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월 18일
아이가 스와들업을 졸업했다.
그런 이야기들을 들었다. 스와들업이고 옆잠베개고 간에, 아기가 졸업을 못 하는 게 아니라 엄마가 못 하는 거라고. 이러나 저러나 안 쓰면 그 날로 졸업인 수면 아이템들이라는 소리였다. 하루는 그 말에 동의하며 스와들업을 안 쓰고 그냥 재우려고 했는데, 아이가 아예 입면부터 못 하기에 역시 졸업을 유예했었다.
그런데 그 유예가 생각보다 너무 길어졌다. 200일이 되어가는데도 아이는 스와들업을 입어야만 잠들었다. 그 와중에 아이는 무럭무럭 자랐다. 신생아 때는 50cm 키에 맞는 옷을 입었는데, 이제는 75cm 사이즈 내복을 입는다. 다리까지 싸매는 스와들업은 점점 작아졌다. ‘팔이 안되면 다리라도 풀어줘보자’라는 생각으로 겸사겸사 다리만 구멍이 뽕 뚫려 있는 스와들컷을 입히고 재우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글에서는 스와들컷도 스와들업의 일종인 셈이라고 생각해서 둘을 혼용해서 썼다.)
점차 도전을 추가했다. 어느 날 부터인가는 스와들컷의 한 팔만 지퍼를 내려서 자유롭게 해 놓고 재우기 시작했다. 아이는 쪽쪽이를 물어야 잠들곤 했는데, 한 쪽 팔이 자유로워졌더니 이제는 확률적으로 쪽쪽이를 ‘뽁’ 잡아빼버렸다. 그러면 스스로 잠이 깨버리는 상황이 발생했다. 짐작하건대 내복만 입히고 재우면 양 쪽 팔이 모두 자유로워지므로 쪽쪽이 셀프 뽑기의 리스크는 곱하기 2배가 될 터였다.
한 쪽 팔만이라도 묶어두자는 생각으로, 오른팔은 여전히 스와들컷에 가둬둔 채 왼팔만 엄마나 아빠가 손으로 붙들어서 재워주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파닥파닥을 방지할 수 있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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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아이는 엄마아빠가 잡고 있지 않은 손, 그러니까 스와들컷에 들어있는 손을 쫍쫍 빨아보려고 자꾸만 입으로 가져갔다. 막수 끝나고 트림 시켜주려고 어깨 위에 얹어놓고 다니면 백 퍼센트 손을 빨았고, 누워서 쪽쪽이를 빨고 있을 때에도 자꾸만 손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다 보면 어느 새 쪽쪽이를 밀어서 자기 손을 빨고 있기도 했다. 그 결과 오른손의 스와들컷은 쪽쪽이를 물고 있었건 아니었건 간에 늘 침으로 축축해지곤 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스와들컷을 하나 더 구매하고 싶지는 않았다. 조금만 버티면 졸업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그래서 그냥 축축한 천과 함께 단 한 벌의 스와들컷으로 버텨냈다. 나 같으면 축축해서 잠 다 깰 것 같은데.
아무튼 그렇게 한 팔만 빼 놓고 재워주곤 했는데, 그마저도 역부족인가 싶은 밤들이 있었다. 아이는 5개월 막바지에 이제 드디어 통잠을 자기 시작하나 싶었으나, 만6개월에 접어들면서 밤중깸이 엄청나게 잦아졌다. <삐뽀삐뽀 119 소아과> 책에서 이르기를 만6개월이 되면 시련의 시기가 찾아온다고 해서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는데, 나는 이제 이 책을 예언서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다 하루는 아이가 너무너무 자꾸 깨서, 아예 스와들컷이랑 그 안에 입혔던 메쉬 나시까지 다 벗기고 스와들업으로 재포장을 한 다음에 다시 재웠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아침까지 푹 자는 게 아닌가? 이 사건 때문에 우리 부부는 아이의 밤중깸이 다른 이유가 아니라 스와들업이 없어서 생기는 허전함 때문이라고 추측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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잦은 밤중깸과 함께 이앓이가 찾아오자, 더 이상 버텨낼 재간이 없어졌다.
신생아도 2~3시간에 한 번씩 배고파서 깼는데, 이제는 1시간에도 몇 번씩 깼다. 그런데 이제는 깨서 우는 소리가 “흐에엥~!”으로 시작하지 않고, 진짜 어디를 세게 찧어서 아파 우는 것 같은 빡센 울음소리로 나타났다. 눈은 아예 뜨지도 않고, 오히려 꼭 감아서 정말 ‘>ㅁ<’ 하는 이모티콘이랑 똑같은 얼굴이 되어서 울었다.
이것은 분명 이앓이였다. 말로만 듣던 그 이앓이……. 잇몸 찢는 고통에 아파 우는 (것으로 추정되는) 아이가 가여워서, 그저 세워 안아 들고 얼러줄 뿐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때는 내가 아무리 자다 깨서 아이를 달래주고 있다지만 하나도 피곤하거나 번거롭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가엾고 귀여울 뿐이었다. 세상에, 이가 나고 있다니. 이가 하나도 없었는데, 이제 서서히 어린이가 되어가고 있구나?
그러나 그 후, 이앓이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밤중깸의 비중이 점차 높아져갔다. 이앓이(로 추정되는 것) 때문에 울 때는 울음소리가 평상시랑은 확연하게 달랐는데, 이앓이(로 추정되는 것) 때문이 아닌 울음으로 깨는 일이 훨씬 빈번해졌다. 말도 못 하는 만6개월 아기한테 “혹시 앞니 나는 것 때문에 아프니?”라고 물어볼 수도 없으니, 어떻게 할 수도 없고.
그렇게 새벽 서너 시에 깨서 한 시간 동안 울기도 하고, 아예 밤새도록 1시간마다 깨서 울기도 하는 일이 잦아지자, 나도 남편도 아침이 되면 퀭한 눈이 되었다. 낮에는 아이도, 남편도, 나도, 온 가족이 심신이 지쳐서 쉽사리 피곤해하며 하루를 버티다가 저녁이 되었다. 그리고 밤에는 또다시, 후우…….
우리 부부는 번갈아서 당번을 서기로 했다. 아이 방으로 삼았으나 여전히 창고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끝방에 이불을 깔았다. 하루는 내가 안방에서 자고, 다음날에는 끝방에서 자고, 하는 식으로 아이를 밤에 돌보기로 했다. 한 사람이라도, 그리고 격일로라도 휴식을 취해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끝방에서도 아이 울음소리가 아예 안 들리지는 않아서, 간혹 1~2시간씩 울고 있으면 아기띠를 들고 달려가 구원투수 겸 교체선수로 활약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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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번을 선 지 사흘 정도 되던 날, 남편에게 ‘점진적 분리수면’을 해보는 것은 어떻겠냐고 슬쩍 제안했다.
“점진적…… 분리수면?”
“응. 저기 끝방에 일단 루나 침대를 갖다 놓구. 그 옆에 한 명씩 지금처럼 번갈아 이불 깔고 자면서 돌봐주는 거지. 그러다가 하루는 둘 다 그냥 안방 가서 자구. 또 그렇게 격일로 당직 서다가, 그 다음에는 이틀씩 끝방을 비우고.”
“흐음…….”
“한번에 싹 분리해버리면 루나도 우리도 낯설 수 있겠지만, 이런 방식으로 하면 될 것 같지 않아?”
불과 얼마 전까지도 분리수면에 대해서는 “이 쪼끄만 애를 따로 재우려니 마음이……”라고 하던 남편이었다. 그러나 며칠 수면부족에 시달렸던 탓인지, 무척 솔깃해하는 게 훤히 보였다. 하지만 범퍼침대와 홈캠을 끝방으로 옮기고, 또 끝방에 있던 가구들을 안방으로 옮기고 할 일이 상상만으로도 벅찼다. 그렇게 제안은 제안으로 남았다.
그래도 2교대 당직 자체는 여전히 이어졌다. 아이가 한동안 목청껏 울고 있으면 그 소리를 못 들을 수가 없지만, 별도의 방에 누워 있으면 은근히 마음이 편해지는 덕분에 수면의 질 자체는 확실히 개선되었다. 그 동안 아이와 함께 같은 방에서 자고 있으면 어쩐지 숨어서 자는 듯한 모드가 되었던 것이다. 숨소리도 조그맣게, 뒤척일 때도 스을쩍.
너무 지레 겁먹고 있나 싶었는데, 어느 날은 머리끈을 협탁에 두는 그 작디 작은 ‘틱’ 소리에 아이가 깨서 울었다. 역시 그 동안 내가 오바하고 있던 게 아니었다. 아니, 문 닫는 소리도 아니고, 무게가 5g 이나 될까 싶은 머리끈 놓는 소리에 반응하는 소머즈 급 잠귀라니.
멀찌감치 떨어진 방에서 이불 깔고 누워 있자니, 드디어 자유 속에서 잠을 청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불? 마음껏 이리 덮었다 저리 덮었다 해도 돼! 전자책? 마음껏 전원 버튼을 딸깍거려도 괜찮아! 자세가 불편해? 오른쪽으로 구르고, 왼쪽으로 구르고, 편한대로 해! 나는 원래 딱딱한 바닥에서는 잠을 정말 못 자는 편이었는데, 요가 매트랑 이불 한 장씩 겹쳐 깔아서 만든 이 잠자리는 어쩐지 이스턴 킹 사이즈 매트리스보다 더 편안하게 느껴졌다. 사람 마음이란 이런 것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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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교대 덕분에 우리는 절반이나마 일상을 되찾았다. 수면은 정말 인간에게 필수적인 요소임을 깨달았다.
그렇게 절반의 평화를 되찾은 어느 날, 남편의 회식이 있었다. 보통 남편은 최대한 일찍 퇴근해서 아이의 막수와 밤잠 입면을 맡곤 했다. 그러나 이 날은 내가 막수도 하고 밤잠도 재워줘야 했다.
평소처럼 메쉬 나시 바디수트와 내복 바지를 입히고, 그 위에 스와들컷으로 한 팔만 뺀 채 포장을 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남편도 언제부터인가 스와들업을 입힐 때 ‘포장’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루나 낮잠 재울 때는 리코타입(스와들컷 브랜드)으로 포장해야 해’ 라든지. 아기도 사람인데, 사람한테 이런 단어를 사용해도 되나? 그래도 예전에 아기가 신생아 때 남편이 비몽사몽 간에 쪽쪽이를 ‘입마개’라고 잘못 부른 적이 있었는데, 그 정도는 아니니까 괜찮지 않으려나.
아이를 데리고 범퍼침대에 가서 눕혔다. 아이는 아직 흥이 덜 가셨는지, “캬앙!” 소리를 내면서 이리저리 팔다리를 휘저었다. 어둠 속에서도 볼에 보조개가 패이는 것이 보였다. 웃고 있구나. 이거 도저히 바로 잠들지는 않겠는걸.
‘알아서 자 봐~’라는 생각으로 아이를 내버려둬봤다. 평소 같았으면 양육자가 이렇게 혼자 냅뒀을 때 “흐엥~”하면서 울었는데, 오늘은 오히려 더 신이 나서 파닥거렸다. 그러다 뒤집어서 뒤뚱뒤뚱 범퍼침대 머리맡으로 “크앙~!” 소리를 내며 기어갔다. 팔 한 쪽은 스와들컷 안에 갇혀 있는데도 용케 뒤집고 그러네. 답답해 보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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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답답해 보이는데’라는 말에 어떤 힌트가 뇌리를 스쳐갔다.
최근 1~2주 동안 아이가 계속 깼던 이유가 혹시 답답해서였던 게 아닐까? 그러고 보면 낮에는 나름 노력한다고 아이를 스와들컷 없이 내복바람으로만 재웠다. 낮잠은 고작해야 한 타임에 40분에서 1~2시간 정도에 불과하니, 혹여 깨더라도 밤잠에 비해서 잃을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담 이제 낮잠 잘 때 내복 바람으로 잤던 것이 습관이 돼서, 밤잠 잘 때도 두 팔 자유롭게 자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 길로 내복을 가지고 다시 범퍼침대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아이의 포장을 다 풀고, 아예 내복으로 완전히 갈아입혔다. 한편으로는 남편과 사전협의 없이 스와들업 졸업을 시키기로 결정해서 조금 켕겼다. 왜냐하면 오늘은 남편이 당직인 날이었기에……. 이대로 스와들업을 안 입히고 재웠다가 아이가 밤새 보채면, 그건 오롯이 남편 몫의 불면으로 이어질 예정이었다. 에잇, 그러게 누가 회식을 가랬나?
다행히 아이는 잘 잠들었고, 남편이 왔을 때도 쿨쿨 자고 있었다. 덕분에 양심의 가책 없이 당당하게 남편에게 말할 수 있었다.
“오히려 스와들업 입고 자는 게 답답해 보여서, 그냥 내복 바람으로 재웠어. 게다가 이제는 스와들업 입히고 재워도 똑같이 계속 깨니까, 더 이상 잃을 것두 없고…….”
그랬더니 남편은 미소 띤 얼굴로 그렇냐고, 잘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래도 나는 결자해지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어서, 오늘 당번은 내가 서겠다고 제시했다. 미국인가 어디에서는 술 취한 채 아이 곁에서 자다가 애를 깔아뭉갠 사고가 있었다고 들어서, 예전부터 우리는 술 먹고 아이 근처에 가지 말자는 주의가 있기도 했다. 남편은 육아를 위해 술을 자제하고 왔다며 괜찮다 했고 실제로도 술 냄새가 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오늘은 당번을 바꾸기로 합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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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내복 바람 첫 날에 (준)통잠을 잤다.
그래도 쪽쪽이 셔틀을 한 번은 했기 때문에 통잠 앞에 ‘준’자를 붙였다. 하지만 이전처럼 1시간마다 깨거나 혹은 1시간에도 몇 번씩 깨서 우는 일은 없었다. 다만 어른들도 그렇듯이 잠꼬대처럼 칭얼대곤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펑펑 울며 얼굴이 ‘>ㅁ<’가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오늘 당번을 할게!”라고 선제시를 해놓고 꿀잠에 당첨된 셈이었다.
궁금해서 홈캠을 돌려봤다. 아이는 뒤집어서도 자고, 옆으로 누워서도 잤다. 세상에, 이런 자세는 스와들업 상태로는 도저히 나올 수 없었겠는걸. 그 동안 이렇게 저렇게 뒹굴거리면서 자고, 팔도 좀 마음대로 휘저으면서 자고 싶었는데, 스와들업에 꽁꽁 묶여 있어서 답답했나 보네. 이것이 바로 말로만 듣던 ‘아이가 알아서 졸업하더라구요’의 현현인가? 하지만 상상했던 것처럼 평화롭고 스무스하지는 않네…….
그나저나 뒤집기가 시작되면 뒤집기 지옥이 열린다는 말을 들었는데, 우리는 어쩌다 보니 그 단계를 패스했다. 아이가 만약 뒤집을 줄은 알지만 되집을 줄은 모른다면, 자다가 뒤집었을 때 고개 들고 우는 아이를 어른이 가서 되집어줘야 하기에 뒤집기 지옥이 펼쳐진다. “엄마, 나 좀 다시 눕혀주세요……” 하고 운다니, 얼마나 귀여운 울음인지. 하지만 어른 입장에서는 자다가도 자꾸만 일어나야 하는 난감한 시추에이션이었다.
인터넷 후기들을 찾아보니, 뒤집기 지옥은 아이가 뒤집은 상태에서 그대로 엎어져 자면 끝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루나는 내복 바람으로 잠든 첫 날에 바로 그렇게 잤다. 예외적으로 딱 한 번, 새벽 3시 쯤이었던가, 뒤집은 상태에서 잠이 확 깨버렸는지 고개를 들고 계속 낑낑대기에 되집어주고 쪽쪽이를 물려줬다. 그 모습에서 ‘엄마 나 뒤집혔어요……’라고 하는 게 들리는 것 같아서 귀여웠다. 물론 그게 다 (준)통잠을 잤기에 나도 상태가 좋았어서 귀여워 보였던 것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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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아이도, 나도, 남편도, 온 가족이 푹 자고 일어난 아침이었다.
셋 다 컨디션 좋게 하루를 맞이하다니. 감개무량했다. 더불어서 나는 남편에게 개선장군이라도 된 것처럼 득의양양하게 얘기할 수 있었다. 스와들업이 포근함에서 답답함으로 변한 시점을 기가 막히게 캐치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아서 아주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첫수도 끝내고, 오전 집안일도 끝내고, 상쾌한 마음으로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서 집 근처 디저트39 카페로 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스타벅스만 주구장창 갔는데, 어느 순간 내가 스타벅스에서 무려 테이크아웃만 해서 바로 귀가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날 따라 디저트39에서 말도 안 되게 큰 아이스 라떼를 사 먹고 싶었다.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은 의욕 또한 필시 수면과 연관이 있으리라. 잠을 푹 자지 못했다면 오늘도 아무 생각 없이 아무 데나 갔겠지.
가는 길에는 초등학교 하나를 지나야 했다. 마침 아이들이 등교하는 시각이었다. 예전에는 유모차 끌고 아침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이제는 왜 그 이른 시간에 유모차들이 보였는지 알 수 있었다. 육아를 하기 전까지는 몰랐는데, 아기 키우는 집의 하루는 정말 일찍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아이를 저녁 7~8시 사이에 재우면 10~11시간 정도를 자는데, 그러면 새벽 5~7시 사이에 깨게 되어 있었다. 소아과 의사가 쓴 책들에서 다 그렇게 이야기하니, 이건 우리 집만의 해당사항이 아니라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출산 전의 내게 저녁 7~8시라면, 퇴근하고 집에 와서 이제야 개인의 삶이 시작되는 시간이었는데. 그 때 잠들어야 하는 작은 사람들이 있다고……? 게다가 아침 7시도 아니고 새벽 5~7시에 매일같이 일어난다니. 주말 아침에 광장동 스타벅스를 가면 아기 엄마아빠들이 속속 도착해서 그야말로 광장어린이집이 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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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앞에 차 한 대가 멈춰섰다. 아이가 내리고, 아이 아빠가 뒤따라 내렸다. 그리고는 아이를 꼭 껴안아주며 “최선을 다 해 봐. 알았지?”라고 아이 아빠가 말했다.
지금이 9월이니까, 중간고사 기간인가? 아니지, 요즘 초등학교는 중간 기말이 없어졌다고 하던데. 그럼 수행평가 같은 건가? 어쨌든 그 아이는 오늘 어떤 시험이나 뭔가를 치르는 날인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 초등학생이었다. 전력을 다해 임하더라도 겨우 초등학교 시절의, 기억도 안 날 법한 이벤트일 텐데. 그래도 아이 아빠는 아이를 북돋워 주었구나.
모든 것을 거쳐와서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심을 다해 아이를 따스하게 격려하는 아이 아빠와 그 딸의 모습이 어쩐지 아름다워서 눈물이 나려고 했다. 한편으로는 친정 어머니랑 며칠 전에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지금은 이렇게 육아하는 게 힘들지만, 이것도 나중에는 다 추억으로 남아 있겠지?”
“아이고, 그럼. 이 힘든 거, 영원하지 않아. 영원하고 싶어도 못하지.“
영원하고 싶어도 영원할 수 없다고 생각하니, 지금의 육아가 힘들고 버텨야 할 시간이 아니라 손으로 꼭 붙잡으려고 해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금빛 모래처럼 느껴졌다. 스와들업 졸업이라든지, 통잠이라든지, 그런 것들도 지금이야 최대의 고민거리지만 나중에는 다 추억으로 변해 있겠구나. 그리고 아이와 내 앞에 놓인 미래에는 아까 전의 초등학생과 아빠처럼 또 새로운 모습의 아름다운 장면들이 다음 추억이 되기 위해 차례를 기다리고 있겠지.
* 표지사진 출처: Unsplash의 Alex Bodin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