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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의동 에밀리 Oct 16. 2024

유도분만 날짜를 잡았다

38주 1일

“두 사람은 궤짝에 걸터앉아서 함께 산타 초콜릿을 먹는다. 속상할 때 초콜릿을 먹으면 속상해하기가 훨씬, 훨씬, 훨씬 더 어렵기 때문이다.”
 -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 247p.


산부인과에 다녀왔다. 


어쩌면 마지막 검진이 될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은 했는데, 진짜로 그렇게 되었다. 내일 유도분만을 하기로 날짜를 잡았기 때문이다. 


유도분만이든 자연진통이든, 옥시토신이 작용해서 자궁 수축을 일으켜 질식분만으로 이어지게 한다는 점은 동일하다고 한다. 그래서 다른 조건들이 똑같을 때 유도분만을 해서 안 될 사람은 자연진통이 걸려도 실패할 수 있다고 얘기를 들었다. 


나는 여러 면에서 점수를 따고 들어가는 편이었다. 자궁경부 길이는 이미 몇 주 전부터 0.3cm 안팎이라 거의 있으나 마나 한 수준이었다. 오늘 내진 결과로는 이미 자궁문도 2~3cm 정도 열려 있었고, 자궁벽(인가?)도 부드러워진 상태라고 하셨다. 


아이 머리 둘레는 9.1~9.3cm, 체중은 2.8kg 정도였고, 속골반도 딱히 좁은 편이 아니라 이 정도면 자연분만이 어렵지 않을 것 같다고 하셨다. 태동검사를 해 보니 18분 정도 간격으로 자궁 수축도 있어서, 촉진제 좀만 쓰면 약도 잘 들 것 같다고 하셨다. 


덧붙여서 간호사 선생님(상담사……? 명찰이 없었기에 잘 모르겠다) 말씀으로는 “산모가 살이 많이 안 쪘으면 자연분만이 더 쉬운 경향이 있다”고도 하셨다. 오늘 체중을 재 보니 58kg 였는데, 50kg대 산모는 드물다고 하셨다. 양수량도 많은 편이라 아마 아이가 지금도 태동을 신나게 하고 있을 테고, 머리 둘레나 체중을 보시더니 “아기가 엄마를 도와주네”라고도 하셨다. 어쩐지 약간 사주팔자 보러 온 기분이 들었다.


간호사 선생님은 또, 원장 선생님께서 단호하신 편이라, 산모 상태를 봤을 때 자연분만이 어렵겠다 싶으면 분명 제왕절개를 권유하셨을 것이라고도 하셨다. 친정 엄마도 “의사 선생님 본인도 두 아이를 제왕절개로 낳으셨으니 웬만하면 수술도 말씀하셨을 수 있을 텐데, 그렇지 않은 걸로 봐서 괜찮을 것 같다”고 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의사 선생님께서는 아이가 역아라서 제왕절개를 하셨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오늘이 38주 1일이니, 40주 0일인 예정일까지 기다리지 않는 이상은 이번주 아니면 다음주 중으로 날짜를 잡기는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내일이 꼭 아니어도 하루이틀 내지는 길면 일주일 차이 정도? 천년만년 품을 게 아니기도 하니, 어쨌든 출산 날짜를 잡기는 해야겠지. 의사 선생님도 37주차 이후로는 꼭 엄마 뱃속에서 더 품어내어 키울 필요는 없다고, 의학적으로도 37~38주 이후면 언제 태어나도 예후는 비슷하다고 말씀하셨다. 


굳이 더 미루고 있을 필요가 없겠구나 싶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마음의 준비가 도저히 안 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후에 병원 검진 가서 태동 검사를 하러 가족분만실에 들어가보니 그런 마음도 좀 희미해졌다. ‘아, 분만하러 오면 나는 이 침대에 눕고 남편은 저 의자에 앉아서 진통을 겪고 있겠구나’ 하면서 그림이 그려지니, 그제서야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


친정 엄마랑도, 남편이랑도 상의를 하고 나서, 간호사 선생님께 “내일 유도분만 할게요” 하고 말씀을 드렸다. 


 - - -


비도 오고 날씨도 춥고 그래서인지 몸이 평소보다 더 피곤했다. 나는 불속성 포켓몬인지 비가 오면 축 늘어지고 잠이 오는 경향이 있다. 이번주 내내 비가 온다는데, 몸 컨디션은 괜찮겠지? 하기사 모든 면에서 완벽할 수는 없으니까.


어쩌면 요 며칠, 안 걷던 걸음을 하고 요가도 해서 더 피곤한지도 몰랐다. 어제도 종아리며 뒷벅지가 아파서 폼롤러로 풀어주었는데, 오늘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종아리가 욱씬거려서 발로 꾹꾹 눌렀다. 블로그를 쓰고 있는 지금은 허리가 아프고, 병원에서 집에 오는 길에는 꼬리뼈가 아팠다. 


어제 저녁에는 식탁 주위를 걸어다니다가 꼬리뼈부터 고관절(?)까지가 삥 둘러서 ‘억!’ 하고 통증이 오기도 했다. 정수기에서 따뜻한 물을 떠다가 가져오고 있던 참이라, ‘이건 흘리면 안되는데’ 하고 조심조심 걸었다. 


 - - -


언제 분만을 할 지 계속 고민하는 것도 머리 아프고, 몸도 무겁고 여기저기 쑤시고, 한편으로는 자연진통 기다린답시고 39주차 이후로 질질 끌다가 괜히 아이 크기만 더 커져서 난산 확률을 높이는 건 아닌가 싶고……. 게다가 요즘 전공의 파업 이슈 때문에 한 치 앞도 못 보겠는데, 하루하루 지날수록 불확실성 속으로 빨려들어갈 것만 같아 불안하기도 했다. 


이런저런 고민 끝에, 그리고 여러 사람들이랑 얘기하고 나서 날짜를 결정한 것인데도,, 막상 집에 오니 ‘내 선택이 맞았을까?’ 하고 의문이 들었다. 사실 아이는 엄마 뱃속이 아직 따뜻하고 편안해서 좀 더 있다가 나오고 싶은데, 내가 40주차 되기도 전에 방 빼려고 하는 건 아닐까?


의사 선생님께 “아이가 많이 내려왔나요?” 하고 여쭤보기도 했다. 딱히 내려오지는 않았지만 초산모의 경우에는 특히 더 그러한데, 아이가 잘 내려올지는 분만이 시작되고 나서야 알 수 있다고 하셨다. 곰곰이 떠올려보면 그 동안 읽은 자연분만 후기들은 유도분만이든 자연진통이든 자궁문 0~1cm에서 시작해서 아이가 점점 내려오는지를 1시간 정도마다 체크하곤 했다. 그러니 당연히 지금은 잘 모를 수밖에.


 - - -


거실 소파에 앉아서 쉬었다. 배도 좀 뭉치는가 싶었다. 정말로 아이는 아직 내려올 생각이 없는데 유도분만 날짜를 잡아서 아이의 마음보다 더 일찍 출산을 시도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했더니 괜히 아이에게 미안해져서 펑펑 울었다. 임신 기간 동안 회사 안팎에서 종종 얼간이들을 마주치는 탓에 열 뻗치는 순간은 있었어도 운 적은 없었는데, 처음으로 속상해서 울었다. 


일단은 유튜브로 음악을 틀어서 기분을 환기시켰다. 울면 자궁이 수축되면서 자연진통을 기대할 수는 있겠지만 어쨌든 스트레스가 태아에게 전달되면 좋지는 않을 것 같았다. 어제 읽은 소설책에서, 초콜릿을 먹으며 속상해 하기란 어렵다던 내용이 떠올라서 초코 케이크를 냉장고에서 꺼냈다. 정확히는 아이스크림이랑 휘낭시에(처럼 생긴 마들렌)도 꺼냈다.


홍차에 곁들여 먹으니, 놀랍게도 정말 마음이 추스려졌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이는 별 생각 없을 수도 있고, 오히려 일찍 나가고 싶어할 수도 있는데, 나 혼자서 제멋대로 추측하고 감정이입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출산할 때 산모가 고통을 겪는다고 하지만, 아이도 온몸을 낑겨넣어가며 산도를 빠져나가는 과정에서 출산의 고통을 겪는다는 이야기도 떠올랐다. 그렇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가 더 커지니까, 하루라도 일찍 나오는 편이 아이 입장에서도 덜 힘들지 않을까?


 - - -


출산 경험이 있는 친구들이랑 카톡을 하면서, 다들 출산 전날 뭘 했는지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들은 먹고 먹고 또 먹었다. 


하루종일 싱숭생숭하던 차에, 다행히 남편이 일찍 퇴근을 했다. 그 이후로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시댁 어른 분들이랑 통화도 하고 그랬더니 마음이 더 편안해졌다. 저녁은 김치찜을 배달시켰다. 내일은 금식해야 한대서, 땡기는 음식을 골랐다. 


배달이 시작된 김치찜부터 시작해서 루나의 탄생까지, 걱정은 기대로 점차 바뀌었다. 이렇게까지 난산의 징조가 하나도 없기도 힘든데 괜히 걱정을 잔뜩 안고 있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머리 사이즈가 크지도 않고, 속골반이 좁지도 않고, 자궁문은 이미 좀 열려 있고, 심지어 친정 엄마도 난산이 아니었다. (회사 동료 중 한 명은 자연분만을 시도하다가 아이 머리가 너무 딱딱해서 제왕절개로 넘어갔는데, 알고 보니 친정 엄마도 똑같은 케이스였었다고 했다. 난산으로 고초를 겪은 동료는, 친정 엄마에게 “그걸 왜 지금 얘기해……”라고 했다고.)


오늘도 삼신할머니께 모든 걸 의탁하고 마음 편하게 먹어야겠다. 알 이즈 웰. 어차피 애를 낳는데 하나도 안 아플 수는 없는 일이고, 여차하면 의료진의 판단을 믿고 따라야지. 그래도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나저나 허리랑 아랫배는 왜 이렇게 아플까. 분명 아이는 아직 안 내려왔다고 하셨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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