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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Jan 31. 2023

반역의 동양철학

이번에도 노자가 문제다. 쓸데없이 노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흥분한다. 노자에 대한 분노를 뿜뿜 쏟아내곤 한다. 연구자로서 모든 텍스트를 동등하게 사랑할 수는 없을 테다. 손이 가는 텍스트가 있고, 꼴리는 텍스트가 있기 마련. 그러나 아무래도 노자가 좋다는 사람들하고는 툭툭 뭔가 틀어지는 일이 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저는 <노자>가 신비한 책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한 명의 연구자로서 <노자>에 어떤 특별한 철리哲理가 담겨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동양철학의 최고라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무위자연無爲自然을 노래한 책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태반의 이해가 과장되었다 생각합니다. 나아가 은밀한 욕망이 감추어진 책이라 생각합니다. 권력의 기술, 절대적 권력을 꿈꾸는 통치자를 위한 책이라 생각합니다. 황제의 욕망, 영속적 지배를 꿈꾸는 욕망이 <노자>의 핵심입니다."


요컨대 내가 주장하는 바는 이렇다. 노자는 초월적 권력의 출현과 연결되어 있으며, 텍스트 내부의 내용 태반이 이 초월적 권력의 기만술을 이야기한다. 따라서 지배자의 철학, 특정한 목적 수행을 위한 기만의 철학으로서 노자를 경계해서 읽어야 한다. 한 발 더 나아가면 굳이 노자를 읽어야 할까 의문이다. 쓸데없는 공부가 어디 있으리랴마는 노자에 대한 선망은 노자 텍스트에 아른거리는 욕망을 간과하게 만든다. 나아가 동양철학에 대한 특정한 기대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의무를 강요한다. 


두루뭉술한 언어가 싫다. 물론 모든 고전 텍스트의 주제를 오늘날의 말로 바꿀 수는 없더라도, 무책임하게 사용하는 건 학자로서의 덕목이 아니다. 도사道士라면 모를까. 그래, 태반이 도사 노릇을 하는 게 문제다. 대중은 도사를 찾아 이리저리 휘저어 돌아다니고, 도사 노릇을 잘한다 손뼉 치며 못한다 손가락질한다. 동양철학을 공부하면서 전문 지식인 입네 하는 것은 그런 도사 노릇을 하고 싶지 않아서다. 나라고 도사놀음을 못하느냐마는 그런 짓을 하고 싶지 않은 것은 그것이야말로 시대의 해악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국 왜 동양철학을 공부하느냐는 질문이 날아와 꽂힌다. 저항의 길을 찾기 위해서라고 말했으나 사실 별로 좋은 대답은 아니었다. 동양철학은 저항의 학문이 될 수 있는가? 반역의 동양철학이라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사실 저항과 반역의 학문은 다른 데 있는 게 아닐까. 동양철학은 세상을 바꾸는 것도 세상을 설명하는 것도 제대로 못하는 반쪽짜리 학문이다. 


지식은 힘이다라는 말에도 동양철학은 해당되지 않는다. 사회자본을 취득하기 위한 도구로서 동양철학은 가성비가 떨어지는 공부다. 환전되지 않는 낡은 골동품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저항의 길을 제대로 모색하게 하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저항과 반역은커녕, 동양철학의 태반은 고상한 꼰대질이다. 남을 지배하는 법, 효제충신의 공경스런 백성을 기르는 학문이다. 대관절 이 낡은 것을 붙잡고 무엇하려는 것인지. 돈벌이도 안 되며, 도사 놀음에 가까운 고상한 꼰대짓에 여전히 허우적거리고 있는 게 싫다. 솔직해져야 했다. '아무 쓸모없다'라고 답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이 나는 것은 참을 수 없다. 20세기 중국철학자들이 찬양한 정반正反의 철학, 버려야 가질 수 있다는 식의 교훈을 고개를 끄덕이며 들을 수 없다. 그게 음양론이건, 동양적 변증법이건, 하나의 자연적 지혜건... 고대인들이 발견한 세계를 설명하는 하나의 방식임에는 틀림없으나 객관적 접근은 아니며 사회와 자연, 나아가 삶의 도덕으로 확장되어서는 안 된다. 버려야 가진다는 말이 하나의 과학적 진리인가? 비워야 채운다는 말은 자명한 진리인가? 일월영측, 해는 차고 달이 기운다는 법칙이 있다고 한들 그것이 사회적 규범으로 설명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그리고 그것이 개별 인간의 바람직한 태도로 이야기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설령 비워야 가질 수 있다고 한들 오늘날 헐벗은 삶들에게 무엇을 더 비우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비워야 채운다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면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 많아 든든하기 때문이 아닐까.


불행하게도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지 않는다. 부드러운 것이 단단한 것을 이기지 않는다. 태극권은 영화에나 나오는 환상이다. 강한 힘을 얻으려면 근육을 키우는 것이 낫고, 유연한 몸을 가지려면 스트레칭을 하는 게 낫다. 동양철학을 한다고 지혜롭지도 않을뿐더러, 더 좋은 삶을 살지도 않는다. 지혜로운 삶은 하루하루를 숭고히 살아가는 소박한 삶들에게서 찾자. 동양철학을 하는 이들 태반은 날품팔이 지식 소매상에 불과하다. 


거의 반평생을 배웠는데 구도자가 되지도 못했고, 행복한 삶을 건지지도 못했다. 남을 행복하게 돕지도 못했으며 세상을 더 좋게 만들지도 못했다. 내가 가진 지식의 태반은 세상을 더 나쁘게 만드는 것일 테다. 반역과 저항을 이야기하나 나도 반역과 저항의 실천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이 냉소의 광야에서 반역의 동양철학의 길을 더듬어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만은 잃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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