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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Dec 17. 2024

무엇을 쓰는가 보다 어떻게 쓰는가

<명천산문강의> 발제문(원굉도 & 장대)

글쓰기의 어려운 점은 쓸 거리가 없기 때문이 아니다. 어떻게 써야 하나 태도를 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여 글쓰기란 끊임없이 태도를 묻는 작업이기도 하다. 어휘를 고르고 문장을 지어내는 것은 모두 태도의 결과물이다. 하여 인상적인 글이란 그의 독특한 태도, 관점, 자리에 있다고 하겠다. 문인들의 지도를 만들어 볼 수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누군가의 글을 깊이 읽으면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다. 


저자는 원굉도에 대해 세상을 벗어나는 것과 세상으로 들어오는 것 두 측면을 중심으로 이야기한다. 오래도록 중국 지식인은 모순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거의 대부분의 중국 문인들은 모두 한편으로는 관직을 맡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투덜거리면서 나는 은거하겠다, 관리가 되는 것은 정말 재미가 없다고 떠들어댄다는 것입니다.] 원굉도는 관료가 되기도 했고 세상을 도피해 은거하기도 했다. 저자는 이렇게 왔다 갔다 했던 까닭이 경제적 이유 때문이라고 말한다. 


[관료와 상인이 '성색'에 재주가 있고 문인이 '운치'를 좋아한다는 것이 일반 사람들의 견해인데, 원중랑의 편지를 읽어보면 여러분은 이 사람이 이러한 제약 없이 생선과 곰발바닥을 둘 다 먹으면서 즐겼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양쪽 모두를 담고 있다는 뜻이다. 이는 명말 이후의 변화한 경제적, 문화적 상황과 맞물려 있다. 저자는 산중의 운치를 가지는 동시에 <금병매>와 같은 색정적인 글, 이 둘을 융통성 있게 처리한 사람으로 원굉도를 소개한다.


융통성이라니 참 부러운 점이다. 그렇지만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그런 맛이 있다. 그래서일까 이어지는 장대에 대한 논의에 더 관심이 간다. [벽이 없는 사람과 사귀어서는 안 된다. 그에게는 깊은 감정이 없기 때문이다. 흠이 없는 사람과 사귀어서는 안 된다. 그에게는 진실함이 없기 때문이다.] 무릎을 치는 말이다. 벽과 흠이 없는 사람이란 멋도 맛도 없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벽과 흠을 만들어내는 것일까. [하나에 깊이 빠지면 작게는 흠이 되고 크게는 벽이 된다.] 


사랑하는 것이 없는 사람의 글은 맹맹하다. 무엇이든 사랑해 본 적이 있어야 깊이와 굴곡이 만들어진다. 이런 까닭에 맨질맨질한 글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는 글, 독자를 매어두는 표현이 없는 글을 싫어한다. 뚜렷하되 왜곡이 있는 글, 자기모순이 도래한 글을 좋아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그가 자조적 자서를 썼다는 점이 흥미롭다. 자신을 이야기하되 자조적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것. 때로는 쓸쓸함이 묻어나면서 또 한편으로는 은근히 자신을 내보이는 글.


저자는 소백과사전 형식의 <야항선>을 소개한다. 일종의 독서일기로 책을 종류별로 발췌하여 정리한 글이다. 자료를 수집하고 색인을 붙이는 정도에 불과하나 그것이 이후에 장대의 글쓰기에 영향을 끼쳤으리라. [나는 순수한 문인은 '너무 가볍고' 전문적인 학자는 '너무 무겁다'고 생각하는 데, 장대의 글이 '무거운 것을 가벼운 것처럼 들어 올린 것'은 그의 학문이 크지도 작지도 않은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말이다. 글이란 너무 무거우면 독자를 찾기 힘들고, 너무 가벼우면 금방 쓰임을 잃는다. 적당한 무게와 부피를 찾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장대가 서호에 대해 쓴 글도 흥미롭다. 저자는 그를 '도시 시인'으로 소개한다. 그가 묘사하는 것이 흔한 산수자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도시'라는 생활공간, 이곳은 귀족예술과 민간예술의 경계가 사라지고 뒤섞이는 곳이다. 여기서 그는 서호의 뜬 달을 보는 다섯 종류의 사람을 이야기한다. 한편 그것을 보며 관찰하는 '나'가 있다. 이러한 관찰과 성찰의 자리가 독특한 지점일 것이다.


[이러한 필치의 가장 직접적인 연원은 분명히 <세설신어>일 것입니다. 장대 자신을 포함하여 <도암몽억>에 실린 많은 사람들에게는 모두 진대 사람들의 분위기가 있습니다.] 저자는 명말청초 문인을 위진시대의 문인과 연관 지어 설명하곤 한다. 그것은 두 시대 모두 극심한 변화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글도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는 거울이다. 어지러운 변화 가운데 그 변화의 양상을 어떻게 담아내는 가 하는 것이 그런 시대를 사는 문인에게 주어진 숙제였을 테다.


예전에는 전범典範으로 삼을만한 글을 좋아했다 싶다. 따라하고 싶은 글들, 훔치고 싶은 문장들. 그러나 요즘은 변화 중에 있는 글에 좀 관심이 간다. 시대의 변화 가운데 내 자리와 방향을 스스로 가늠해보고 싶어서가 아닐까. 가만히 있으면 도태되고, 엉뚱한 방향으로 가면 미아가 된다.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까. 변화의 숙명 가운데 제 자리를 찾는 것은 참 힘들다. 이것이라고 똑 부러지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참 좋으련만.


태도의 문제는 스타일의 문제이기도 하다. 어떻게 쓸 것인가. 화려하게 쓸 것인가, 담담하게 쓸 것인가. 열정을 담을까 냉소를 담을까. 무겁게 혹은 가볍게. 친절하게 혹은 날카롭게. 잘 모르겠다. 책을 읽으며 몇 명의 문인의 삶을 엿보고 그의 문장의 편린을 맛본다. 그 가운데 입맛에 맞는 사람이 있고, 관심이 가는 사람이 있고 영 밋밋한 사람이 있으니 아무런 태도가 없다고는 할 수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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