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린은 사라지고

여섯 꼭지로 읽는 중국철학사 1-3

by 기픈옹달

* 동대문도서관에서 진행하는 '여섯 꼭지로 읽는 중국 철학사' 강의안 초안입니다.


곡부曲阜의 서쪽에서 잡힌 기린을 보자 공자는 말했다.
“나의 도道도 끝났구나.”
<공자세가>, 사기세가, 김원중 역, 민음사, 693쪽.


춘추전국은 ‘춘추春秋’와 ‘전국戰國’을 합친 말로 각각 <춘추>와 <전국책戰國策>이라는 책 제목에서 따왔다. <춘추>는 공자가 지었다고 전해지는데, 노나라의 역사를 담았다. 맹자(孟子 BCE372~BCE289)는 이 <춘추>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孔子成春秋 而亂臣賊子懼 : 공자가 <춘추>를 완성하자 세상을 어지럽히는 이들이 두려워 떨게 되었다.’ 역사가 하나의 거울이 되어 후세에까지 영향을 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전통은 훗날에도 이어져 고려와 조선은 춘추관春秋館을 세워 역사를 기록했다. 한편 오늘날 청와대에도 춘추관이 있다. 공정한 기록을 후세에 전하자는 의미에서 청와대 출입기자들이 이용하는 공간인데, 그들은 공자의 이 이야기를 알고 있을까? <전국책>은 말 그대로 전국, 나라들 간의 다툼을 다룬 책이다. 다만 ‘전국책’의 ‘책策’은 책략, 즉 이웃나라를 이기기 위해 내놓은 꾀를 의미한다. 상대를 이기기 위해서는 기발한 생각이 절실했다.


<춘추>와 <전국책>, 이 두 책에서 이름을 따온 만큼, 춘추전국을 다시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로 구분하기도 한다. 책의 내용을 생각하면 춘추시대는 꽤 바람직하고 아름다운 시대를, 전국시대는 피 튀기는 싸움의 시대를 이야기한 것처럼 생각할 수 있을 법하다. 그러나 춘추시대나 전국시대 모두 기존의 가치가 무너진 혼란기였다는 점에서는 근본적으로 똑같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춘추시대가 기존의 질서가 무너져가는 시대였다면, 전국시대는 이제 과거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는, 기존의 규범이 완벽하게 무너져버린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춘추>가 기린麒麟을 잡은 사건으로 끝난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기린은 상상의 동물로 평화시기를 의미하는 상서로운 동물이었기 때문이다. 기린이 잡혔다는 것은 기존의 질서가 무너졌다는 상징이었다. "吾道窮矣 : 나의 꿈도 끝인가 보다!" 더는 자신이 꿈꾸던 영광스러운 과거, 주나라의 시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공자는 깨달았다. ‘도道’는 다양한 의미를 담는 글자인데, 공자에게는 주나라의 이상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甚矣吾衰也 久矣吾不復夢見周公 : 내가 많이 늙었구나! 오래도록 주공을 꿈에서 만나 뵈지 못하였으니…” 공자는 노나라의 시조 주공의 업적을 다시 실현하고자 했다. 앞서 보았듯 주공은 주나라의 창업 영웅 가운데 하나였으며, 주나라의 기틀을 닦은 인물이었다. 공자는 꿈에서 주공을 만나며 이 이상을 지켜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시대는 달라지고 있었다.


공자의 출신, 가문에 대해서는 설왕설래 말이 많다. 사마천은 <공자세가>에서 숙량흘叔梁紇과 안씨顏氏가 야합野合하여 공자를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야합’이라는 표현은 훗날 많은 상상을 낳았다. 전하는 기록에 따르면 일찍이 숙량흘은 불구인 아들을 낳았는데, 다시 아들을 낳고자 애를 쓰다 겨우 안씨를 만나 공자를 낳았다나. 이때 숙량흘은 일흔이 넘었고, 안씨는 십 대의 앳된 나이였단다. 대체 어찌 된 일일까? 어떤 이는 공자의 아버지를 알 수 없다 말한다. 공자가 이름을 떨치니 고향 곡부 출신의 이름난 장수를 아버지로 삼았다는 말이다. 어떤 이는 어머니가 무녀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누구 말이 맞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출신이 별 볼 일 없었던 것만은 분명한 듯하다. 공자 스스로도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吾少也賤 故多能鄙事 : 나는 어려서 보잘것없는 신분이었다. 덕분에 비루한 일을 많이 할 줄 안다.”


천賤, 별 볼 일 없었던 그가 과연 어떻게 주공을 꿈꾸게 되었을까? 아마도 이는 그가 노나라 출신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노나라는 주나라의 형제 나라로 주나라의 문화적 유산을 상당 부분 보존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공자는 ‘예禮‘를 중시했는데, 이 ‘예’가 바로 주나라의 다양한 문화적 유산을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말이다. 정치적으로 안정적이고 문화적으로 융성한 주나라 초기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그렇다고 그가 과거로 회귀하고자 하기만 하였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그는 '인仁'과 같은 표현을 사용하여 이런 혼란기를 바로잡을 새로운 인간형을 탐구하기도 했다. 군자君子는 본디 '군주의 아들', 즉 통치 계층을 의미하는 말이었으나, 그는 이 말을 차용하여 통치자가 지녀야 할 덕목을 상세히 이야기했다.


그는 군주가 바로 서면 그 아래 신하들이 그를 본받을 것이며, 나아가 백성들도 감화되리라 생각했다. “子欲善 而民善矣 君子之德風 小人之德草 草上之風 必偃 : 그대가 선하고자 하면 백성도 선할 것입니다. 군자의 덕은 바람과 같고 소인의 덕은 풀과 같은 까닭입니다. 바람이 풀 위에 불면 풀은 눕기 마련입니다.” 공자를 비판적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공자가 백성을 통치의 대상으로만 보았다고 지적한다. 백성이 능동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런 혐의를 보이는 기록은 여럿 있다. “唯女子與小人為難養也 近之則不孫 遠之則怨 : 여자와 소인만은 다루기 힘들다. 가까이하면 공손하지 못하고, 멀리하면 원망하니 말이다.” “民可使由之 不可使知之 : 백성을 부릴 수는 있지만 그들을 깨우쳐줄 수는 없다.”


공자는 백성보다 군주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고향 노나라를 떠나 천하를 떠돌았다. 자신의 이상을 실현해줄 군주를 찾고자 했기 때문이다. 여러 나라를 떠돌았으나 그를 받아주는 군주는 별로 없었다. 몇몇 나라에서 환대를 받기는 했으나 그들도 공자의 이상에는 정작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장저와 걸닉이라는 두 은자隱者의 비판은 공자의 모습을 꼬집고 있다. “滔滔者天下皆是也 而誰以易之 : 콸콸콸 흘러가는 물처럼 천하가 이렇게 변하고 있는데 누가 이를 바꿀 수 있을까?” 그들은 이상을 실현해줄 군주를 찾아다니느라 애쓰지 말고 차라리 자신들처럼 세상을 등지고 사는 게 어떠냐 제안한다. 그러나 공자의 대답은 이렇다. 이 사회 속에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不可而為之者 :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하는 사람’. 당대에도 이미 공자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매우 날카로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의 명성이 높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 펑유란은 <중국철학사>에서 공자를 서양의 소크라테스에 비견하기도 했다. 세계 몇 대 성인이니 하는 식으로 견주었기 때문이 아니다. 소크라테스가 서양철학의 아버지로 꼽히는 것처럼, 공자로부터 중국철학이 시작했기 때문이다. 낡은 제도와 규범, 전통, 체제에 사로잡혀 있는 인물이었는데? 이는 공자가 사士, 선비의 모습을 선명히 보여주는 까닭이다. 군주도 일반 백성도 아닌 새로운 계층, 이를 문사文士, 혹은 독서인讀書人이라 부르기도 한다. 제각기 출신은 다르지만 글을 읽고 이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는 사람들. 식자층, 혹은 지식인이라 불리는 사람들. 주나라의 몰락은 이러한 사람을 여럿 낳았고, 공자는 이들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공자를 일컬어 만세사표萬世師表, 지성선사至聖先師라고 부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만세사표 : 온 세상의 스승이라 하고, 지성선사 : 지극한 성인이자 앞서 나간 스승이라 불린다. 훗날의 선비들 가운데 공자와 비슷한 운명을 살아야 했던 사람이 수 없이 많았기 때문이다. 시대의 조류에 둔감하여 과거의 이상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들. 현실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이상을 포기하지 못한 사람들. 자신의 지식으로 세상의 변화를 견인하고자 애쓴 사람들. <논어>가 오늘날까지 사랑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긴 방랑길을 마치고 공자는 고향 노나라에 돌아와 말년을 보낸다. 그는 말년에 제자를 키우는데 공을 들이고, 고대 문헌을 정리했다고 전해진다. 이때 그가 정리했다는 문헌이 <시경詩經>, <서경書經>, <역경易經/주역周易>이다. 그리고 <춘추春秋>를 썼으며 그의 제자들이 공자의 말과 행적 등을 엮어 <예기禮記>를 썼다고 전해진다. 이 다섯 권의 책을 묶어 '오경五經'이라 부른다. 그러나 과연 공자가 오경에 얼마나 관여했는지는 오늘날 커다란 논란거리 가운데 하나이다.


오경보다는 <논어論語>가 공자의 행적이나 말을 잘 기록하고 있다. 이 책은 공자 사후에 엮였는데 정확히 언제 누가 저술하고 편집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공자가 직접 쓰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공자가 직접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공자의 이상을 가장 잘 담고 있는 책으로 여겨지고 있다. <논어>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게 끝난다. "不知命 無以為君子也 不知禮 無以立也 不知言 無以知人也 : 사명을 알지 못하면 군자라 할 수 없다. 예禮를 알지 못하면 제대로 설 수 없고, 말(言)을 알지 못하면 사람을 제대로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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