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꼭지로 읽는 중국철학사 1-2
* 동대문도서관에서 진행하는 '여섯 꼭지로 읽는 중국 철학사' 강의안 초안입니다.
“옛말에 ‘암탉은 새벽에 울지 않는다. 암탉이 새벽에 울면 집안이 망한다.’라고 하였소. 지금 은나라 왕 주는 오직 여인의 말만 듣고 스스로 선조께 지내는 제사를 버려두고 지내지 않으며 나라를 혼미한 상태로 버려두었소.”
<주본기>, 사기본기 김원중 역, 민음사, 127-128쪽.
지금으로부터 약 3,000년 전 목야牧野라는 곳에 수많은 군대가 모였다. 은殷나라의 폭군 주紂를 몰아내기 위해 모인 이들이었다. 무리의 우두머리는 서쪽 주周나라의 무왕武王이었다. 그는 아버지 문왕文王의 유업을 이어 은나라의 폭군을 몰아내겠다며 군대를 일으켰다. 전하는 기록에 따르면 문왕은 널리 인정을 펼쳐 많은 인재를 나라에 불러 모았다고 전해진다. 문왕은 철학사에도 족적을 남겼는데 <역易>의 팔괘를 육십사괘로 만들었다나 뭐라나. 믿거나 말거나. <역易>, 즉 <주역周易>에 대한 내용은 차후에 다루도록 하자.
문왕 시절 주나라는 이미 꽤 강성한 나라였다. 주나라의 부강함은 은나라의 실정과 대비되어 더욱 돋보였다. 은나라의 주왕紂王은 남다른 재주를 지닌 인물이었다. 힘도 강했으며, 명철한 지혜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방탕함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은본기>는 주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주제紂帝는 천부적으로 변별럭이 있고 영리하고 민첩하며 견문이 매우 빼어났고 힘이 보통사람을 뛰어넘어 맨손으로도 맹수와 싸웠다. 지혜는 간언이 필요하지 않았고, 말재주는 허물을 교묘히 감추기에 충분했다. 자신의 재능을 신하들에게 뽐내며 천하에 그 명성을 드높이려고 했으며, 모두가 자신의 아래에 있다고 여겼다. 술을 좋아하고 음악에 흠뻑 빠졌으며 여자를 탐했다.”(<은본기>, 같은 책, 108-109쪽)
주왕은 달기妲己라는 여인에 푹 빠져버렸다. 훗날 수 없이 나타나는 폭군들처럼 그 역시 나라를 돌보지 않고 환락에 빠져 살았다. 그는 특히 술과 고기를 사랑했다고 하는데, 술로 못을 만들어 언제든 퍼먹을 수 있게 했으며, 안주거리로는 숲에 고기를 잔뜩 걸어놓았다 한다. 맞다, 그가 바로 주지육림酒池肉林의 주인공이다. 매일매일 파티를 벌이는 임금이었던 셈.
문왕이 세상을 떠나자 무왕은 은나라의 실정을 문제 삼으며 전쟁을 일으켰다. 무왕을 도와 군대를 이끌고 모인 소국의 임금이 약 800여 명이었다 한다. 이것이 과연 얼마나 많은 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지 않은 수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이 끌고 온 병사들까지 합치면 엄청난 숫자였을 것이다. 구름 떼처럼 모인 병사들을 보고 이들의 자신감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러나 무왕의 생각은 달랐다. ‘女未知天命 未可也 : 그대들은 아직 천명天命을 모르오, 더 기다려야 하오.’
무왕은 기다릴 줄 아는 덕목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전쟁의 승패는 숫자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니, 설사 전쟁에서 이긴다 하더라도 한 나라를 무너뜨리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은나라는 이미 수백 년을 유지한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이 나라를 무너뜨리고 주나라의 천하를 열려면 또 다른 것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바로 천명天命, 은나라의 임금보다 더 높은 하늘의 이름을 빌어 은나라를 심판해야 했다.
3년 뒤, 무왕은 다시 군대를 모았고 은나라와의 일전을 준비했다. 목야에 모인 군대는 이전보다 훨씬 많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은나라 주왕을 처단할 명분을 얻었다는 점이 중요했다. 주나라 무왕은 옛말을 빌어 이 싸움의 정당성을 확보했다. “牝雞無晨 牝雞之晨 惟家之索 : 암탉은 새벽에 울지 않는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즉, 여인의 손에 나라가 휘둘리고 있으니 은나라의 정당성이 사라졌다는 말이다. 정말 약 3,000여 년 전 목야의 들판에서 은나라와의 일전을 앞두고 무왕이 저 말을 했을까. 아니, 정말 은나라는 저 이유 때문에 망한 것일까. 진상을 알 수는 없으나 저 말은 수천 년 동안이나 전해지고 있다. 지금까지도.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하니, 주왕의 억울함을 들을 일은 영영 없게 되었다. 주나라는 전쟁에서 승리했고, 주왕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무왕은 도끼로 주왕의 목을 베고 흰색 기에 매달았다. 그리고 주왕이 아끼던 달기도 죽였다. 모든 일을 마치고 무왕은 ‘천황상제天皇上帝’, 즉 하늘에게 주왕의 죄를 고하고 은나라 대신 주나라가 천명을 받음을 아뢴다. “膺更大命 革殷 受天明命 : 천명을 따라 은나라를 무너뜨렸으니, 천명을 받들겠습니다.”
무왕은 ‘천명’을 통해 정당성을 확보했다. 또한 넓은 천하를 다스리기 위해 새로운 방법을 고안한다. 바로 왕의 친족과 공신에게 나라를 떼어주는 것이다. 이를 봉토건국封土建國이라 한다. 땅을 떼어(封土), 나라를 세워준다(建國)는 뜻이다. 이를 줄인 말이 ‘봉건封建’이며, 이렇게 세운 각각의 나라를 제후국諸侯國이라 부른다. 이들은 저마다 제 나라를 다스렸지만 왕王을 자처하지 못했다. 왕은 천명을 받은 주나라의 왕 하나뿐이었으며, 제후국의 임금은 그 아래에 있어야 했다. 이들은 ‘공公’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제齊나라와 노魯나라는 대표적인 제후국이다. 제나라는 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무너뜨리는 데 앞장선 태공망 강상姜尚/여상呂尚에게 떼어준 나라였다. 그는 여러 공신 가운데서도 가장 으뜸이었다. 한편 제나라의 이웃 노나라는 무왕의 동생 주공周公 단旦에게 때어준 나라였다. 주공 역시 형 무왕을 도와 큰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 노나라를 다스리지 못했는데 형 무왕이 일찍 세상을 떠나버려 무왕의 아들, 조카 성왕成王을 보필해야 했기 때문이다. 주공의 아들 백금이 노나라의 첫 번째 임금이나 마찬가지였다.
으뜸가는 공신의 나라 제나라, 으뜸가는 인척의 나라 노나라. 그러나 역사를 보면 이 두나라의 관계는 썩 좋지 못했다. 공자(孔子, BCE511~BCE479)가 바로 노나라 출신이었는데, 제나라와 노나라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는데 공자가 활약했다는 기록이 있기도 하다. 넓게 보면 주나라의 한 식구이자 주나라 창업부터 각별한 인연이 있는 이웃인데 어째서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일까?
이를 위해서는 포사襃姒라는 여인을 이야기해야겠다. 때는 유왕(幽王 BCE795?~BCE771) 시절로 포사는 유왕의 총애를 받아 왕후가 되었다. 유왕은 포사를 왕후로 삼으면서 이전의 태자와 왕후를 내쫓기까지 했다. 유왕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포사의 미소였다. 포사는 잘 웃지 않았는데, 웃는 그 모습을 한번 보기 위해 유왕은 갖은 수를 다 썼다. 포사의 미소를 볼 수 없으니 유왕은 더욱 애가 탈 수밖에. 어느 날 병사들의 실수로 북이 울리고 봉화가 올랐다. 적군이 쳐들어왔다는 신호였다. 봉화를 보고 곳곳에서 제후들이 군대를 이끌고 달려왔다. 주나라가 위협에 처하면 제후들은 군대를 이끌고 도울 의무가 있었다.
서둘러 달려왔는데 적군은 보이지 않았다. 사소한 실수라는 걸 알자 제후들은 물론 수많은 병사들은 벙찔 수밖에. 모두가 허탈해하는 순간 포사의 웃음이 터졌다. 크게 웃는 포사의 웃음을 보며 유왕은 크게 기뻐했다. 문제는 유왕이 포사의 미소를 보기 위해 습관적으로 봉화를 올렸다는 점이다. 그때마다 포사는 웃음을 터뜨렸지만 주나라를 돕기 위해 달려오는 제후들은 점점 줄었다. 모두가 다 예상하듯, 실제로 주나라가 위협에 처했을 때 아무 제후도 주나라를 도우러 오지 않았다.
결국, 유왕은 은나라 주왕과 비슷한 최후를 맞는다. 유왕은 봉화를 올리던 여산驪山에서 목숨을 잃었고 원흉으로 지목된 포사도 함께 목숨을 잃었다. 차이가 있다면 은나라는 망했지만 주나라는 망하지 않았다는 점. 주나라는 수도를 잃고 동쪽으로 수도를 옮겨야 했다. 역사는 수도의 위치에 따라 이를 서주西周와 동주東周로 구분하기도 한다. 제후들에게 신망을 잃은 주나라는 이전과 같은 지배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동쪽으로 수도를 옮긴 이후 주나라는 허수아비로 전락했고, 제후 가운데 실력자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춘추전국春秋戰國의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이전까지는 주나라 아래의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이제는 서로 다투어야 하는 사이가 되었다.
암탉을 운운하며 천명을 입에 올린 주무왕, 그의 나라가 포사라는 여인 때문에 몰락하게 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흥미롭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일까? 지금도 중국 시안西安에 가면 유왕이 목숨을 잃었다는 여산에 오를 수 있다. 그 아래에는 화청지라는 온천 휴양지가 있는데 당현종이 양귀비와 어울려 놀던 곳이란다. 이렇게 보면 목야 벌판에서 주무왕이 외친 말이 꽤 그럴싸하다. 허나 또 하나의 사건, 중국 현대사를 가로지르는 시안사변이 일어난 곳이 바로 여산의 화청지라는 점도 짚어야겠다. 장제스蔣介石가 화청지에 머물고 있던 그날, 장쉐량張學良이 시안사변을 일으켰다.
시안사변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지금이야 세세한 기록이 남아있어 그날의 진상을 제대로 알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고 기록이 희미해지면 또 어떻게 될지 모른다. 어떤 이야기를 지어낼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주무왕은 역사의 여러 창업 군주처럼 힘을 키워 구세력을 몰아내었고,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적당한 이유를 찾았다. 예전부터 서쪽 변경은 이민족의 침입이 잦았다. 제후국이 주나라를 도와주지 않은 것은, 유왕이 덕을 잃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봉건체제가 자연스럽게 와해되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둘 다일까.
중국 철학은 예로부터 전통을 중시 여기고 덕을 높였기 때문에, 옛사람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실을 알기는 어려운 일이다. 좀 다른 상상도 필요하고, 때로는 비꼬아보는 태도도 필요하다.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는 말이 있다. 아름다운 여인이 나라를 위태롭게 한다는 뜻이다. 허나 거꾸로 생각해볼 수도 있다. 나라가 어지러워지니 여인에게 책임을 덧씌운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