄의 마녀, 헬렌>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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