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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의동 에밀리 May 06. 2024

이런 나라도, 어머님

1개월 17일

아이를 데리고 소아과에 갔더니, 간호사분께서 나를 “어머님”이라고 부르셨다. 어머님, 이 쪽으로 오시면 되세요.

순간 내가 엄청 나이를 먹은 기분이 들었다. 혹은, 어른이 된 기분이랄까?

왠지 어머님이라고 하면 자상하고 한편으로는 근엄하기도 한 이미지가 떠올랐다. 책임감 넘치고 여유가 흐르는, 자애로운 어머니의 모습이랄까? 왠지 취미는 베이킹, 옷차림은 무인양품 잡지에 나올 것처럼 베이지 톤의 긴 치마와 스웨터를 입어야 할 것 같고. 

하지만 나는 여전히 나였다. 출산을 했다고 해서 철없고 실없던 원래의 성격이 어디 가지는 않았다. 베이킹은 무슨, 여전히 취미는 카카오페이지에서 로맨스 판타지 웹툰을 보는 것 그대로였다. 모바일 게임에서 캐릭터 뽑으려고 현질하고, 베이킹은 커녕 끼니조차 냉장고에 있는 반찬 데워 먹는 게 고작인데다 때로는 그마저도 귀찮아서 배달 음식을 시켜 먹는걸. 이제 막 자취 시작한 대학생이라면 몰라도, 이런 내가 ‘어머니’라니? 

게다가 누군가의 어머니라면 아이에게 성숙한 어른의 면모를 보여주며 가르침을 주어야 할 텐데. 나는 아직도 타인과 얘기할 때면 ‘지금쯤 대화를 슬슬 끝내야 하나? 아니면 벌써 끝낸다고 서운해 하려나?’ 하고 고민에 빠질 정도로 사교적인 면에서도 서툰 사람이다. 게다가 자기 스스로도 앞으로 어떤 커리어를 도모해야 할 지 갈팡질팡하는 중이고. 

그런데 이런 내가 누군가에게 본보기가 되어주고 바람직한 미래를 이끌어주어야 하는 위치가 되어버렸다니. 


한편 아이는 아무 것도 모르고 바운서에서 팔다리를 붕붕 휘저으며 놀곤 했다.

그런 아이를 보며 내가 아직도 미성숙한 어른이란 생각이 들 때면 내심 뜨끔한다. 아가, 미안하지만 나는 그렇게 어른스러운 어머니가 아니란다. 오히려 너와 같이 나란히 누워서 팔다리 붕붕 휘저으며 모빌 구경하고 싶은 사람에 가깝지. 

……? 그러고 보니 지난주에 정말로 역류방지쿠션 옆에서 아이와 나란히 누워 있었다. 그저 아이의 유년시절은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 지 궁금해서. 

실제로 해 보니까 의외로 식탁 다리라든가 부엌 창문이 잘 보여서 신기했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모빌은 생각보다 더 어지러웠다. 아기를 보는 사람이 아니라 애랑 같이 누워서 뒹굴거리는 어머니라니. 


고백하건대, 아직도 아이를 혼자 보는 일은 어렵게 느껴진다. 무릇 어머니라면 아이를 능숙하게 케어해야 할 텐데, 나는 여전히 누군가가 곁에 없이 아이랑 달랑 둘이서만 있노라면 괜히 불안하다. 

예를 들어서 앉은 채로 아이를 재우는 데에 성공하면, 필요한 물건을 가지러 일어서는 일조차 망설여진다. 그렇게 팔 밑에 괴어 놓을 쿠션이나 심심하면 볼 수 있는 스마트폰도 없이, 팔뚝으로 아이를 안고 멍하니 허공과 아이 얼굴을 번갈아 보곤 한다. ‘남들은 어떻게 재울까’ 하는 궁금증, ‘침대에 눕히면 깨려나’ 하는 조마조마한 마음과 함께,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나는 그래도 산후도우미와 친정 엄마, 그리고 든든한 남편이 있으니 도움 받을 곳이 많은 편이다. 이보다 더하려면 입주 시터를 쓰는 것 정도려나? 그런데도 때로는 아이를 보는 일이 버겁게 느껴지는데, 혼자서 독박 육아를 하는 엄마들은 대체 어떻게 하고 있는 걸까. 

물론 커뮤니티 글을 보면 샤워도 식사도 못 해서 맨날 거지꼴로 지내다가 저녁에 남편 오면 첫 끼니를 먹는다고도 하지만……. 그래도 어쨌든 아이를 돌보면서 집안일을 하긴 할 테지. 생각해 보면 산후도우미 분께서도 우리집에 와서 아이 돌보고 빨래, 청소, 요리를 다 하신다. 그 분도 나랑 똑같은 한 명인데,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나도 상황이 그렇게 되면 또 다 하게 될까? 그러게, 어쩌면 생각보다 씩씩하게 잘 지낼지도 모르지.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 내 생활은 아이 중심으로 바뀌었다. 

우선은 직장부터 출산휴가와 육아휴직 모드로 들어갔다. 지금껏 학교든 회사든 어딘가에 소속되어 꾸준히 왔다갔다를 반복하는 삶을 살아왔건만, 하루아침에 갑자기 칩거 생활로 전환되었다. 임신 때에도 조산기 때문에 안방에 틀어박혀 침대에 누워만 지내고, 출산하고 나서도 끽해야 한 두 시간 마실 다녀오는 정도만 하면서 지내고 있다. 

아이가 면역력을 갖출 백일까지는 여행도, 하다못해 남편이랑 어디 외식 다녀오는 것도 요원해 보인다. 지금 생각으로는 백일이 지나더라도 아이를 어딘가에 덜렁 맡겨놓고 여행을 다녀온다든가 하는 일은 불안하고 미안해서 마음이 잘 내키지 않을 것 같다. 물론 지금은 이렇게 말을 해 놓고 막상 그 때 가면 잘만 다닐 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평소 즐겼던 취미들도 전부 어딘가로 쏙 들어가버렸다. 임신 기간에 누워서 지내며 맨날 하루 3~4시간씩 하던 모바일 게임은 출산하고 나서는 거의 앱을 열지도 않았다. 일본어나 코딩처럼 뭐든 늘 한 가지는 붙잡고 공부하곤 했는데 요즘에는 육아 관련된 책과 유튜브를 보느라 겨를이 없다. 

그나마 웹툰은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5분만에 한 편을 볼 수 있으니까 이따금 보고 있고, 소설책도 어젯밤에 모유 수유하면서 출산 후 처음으로 펼쳐봤다. 팝콘 컨텐츠만 소비하다가는 머릿속도 팝콘이 되어버릴 것만 같아서 위기감에 펼쳐본 책이었다. 


그래도 하나도 후회가 되지 않아서 한편으로는 신기했다. 

예전에는, 그러니까 임신 전에는, 아이를 가지게 되면 내 삶이 송두리째 바뀌는 데에서 스트레스를 크게 받지 않을까 하고 걱정했다. 하고 싶은 일은 제한되고, 이동의 자유도 확 줄어들고, 그렇게 아이에게 내 삶을 갈아 넣다가 어느 순간 돌아보면 내 삶은 없어져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실제로 아이를 낳고 나니, 하나도 아쉬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여행이야 가고 싶은 곳은 웬만하면 다 가 봤고, 아이를 떼어놓고 가고 싶을 정도로 간절한 여행지는 딱히 떠오르는 데가 없다. 외식도 왠지 다들 아는 맛에 예상 가능한 분위기의 식당일 것 같고. 


오히려 방황하고 허전하던 마음에 무언가가 꽉 차고 넘치게 들어온 기분이었다. 

회사에서는 커리어 때문에 갈팡질팡하고, 회사 밖에서는 ‘회사 밖에서도 특출난 게 없다니!’ 하는 막막한 심정으로 지내던 차였다. 유튜버도, 블로거도, 작가도, 1인 개발자도, 그 무엇도 이렇다 할 궤도로 올려 놓은 것 하나 없구나. 앞으로 나는 뭘 하고 살면 좋을까, 이렇게 심심하고 평범하게 살면서 이런저런 취미들을 찔러보다 어느덧 팔순 노인이 되어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곤 했는데, 아이가 태어나고 나니까 뭐든 아무래도 괜찮아졌다.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아이를 낳은 것은 내가 태어나서 가장 잘 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에서 옆 부서 부장님이 “아이를 낳으면 인생의 새로운 스테이지가 열린다”라고 하셨는데, 과연 빈말이 아니었다. 


새로운 우주가 하나 생긴 기분이었다. 

여행이든 취미든, 그런 것들은 차라리 시시하게 느껴졌다. 나와 남편으로부터 태어났지만 동시에 독립적인 어떤 사람이 이 세상에 생겼다. 아직은 누워서 팔다리를 붕붕 휘젓는 것만이 거의 유일한 여가생활이지만, 앞으로 커서는 나처럼 해외로 교환학생도 다녀오고 그러겠지? 그러니 외국어도 몇 개 익힐 수 있도록 도와줘야겠다, 그런 벅차고 기분 좋은 미래를 상상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왠지 마음이 밝아지고 씩씩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베이킹은 커녕 현질을 유도하는 가챠 게임이나 하고, <돈으로 약혼자를 키웠습니다> 같은 허무맹랑한 웹소설 읽는 것이 취미인 이런 나지만, 그래도 한편으로는 어머니로서도 나름 잘 지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긍정적인 생각이 들게 된다. 


어쩌면 아이도 나중에는, 철없는 편에 가까운 어머니를 더 좋아하지 않을까? 

엄격하고 지극정성인 어머니 슬하라면, 은연중에 본인도 그 완벽주의에 부응해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을 느낄 수도 있을 테니까. 이따금 게임 커뮤니티에서 ‘엄마가 돌린 가챠에서 더 좋은 캐릭터가 나왔다’라는 둥, 게임을 함께 하는 부모-자식 관계가 종종 보였던 것이 기억난다. 

부실하고 철없더라도, 아이를 진심과 솔직함으로 대하는 부모가 되려고만 노력한다면 괜찮지 않을까. 예컨대 제대로 된 놀이 매트 대신에, 요가 매트를 대충 잘라 만든 판때기에 아이를 뉘여서 놀게 하는 부실함을 보여주더라도, 그 곁에서 아이와 눈을 맞추고 옹알이를 따라해주며 “‘아오옭’은 ‘이제 졸리니까 쪽쪽이를 물려서 재워주세요’라는 뜻이구나”라고 마음을 읽으려는 노력을 한다면, 아무래도 괜찮지 않을까? 

나중에 나는 아이와 어떤 관계가 되어 있을까? 그 때 아이가 내가 썼던 블로그 포스팅들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아이도 블로그를 하려나? 그러고 보니, SNS 덕분에 요즘 부모들은 아이 일기장을 궁금해 할 필요가 없을 지도 모르겠구나. 나는 그만큼 아이와 친구처럼 지낼 수 있으려나? 

여러 방면에서, ‘이제 뭐 하고 살아야 하지?’ 하던 마음이, ‘이제 어떤 삶을 살게 될까?’ 하는 마음으로 바뀌게 되어 신기하다. 며칠 전 인바디에서 내장지방이 생각보다 높게 나왔기에 식단 관리를 해야겠다 다짐해 놓고도 달콤한 밀크티와 생크림 케이크를 먹고 있는, 여전히 철없는 이런 나지만……. 그래도 이런 즐거운 마음이 드는 것은 이미 충분히 어머니가 되었다는 뜻이지 않을까?


 * Unsplash의 Jasmine Hu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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