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의 마부라도 되고 싶다

알아준다는 것 3

by 기픈옹달

<관안열전>의 또 다른 주인공 안영 역시 제나라의 이름난 재상이었다. 그런데 그의 시대는 관중의 시대와 사뭇 크게 달랐다. 안영은 제영공, 장공, 경공의 삼대 동안 재상으로 있었던 인물이지만 당시 제나라는 쇠락의 길을 겪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제장공이다. 그가 군주의 자리에 올랐을 때 나라의 실권은 최저라는 인물이 손에 쥐고 있었다. 최저는 당공棠公이라는 인물이 죽자 그의 아내를 자신의 아내로 삼았다. 그런데 문제는 장공이 그녀에게 빠져버렸다는 점이다. 어찌나 푹 빠졌는지 최저의 집에 자주 드나들었고, 최저의 갓을 다른 사람에게 줄 정도였다. 다음은 <세가>에 실린 장공의 마지막 날 모습이다.


을해일에 장공이 최저에 가서 문병하고는 최저의 아내를 찾았다. 최저의 아내는 안방으로 들어가 최저와 함께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장공은 기둥을 안고 노래했다. 환관 가거가 장공을 수행하는 관원들을 대문 밖으로 막고 들어와 대문을 잠그니 최저의 부하들이 무기를 들고 안에서 나왔다. 장공이 대 위로 올라가 포위를 풀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그들은 들어주지 않았다. 천지신명에도 맹세할 것을 청하였으나 받아 주지 않았다. 이에 종묘에서 자살하겠다고 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 장공이 담을 넘으려고 하자 화살이 허벅지에 꽂혔다. 장공이 거꾸로 떨어져 내려오자 죽여 버렸다.
… 안영은 들어가서 장공의 시신을 베개 삼아 곡을 한 다음 예에 따라 세번 뛰더니 밖으로 나왔다.
사람들이 최저에게 말했다.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최저가 말했다.
“백성들이 받드는 자이니, 그를 내버려 두면 민심을 얻을 수 있다.”
* (김원중역)


사마천은 <사기열전>에서 난세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난세란 무엇인가? 말을 그대로 옮기면 ‘어지러운 세상’을 가리키는 말이나, 무엇이 그 어지러움을 낳았는가가 중요하다. 기존 체제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기존의 가치도 방향을 잃어버린 세상. 본디 주나라의 체제는 중앙의 천자와 주변의 제후국 간에 상하 관계가 명확했다. 그러나 주 왕실의 몰락으로 그 체제가 무너지고 말았다. 비슷한 현상이 제후국 내부에서도 빈번히 일어났는데 바로 제나라의 대부인 최자가 임금인 장공을 시해한 사건이 그렇다.


시해弑害란 아랫사람이 부정한 방법으로 윗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당시 사관은 이 사건을 이렇게 적었다. ‘최저가 장공을 시해했다.’ 이를 보고 최저가 죽였으나 그 사관의 동생이, 또 죽였으나 다시 그 동생이 똑같이 기록하자 멈추고 말았다. 이 대목은 과거의 실상을 후대에 전해야 한다는 ‘실록實錄’의 정신을 보여주는 일화로 유명하다.


목숨을 걸고 기록을 남긴 사관의 의기는 칭찬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거꾸로 이는 제나라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안영이 세상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나라의 군주가 바뀌는 일이 벌어지고 만다. 제나라는 그대로이나 군주의 가계가 바뀐 것. 제나라의 황금기를 연 관중과 제나라의 몰락을 보여주는 안영을 함께 열거한 것은 어째서일까? ‘제나라의 재상’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이 둘은 너무도 다르지 않나?


업적으로만 따지면 안영보다 관중이 훨씬 더 뛰어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관중은 그 뒤에도 대대로 훌륭한 재상의 상징으로 언급되는 인물이니. 그러나 사마천은 안영에게 더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의 마부가 되어도 좋다는 정도로. 그것은 관중에 비해 안영이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기 때문에 그렇다.


월석보와 안영의 이야기를 보자. 월석보가 죄인이 되었을 때 안영은 그가 비범한 인물인 줄 알고 자신의 말을 풀어 그를 데리고 왔다. 그러나 집에 와서는 월석보에게 별 예우를 갖추지 않았다. 이에 분개한 월석보가 집을 떠나려 하자 안영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비록 모자란 사람이지만 당신을 저 옥중에서 꺼내 주지 않았는가?


이에 대한 월석보의 대답이 걸작이다. 군자는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사람에게는 뜻을 굽히나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뜻을 펼치는 법. 당신이 나를 옥중에서 꺼내 주었으니 나를 안다는 것인데 나를 알아주면서도 무례하다면 이는 옥중에 갇혀 있는 것만 못하다!


사마천의 <사기열전> 전체에 흐르는 주제 가운데 하나가 여기서 명확히 드러난다. 누군가를 알아준다는 것은 단순히 그의 능력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인정한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 도리어 알아줄 뿐이라면 그것은 무시하는 것만 못하다. 그에 합당한 태도로 대우해주지 않는다면 그보다 굴욕적인 것이 어디 있겠는가.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게 문제가 아니다. 본디 제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기란 어려운 법이다. 더 큰 문제는 알아주는 자들이 합당한 태도를 지니고 있지 못할 때다. 나를 알았기에 그에 합당한 태도를 나는 요구할 자격이 있다!


이어지는 또 다른 고사는 안연의 마부 이야기이다. 이른바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식으로 재상 안연의 마부라며 뻐기고 다녔나 보다. 그의 아내는 그의 허위를 보고 해어질 것을 요구한다. 안영을 보라. 그는 비록 키도 작고 볼품없지만 그가 품은 뜻은 높고 늘 자신을 낮추고 있다. 그런데 당신은 품은 뜻도 없으면서 스스로 의기양양하니 이게 무슨 꼴인가. 이에 마부는 자신의 태도를 고치고 그 결과 안영의 눈에 들어 대부의 자리에 올랐다는 이야기.


사마천은 평생 자신을 알아줄 사람을 갈구하는 인물이었다. 그가 무고하게 사형을 받아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의 편을 들어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사마천은 형벌의 치욕을 홀로 견뎠다. 그런 그이기에 월석보를 풀어주고, 겸양을 배운 자신의 마부를 대부로 올려준 안영의 이야기에 탐복하지 않았을까?


더불어 그가 높이 사는 것은 안영의 높은 기개다. 비록 안영의 힘이 제나라의 어지러움을 바로잡을 수는 없었다고 하나 그는 최저의 집에 죽은 장공의 시신 앞에 울음을 감추지 않을 정도로 의기가 있었던 인물이었다. 게다가 안영은 군주의 안색을 살피지 않고 간언을 했다. 보디 간언이란 군주의 얼굴을 붉히게 만들기 마련인 법. 안영은 그것을 잘 알았던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래는 <좌전>에 실린 기록이다.


제나라 임금(경공)이 사냥터에서 돌아온 뒤, 안자가 천대에서 시종하고 있었다. 이때 양구거가 수레를 타고 도착하였다. 임금이 안자에게 말했다.

“오직 양구거만은 나와 화합하고(和)있다.”

“그도 역시 뇌동(同)하고 있습니다. 어찌 화합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화합과 뇌동은 다른가?”

“다릅니다. 화합이란 마치 국을 끓이는 것과 같습니다. 물, 불, 식초, 젓갈, 소금, 매실 등을 준비하여 생선과 고기를 요리하는데, 한 사람이 장작으로 불을 때면 요리사는 양념을 합니다. 간을 맞추면서 부족한 것은 더 넣고, 지나친 것은 묽게 합니다. 군자(임금)는 그런 국을 먹고 마음을 평정하게 합니다. 군신 관계도 역시 그렇습니다. 임금이 옳다고 여기는 일에 그른 점이 내재할 경우, 신하는 그 그른 점을 지적함으로써 옳은 일을 잘 성취할 수 있도록 합니다. 또 임금이 그르다고 여기는 일에 옳은 점이 내재할 경우, 신하는 그 옳은 점을 지적함으로써 그른 일을 제거할 수 있도록 합니다. 그럼으로써 정치가 평정되어 과오를 범하지 않게 되면, 백성은 불평하는 마음이 사라집니다.”

- <논어집주>, 박성규 역, 소나무. 538쪽 각주 2번에서 옮김.


공자는 일찍이 '군자화이부동君子和而不同 소인동이불화小人同而不和’라 하였다. 이를 보면 안영은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삶을 추구했던 인물인 셈. 어지러운 세상에서 스스로를 부동不同, 즉 동일성을 깨뜨리는 존재로 규정하고 이를 유지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정치에서 늘 ‘화합和合’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을 보면 과연 무엇이 화합인지 되물을 수밖에 없다. 내편이 되라는 것이 화합인가? 나와 다르지만 적당히 어울리자는 게 화합인가? 범안犯顏, 상대의 안색을 거스르는 것이 화和의 본질임을 안영은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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