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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의동 에밀리 Sep 01. 2024

Ch.02 선택 받은 사제 (2)

[엘레나]

이건…… 평소 느낄 수 없었던 감각……!

마력이 급격하게 소진되고 있어?!


자동으로 스토리가 전개되고 있어서, 무슨 버튼을 누르지도 않고 있었다. 그런데 스토리상의 내용 뿐만이 아니라 화면 한 쪽에 있는 마력 게이지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이래도 괜찮나? 혹시 이러다가 진짜로 무슨 마법을 써야 한다거나 전투를 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어쩌지? 마력 감소를 제어할 수 있는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 건가?

고민하고 있는 사이, 엘레나의 멘트가 뜬다.


[엘레나]

(아무리 회복을 걸어도 체력이 회복되는 게 느껴지지가 않아…….

평소처럼 체력 방전 상태를 먼저 가늠하고 부족한 만큼만 채워주는 방식을 택했어야 했나? 이래서는 저 쪽이 충분히 원기를 회복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내가 마력이 방전되고 끝나버릴 지도 모르겠어.

이제 보니 저 드래곤, 단순히 비어 있는 수준이 아니라 어쩐지 깊고 아득한 공허함마저 느껴지는걸. 부어도 부어도 도저히 채울 수 없을 것 같은, 마치 바싹 말라버린 거대한 호수 같은…….

애초애 평범한 힐러가 드래곤에게 회복 마법을 시도한 것부터가 미련한 결정이었던 걸까?)


~ 당신의 선택은? ~

> 최선을 다한다

  하는 데까지만 한다

[ 확인 ]


드디어 선택창이다. 여기서 선택지가 갈리나? 딱 보기에는 두 번째를 택해야 엘레나가 살 것 같지만, 그런 얕은 수는 보통 배드엔딩으로 이어지기 마련이었다. 이럴 때는 무조건 몰빵이지.

게다가 지금은 게임 초반. 아무리 양자택일 형식이라고는 하지만, 뭘 선택해도 이러나 저러나 스토리는 큰 변화 없이 전개될 확률이 99%다.


[엘레나]

그래도 난… 어떻게든 살리고 말겠어!


엘레나의 손에서 나오던 회복 마법의 빛이 조금 더 강해진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어떤 검은 포털 같은 게 갑자기 펼쳐지더니 엘레나가 그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이어지는 아찔한 적막. 마치 우주처럼 새까만 공간 속에 엘레나만 덩그러니 보인다.

그 가운데 어떤 음성이 들려온다.


[ ??? ]

기특하구나, 나의 사제여.

너의 고결한 희생에 걸맞는 보답을 주마…….


~ 선택 받은 사제 ~

새로운 칭호 획득!


~ 회복의 반지 ~

회복 계열 마법 시전 시 마력 소모량 없음. 

「선택 받은 사제」 칭호 획득 시 자동 장착.


[엘레나]

(……?! 이게 무슨 - )


순간적으로 엘레나의 품 안에서 눈부신 빛이 생겨나더니 이내 폭발하면서, 주위를 감싼 어두운 장막이 찢어지듯 걷힌다. 그러자 허공에 떠 있게 되어버린 엘레나가 추락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장막이 걷히자 보이는 인간형의 드래곤. 그는 기력을 회복하자마자 전투 태세를 갖춘다. 그리고는 능숙하게 손을 뻗어 검은 악령을 향해 거대한 화염을 내뿜는다. 어마어마한 열기에, 마지막 남은 악령이 순식간에 재로 변한다.

드래곤은 곧장 방향을 틀어, 추락하던 엘레나를 향해 빠른 속도로 비행하고 사뿐하게 받아낸다.


[불의 드래곤]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져서는, 다 죽어가던 날 구해주다니. 천사님인가?


속도를 줄이며 안정적으로 착지하는 드래곤.

엘레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드래곤의 품의 안긴 채 그대로 굳어 있다. 붉은 머리칼에 붉은 눈동자. 언뜻 보면 그저 수려한 외모의 남성일 뿐이지만, 눈동자가 마치 뱀이나 고양이처럼 세로 모양이다.


[엘레나]

(이 자가, 불의 드래곤……)


[도로시]

엘레나! 괜찮은 거야, 엘레나?


[엘레나]

으응…….


도로시가 부르는 소리에, 그제야 엘레나는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불의 드래곤에게 “공주님 안기” 자세로 안겨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다.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눈이 둥그래진다.


[엘레나]

으, 으앗!

저기, 그, 이제 좀 내려주지 않겠어……?


그러고 보니 이 게임, 처음에 남녀 성별을 선택할 수 있던데. 남자로 선택했으면 남자 캐릭터가 드래곤에게 안겨있는 전개였으려나? ‘천사님’이라고도 불리고? 어쩌면 그 편이 더 깜짝 놀랐을 지도…….


[불의 드래곤]

분부만 내려줘, 천사님. 


[도로시]

뭐? 천사님?


[불의 드래곤]

소개가 늦었어. 난 ‘제이크’라고 해. 아까 봤겠지만 ‘불의 드래곤’이고.


[도로시]

악령들은……?


[제이크]

이제 없어. 다 해치웠거든. 

왜 쫓기고 있었는지는, 음, 긴 얘기가 될 것 같네. 

그나저나 죽음의 문턱까지 간 드래곤을 살려내다니, 굉장한데? 보통의 인간이라면 드래곤의 상처 하나 아물게 하는 것마저 벅찰 텐데 말야.


[엘레나]

그건, 나도 잘…….


엘레나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화면이 엘레나의 왼손을 잡는다. 어느 새 못 보던 황금색 반지가 끼워져 있다. 반짝이는 수정이 세팅되어 있다.


[제이크]

뭐, 이유야 어찌되었든 상관 없어. 

난 쫓기던 몸이라 더 이상은 갈 데도 없고, 천사님이나 따라다닐래. 


[도로시]

뭐? 이렇게 막무가내로? 게다가 쫓기고 있었다니, 위험하잖아!


[드래곤]

음, 아쉽게도 드래곤을 도와준 이상, 아주 안전하지는 않을 텐데.

차라리 드래곤이랑 동행하는 편이 나을 거야.


[도로시]

그런……! 그리고 우리, 나름 길드라고!


[제이크]

아, 길드라고? 그럼 나도 끼워줘. 그래도 될까, 천사님?


[도로시]

엘레나, 어떻게 좀 해 봐…….


[제이크]

왜, 길드에 미남이 한 명 있는 것도 괜찮지 않아?


제이크의 대사를 마지막으로, 일러스트와 함께 길드원을 확보했다는 알림창이 뜬다.


~ 불의 드래곤 제이크 ~

새로운 길드원 확보!

“내 도움이 필요한 거야, 천사님?”

[ > 확인 ]


~ 도로시의 여행책자? (100%) ~  COMPLETE!

도로시를 따라가 보자. 어쩌면 좋은 일이 생길 지도?

히든 보상 : 새로운 길드원 「제이크」 획득

[ 확인 ]


아, ‘도로시의 여행책자’ 퀘스트를 완료하면 제이크를 얻는 방식이었구나? 그 때 수락한 다음에 빵집까지 도로시를 따라가기는 했지만, 솔직히 저 퀘스트는 까먹고 있었다. 생각보다 꼬리가 긴 퀘스트인걸.

이제 남은 퀘스트가 뭐가 있었지? 한 번 볼까나…….


~ 달콤한 과일 냄새 (66%) ~

파운드 아주머니에게 과일을 가져다 드리자. (수행지역 : 나리엔 마을 과수원)

v 체리 3 바구니 (0/3)

v 블루베리 3 바구니 (0/3)

x 마담 파운드에게 과일 전달

[ > 확인 ]


맞다, 아까 이거 하느라고 과일 따고 있었지. 그럼 다시 파운드 베이커리로 돌아가야겠다. 과수원이 나리엔 마을 남쪽이었으니까, 북쪽으로 가야지.

이제는 나리엔 마을 지리도 조금은 눈에 익는다. 눈에 띄는 큰 나무나 울타리, 띄엄띄엄 보이는 건물 같은 것들을 이정표 삼아서 길을 찾아간다. 이런 게임은 맵에 있는 건물들을 볼 때마다 궁금해진다. 무슨 용도의 건물일까? 창고? 헛간? 주택? 집이라면 누가 사는 집일까?

아무튼 어디를 가도 평화로워 보이는 자연을 테마로 한 풍경이다. 게다가 아까는 도로시만 엘레나를 졸졸 따라다녔는데, 이제는 제이크도 따라다니고 있다. 엘레나가 걸으면 걸어오고, 빠르게 대시하면 대시로 따라오고, 거리가 좀 멀어졌다 싶으면 알아서 뛰어온다. 과연 무려 두 명의 길드원을 거느린 길드 마스터다. 

걷다보니 어느새 베이커리가 나타난다. 빵집 간판이 있어서 찾기가 쉽다. 진입하자 맵이 바뀌는 게 표시된다.


~ 마담 파운드의 베이커리 ~


베이커리의 카운터 쪽에 마담 파운드가 서 있다. 다가가니 상호작용으로 ‘과일 바구니를 가져왔어요’를 선택할 수 있다.


~ 달콤한 과일 냄새 (100%) ~

파운드 아주머니에게 과일을 가져다 드리자. (수행지역 : 나리엔 마을 과수원)

v 체리 3 바구니 (0/3)

v 블루베리 3 바구니 (0/3)

v 마담 파운드에게 과일 전달  COMPLETE!

[ > 확인 ]


[파운드]

어머, 손님들이 돌아오셨네! 조금 시간이 걸리는 것 같아서 걱정했는데, 고마워요!

아? 잘생긴 총각도 한 명? 이럴 게 아니지, 따뜻한 차라도 한 잔 내올게요.


[제이크]

거 봐. 길드에 미남이 한 명 있으면 좋다고 하지 않았어?


[도로시]

네에~ 네에~ 그러네요.


도로시는 이제 포기했다는 듯이 한 귀로 듣고 흘리는 모양이다. 과수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벌써 친해진 걸까?

그나저나 ‘달콤한 과일 냄새’ 퀘스트는 보상이 없는 퀘스트인가 보다. 단순히 스토리 전개를 위한 메인 퀘스트인가? 다른 게임들 같았으면 돈이든 아이템이든 보상이 있었을 텐데. 하긴, 생각해 보면 실제 세상에서는 호의로 누군가에게 뭘 해 줬다고 해서 돈을 받는다거나 하지 않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마담 파운드가 베이커리의 테이블 중 하나에 차를 내어놓는다.


[파운드]

나리엔 우유를 곁들인 특제 밀크티예요. 우리 마을, 낙농업으로 유명한 건 알고 있죠?

난 이제 콩포트를 만들어야 해서 좀 가 볼게요.


그런 말을 남기고는 카운터 뒤로 퇴장한다. 

테이블의 의자 4개 중 두 군데에는 도로시와 제이크가 자리에 앉고, 남은 두 의자에 화살표가 뜬다. 다가가니 상호작용으로 ‘앉기’가 된다.

가만히 앉아 있으니 도로시, 제이크, 엘레나가 차를 홀짝이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연출된다. 이런 면은 어쩐지 <동물의 숲> 같아서 또 마음이 편안해지네. 

보글보글 소리가 들려온다. 마담 파운드가 콩포트를 만드는 소리구나. 현실이었다면 아마 블루베리와 체리의 달콤한 향이 베이커리의 홀을 가득 채웠겠지?

그렇게 평화를 즐기고 있었는데, 잠시 후에 마담 파운드의 대사가 뜬다.


[마담 파운드]

저기, 혹시 한 명만 도와줄 수 있어요? 콩포트 맛을 볼 사람이 필요해서 말이지.


~ 당신의 선택은? ~

> 어쩌면 제가 -

  (내가 나서도 되나?)

[ 확인 ]


이거 어쩐지 미니게임의 냄새가 나는데? 콩포트 만들기를 놓칠 수는 없지.

그런데 의외로 도로시의 대사가 뜬다.


[도로시]

저요! 제가 갈게요!


잽싸게 기회를 낚아채고 주방으로 달려가는 도로시. 어찌되었든 간에 이렇게 될 일이었던 걸까?

홀에는 엘레나와 제이크, 둘만이 남았다. 곧이어 제이크가 말을 건다.


[제이크]

있잖아, 천사님. 그 반지 말이야.


[엘레나]

응?


[제이크]

강한 신성력이 깃들어 있는 것 같은데. 맞지?

드래곤은 감각이 뛰어나거든. 저 쪽의 꼬마 마녀님과는 달라.


[엘레나]

잘 모르겠는걸…….

널 구해주고 나니까 어느새 손가락에 이미 반지가 있었어.


[제이크]

흐응, 그런 거였나.

혹시 짐작 가는 건 없고?


[엘레나]

글쎄. 어떤 목소리가 나에게 이걸 보답으로 주겠다고 하는 건 들었어. 어쩌면 신의 음성이었으려나?


[제이크]

그렇군……. 있잖아, 드래곤은 수명이 길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구전으로 전해 듣거든? 인간은 ‘전설’이라고도 하는 이야기들 말야.

들은 이야기들 중에는, 간혹 신의 선택을 받는 자가 나타난다는 말도 있었어. 


[엘레나]

신의 선택을 받는 자?


[제이크]

불리우는 이름은 여러가지였어. 때로는 ‘용사’라고도 하고, 또 어떤 시대에는 ‘성녀’라고도 하고.

물론 신은 변덕스러우니까, 언제 어떤 이유로 선택을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야.


[엘레나]

그런 신성모독적인 말을 마음 편하게도 하는구나.


[제이크]

뭐 어때. 신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니까, 드래곤은 알 바 없지. 신을 모시는 드래곤, 들어본 적 있어?


[엘레나]

맞는 말이기는 하네.

그럼 내가 성녀라든지, 그런 게 되어버린 걸까? 난 그저 평범한 사제 출신의 힐러인걸. 성녀라면 뭔가 더 위대한 일을 하고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제이크]

의무감 같은 걸 느끼는 모양인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으려나?

생판 남이었던 나를 살려주기로 한 것도 천사님이었고, 그렇게 해서 신의 눈에 든 것도 천사님이 해낸 일이잖아.


[엘레나]

하지만……. 정말 이대로 평소처럼 지내도 될까? 그러다가 신의 노여움을 산다든지…….


[제이크]

그렇게 속 좁은 신이라면, 천사님이 뭘 하든 성에 안 찬다며 노여워할 걸?

신 따위는 잊고, 마음 가는대로 살아. 자기 편할대로인 변덕쟁이 신 따위, 무슨 상관이야? 오히려 신은 그 쪽을 원할지도 몰라. 자신이 선택한 사제가 어떤 행보를 보일지를, 흥미롭게 내려다보고 있을 지도……?


[파운드]

거기 두 손님들도, 괜찮다면 와서 좀 거들어 줄 수 있어요?

3단 케이크 장식대가 좀 높아서 말이에요.


[제이크]

네~ 바로 갑니다, 마담!


그러고는 제이크가 고개를 돌려 엘레나게 눈을 찡긋한다.


[제이크]

그냥 마음이 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봐, 천사님.

드래곤은 지혜로운 종족이니까 믿어도 좋아.


그런 말을 남기고는, 제이크가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 너머의 부엌으로 향한다. 도대체가 알 수 없는 캐릭터다. 천사님 어쩌고 하면서 대뜸 따라나서는 걸 보면 한없이 가벼운 것 같다가도, 장수하는 종족의 특징 때문인지 어떤 연륜 비슷한 게 느껴지기도 한다.


[도로시]

엘레나? 뭐 해, 빨리 치즈 케이크를 완성해야 한다구~

축제에 바로 가져가야 한단 말야.


[엘레나]

응, 지금 갈게!

……그래, 우선은 다 잊고, 축제를 즐겨야겠지.


그리고는 제이크를 따라서 카운터 너머로 엘레나가 퇴장한다. 

이제 정말 미니게임이 시작되려나? 예를 들면 콩포트 만들기라든지…….



──────── ☆ ────────

Ch.02 선택 받은 사제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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